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알프레드 히치콕 Alfred Hitchcock

주연
잉그리드 버그만....알리시아 후버만
Ingrid Bergman....Alicia Huberman
케리 그랜트....T.R. 데블린
Cary Grant....T.R. Devlin
클로드 레인즈....알렉산더 세바스찬
Claude Rains....Alexander Sebastian
루이스 캘헌....폴 프레스콧
Louis Calhern....Paul Prescott
레오폴딘 콘스탄틴....마담 세바스찬
Leopoldine Konstantin....Madame Sebastian

[오명]의 주인공은 나찌 스파이의 딸인 알리시아 후버만입니다. FBI한테서 스파이일을 제안 받은 알리시아는 리오로 날아가서 아버지의 친구였던 나찌 잔당 알렉산더 세바스찬에게 접근합니다. 나찌 잔당들은 세바스찬의 포도주 창고 안에 뭔가 숨겨 놓고 음모를 꾸미고 있는데, 그게 과연 뭘까요?

가르쳐 드려요? 그들이 포도주 창고 안에 숨겨둔 건 우라늄이었답니다. 몰래 핵폭탄을 만들고 있었나 봐요.

왜 스포일러 경고도 없이 이렇게 중요한 정보를 흘렸냐고요? 그건 이게 중요한 정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장 완벽한 히치콕 맥거핀 중 하나지요. 세바스찬의 포도주 창고 안에는 다른 어떤 것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다이아몬드, 금괴, 총기, 히틀러... 스토리를 끌어가기 위해서는 필수적이지만 정작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죠.

생각해보면 스파이 모험담처럼 보이는 도입부도 의미가 없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이 영화는 스파이물도 아니거든요. 꼭 인류의 운명을 좌우할 것 같은 거대한 음모가 진행중이지만 영화가 중반을 넘어서면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심지어 가장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은 미국측 리더 프레스콧 영감도 태평스럽기 그지 없군요. 꼭 있어야 할 것 같은 권선징악적 결말도 없답니다. 스파이물 플롯도 맥거핀인 건 마찬가지였던 거죠.

[오명]이 진짜로 하고 있는 이야기는 삼각관계 러브 스토리입니다. 아이러니컬하고 치명적인 러브 스토리죠. 미국측 요원인 데블린과 세바스찬 모두 알리시아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철철 끓는 감정에도 불구하고 모두 알리시아를 끔찍한 위기로 몰고갑니다. 데블린은 알리시아를 나찌 잔당 속에 던져넣고, 나중에서야 그 사실을 알아차린 세바스찬은 알리시아를 독살하려 합니다. 남자 운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있을까요?

따지고 보면 [오명]에 나오는 모든 요소들은 이런 식으로 비틀려 있습니다. 보여지는 것 그대로인 게 없죠. 포도주 창고는 우라늄으로 가득 차 있고, 결혼은 스파이 행위이며, 연인들은 서로에 대한 감정이 커질수록 냉담해지고, 살인은 예절바르고 정중하게 진행되며, 무엇보다 영화 자체도 스파이 물을 위장한 러브 스토리죠. 어린이용 만화처럼 단순한 설정이 이처럼 복잡하고 미묘한 드라마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위장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히치콕이 할 일도 많아졌습니다. 이 영화를 만들면서 그도 재미있었을 거예요. 영화 대부분 장면에서 대사와 실제 액션이 따로 노니까요. 대표적인 부분이 '세상에서 가장 긴 키스 신'으로 알려진 알리시아와 데블린의 키스 신입니다. 대사만 읽는다면 이 장면이 키스 신이라는 것을 눈치채지도 못할 지경이죠. 둘은 '저녁 때 뭘 먹을까'와 같은 사소하고 일상적인 일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실제로 보면 끊어질 듯 하다가 다시 이어지는 키스들이 로맨틱하고 미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멋진 장면입니다.

