감독
김형준

주연
설경구....강민호
류승범....이성호
한혜진....민서영
성지루....윤종강
남경읍....오반장


(진상을 밝히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군데군데 가벼운 스포일러가 노출될 겁니다.)

강민호와 이성호

[용서는 없다]의 주인공 강민호는 대한민국 최고의 부검의인데, 어쩌다보니 새만금 근처에서 저질러진 토막살인사건을 맡게 됩니다. 그와 안면이 있는 풋내기 형사 민서영이 동네 환경운동가인 이성호를 용의자로 잡아넣었는데, 이 친구가 글쎄 강민호에게 엄청난 협박을 합니다. 미국에서 막 도착한 강민호의 딸을 납치했으니 자기가 풀려나게 협조하지 않는다면 딸을 죽여버리겠다고요.

노련한 전문가가 인질이 된 가족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임무와 모순되는 일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니, [용서는 없다]는 [세븐 데이즈]나 [24] 1시즌과 같은 장르에 속해 있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이런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이런 영화가 유발하는 서스펜스가 그렇게 즐거운 편은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가 이 설정으로 제 마음에 드는 영화를 뽑아내지 말라는 법도 없지만.

그런데 왜 이성호는 이런 살인을 저지르고 강민호에게 그런 일을 시키는 걸까요? 물론 무언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처음에 그것은 환경운동과 관련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환경운동으로 흘러가지 않아요. 이성호는 그보다 전형적인 복수동기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고요? 아마 관객들은 시작부터 어느 정도 눈치챘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주인공의 직업과 살인의 방식만 봐도 짐작이 가죠.

트릭이 너무 쉽다고 불평하지는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더 빨리 눈치챌 수 있는 거죠. 그리고 들통난 뒤에도 그 트릭은 일종의 악마적인 감수성으로 관객들을 자극합니다. 결코 즐거운 경험은 아니지만 관객들을 졸린 상태로 내버려두지는 않아요. 이 영화를 보고 즐거운 기분으로 극장을 나서는 관객은 거의 없겠지만 원래 감독이 그런 걸 노렸으니 어쩌겠습니까.

그러나 제가 이 영화에 대해 할 수 있는 좋은 소리는 여기서 끝입니다.

자,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영화를 까기로 하겠습니다. 가장 제가 불편했던 건 이성호가 제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의 복수자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에너지 배분이 엉망이라는 거죠.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복수자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단 잔챙이부터 가볍게 없애고 최종악당에게는 마지막에 가장 큰 고통을 안겨줄 것입니다. 그게 정상적인 순서입니다. 하지만 한국 영화에서는 이 기초적인 순서를 지키는 복수자는 이상할 정도로 드물죠. 이성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고통스러운 삶을 산 건 사실이고 강민호 역시 어느 정도 여기에 책임이 있는 것은 사실지만 그 어떤 기준을 적용한다고 해도 강민호와 주변 사람들이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성호는 우리가 안 보는 동안 다른 복수도 한 모양이지만 그거야 우리가 알 바 아니지 않습니까? 게다가 그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들을 손도 대지 못한 건 거의 확실합니다. 그랬다면 이미 뉴스에 떴을 테니까요. 다시 말해 이성호가 이 영화에서 저지르는 짓은 잔인하고 무의미한 삽질입니다. 그걸 관객들이 두 시간 동안 봐야 하는 겁니다.

이성호의 동기도 불쾌한 건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이 영화의 태도 전체가 불쾌합니다. 얼핏 보면 이성호는 사랑하는 누군가가 겪었던 고통에 분노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그는 그냥 그 과정 중 자기가 겪은 고통에 더 화가 나 있는 거예요. 위에서 삽질이라고 한 복수 과정도 이렇게 보면 대충 이치가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에게 사랑하는 대상인 여성은 분노의 매개체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런 말도 안 되는 범죄를 가볍게 저지르는 거죠. 이것은 전형적인 충무로 마초식 사고방식으로, 제가 옛날 한국 액션 영화들을 즐겁게 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여간 감독은 관객들이 이런 인물에게 연민을 느끼고 그를 통해 용서에 대해 생각해보길 바란 모양인데, 미안하지만 어림없습니다. 그는 그냥 시작부터 위험하고 불쾌한 인물이며 그의 희생자가 된 '악당들'에 비해 조금도 나을 게 없습니다. 아니, 더 심하게 나쁘죠.

악당에게 동정할 구석이 전혀 없다면 최소한 이성호와 강민호의 지능대결을 즐길 수는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용서는 없다]에는 그런 것도 없습니다. 이 영화에서 이성호의 교활한 계략처럼 보이는 것은 엄청나게 일을 못하고 게을러 빠진 경찰과 운명의 신의 적극적인 협조를 통해 아주 우연히 이루어진 것입니다. 더 나은 해결책이 나올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요. 하지만 이 영화에는 안 보입니다. 결코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 되는 각본이었어요.

그렇다면 설경구와 류승범의 연기대결을 볼 기회는 주어질까요? 아뇨. 그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배우 탓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 배우들을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지만, 이들 모두 기본이 된 배우들이라는 사실은 인정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배우가 실력이 있어도 극복할 수 없는 영화가 있습니다. [용서는 없다]가 바로 그런 영화입니다. 한마디로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연기와 대사에 대한 감이 전혀 없습니다. 아무리 노련한 배우라도 극복할 수 없는 대사와 상황이 결정적인 장면들마다 튀어나와요. 여기서 가장 손해를 본 건 두 남자 배우들이 아니라 얼떨결에 영화판에 들어왔다가 미스캐스팅과 말도 안 되는 대사 때문에 곤욕을 치른 한혜진이겠지만요.

보도자료를 읽다가, 이 영화의 감독이 3년 전에 누나를 교통사고로 잃었고 그 때 겪은 심적고통에서 이 이야기가 나왔다는 정보를 접했습니다. 가족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슬픈 일입니다. 그 일을 겪는 동안 그 일을 불러일으킨 누군가에 대한 복수 감정을 느끼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전 이 모든 것들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전 왜 관객들이 그의 복수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건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09/12/22)

DJUNA

기타등등

4대강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첫 충무로 영화입니다. 처음 몇 분 동안은 순전히 그 이유 때문에 점수를 더 줄 생각도 했으니 이 나라 신세도 암담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