키스 신은 극히 일부의 예일 뿐입니다. [오명]은 교과서로 쓰일만한 장면들이 넘쳐납니다. 테크닉에 관심있으신 분들은 세바스찬의 파티 장면을 서술하는 복잡한 크레인 숏에 대해 기억하실 겁니다. 무엇보다 죽어가는 알리시아가 데블린과 함께 나선 계단을 내려오는 느릿느릿한 장면이 불러일으키는 서스펜스(나중에 영화를 다시 체크해보시면 아시겠지만 그 장면에서 계단은 전에 비해 두 배로 늘어난 듯 합니다!)는 잊을 수 없습니다.

그 덕에 감독 뿐만 아니라 배우들의 비중도 커졌습니다. 연기할 거리가 더 많아졌으니까요.

언제나 자신의 '쿨'함을 장기로 삼았던 그랜트는 데블린의 냉소적인 성격 때문에 '스타'로서 조금 손해봤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처음 영화를 보았을 때는 그랜트의 얼굴도 기억 못했을 정도니까요. 그러나 그는 배우로서는 여전히 훌륭합니다. 데블린이라는 캐릭터의 모호한 성격을 보조하기 위해 그의 '스타성'이 영리하게 사용된 흔적도 보이고요.

잉그리드 버그만은 완벽합니다. 아카데미상이 뭐라고 주장하건 [오명]은 가장 훌륭한 버그만 영화입니다. 거의 연기를 하지 않았던 [카사블랑카]보다는 훨씬 더 버그만의 배우 재능을 잘 보여주는 영화지요. 그랜트와는 달리 알리시아의 이중성은 결코 버그만의 개인적 매력을 손상시키지도 않습니다. 버그만은 그때만 해도 영어 연기에 자신이 없었다고 했는데, 이게 그 결과라면 그 사람의 기준은 도대체 어디였는지 모르겠군요.

그리고 클로드 레인즈는 가장 훌륭한 히치콕 악당 중 하나입니다. 아마 그가 그렇게 완벽한 악당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연기한 세바스찬이 결코 악당이 아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죠. 그는 아직도 엄마한테 쥐여 사는, 교양있지만 유약한 남자에 불과합니다. 간신히 엄마한테서 독립한답시고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까지 했는데, 하필이면 그 여자가 자기 목숨을 쥐고 흔드는 미국 스파이였다니, 이 남자도 참 불쌍하죠. 쪼르르 엄마한테 달려가 '어머니, 난 미국인 스파이와 결혼했어요.'라고 말하는 그의 초라한 모습은 정말로 동정 갑니다.

세바스찬이라는 캐릭터 덕택에 영화의 삼각관계는 더 입체적이 됩니다. 관객들이 모두 그를 동정하게 되니까요. 그가 영화 끝까지 알리시아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덕택에 그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죠. 그가 사랑을 위해 한 결정 모두가 그를 파멸과 죽음으로 이끄니까요. 그리고 그는 결코 영웅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위엄을 잃지 않은 채 그 파멸을 받아들입니다. 세바스찬의 이야기는 공주를 사랑한 난쟁이에 대한 동화의 스파이 버전을 보는 것 같습니다. (정말로 레인즈가 버그만보다 키가 한참 작기도 했고요. 그 때문에 다양한 트릭들이 사용되었답니다. 자세히 보면 레인즈의 키가 줄어들었다가 늘어났다 한다는 걸 알 수 있죠.)

[오명]은 히치콕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아닙니다. 가장 히치콕적인 작품도, 가장 걸작도 아닐지 모르죠. 하지만 가장 완벽한 히치콕 영화 중 하나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버티고]나 [사이코]처럼 노골적으로 히치콕다움을 드러내는 영화가 아닐지 몰라도 잊어서는 안되는 작품입니다. (00/06/17)

DJUNA

기타등등

히치콕은 세바스찬의 파티 장면에 손님으로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