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닐 라뷰트 Neil LaBute

주연
르네 젤위거....베티 사이즈모어
Renée Zellweger....Betty Sizemore
모건 프리먼....찰리
Morgan Freeman....Charlie
크리스 록....웨슬리
Chris Rock....Wesley
그렉 키니어....데이빗 라벨 박사/조지 맥코드
Greg Kinnear....Dr. David Ravell/George McCord
아론 에크하트....델 사이즈모어
Aaron Eckhart....Del Sizemore
티아 텍사다...로사
Tia Texada....Rosa
캐슬린 윌호이트....수 앤
Kathleen Wilhoite....Sue Ann
앨리슨 재니....라일라 브랜치
Allison Janney....Lyla Branch
크리스핀 글로버....로이
Crispin Glover....Roy
프루잇 테일러 빈스....발라드
Pruitt Taylor Vince....Ballard
엘리자베스 미첼....클로이
Elizabeth Mitchell....Chloe
이승희....자스민
Lee Sung Hi....Jasmine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듀나 전 연속극 체질은 아닙니다. 적어도 지난 10여년 동안 연속극에 매달린 적은 거의 없답니다. [순풍 산부인과]나 [세 친구]같은 시트콤들은 견뎌낼 수 있습니다. 중간에 몇몇 에피소드를 빼먹어도 따라가는 데 아무 문제가 없으니까요. 미국 텔레비전 시리즈처럼 각 에피소드들이 비교적 독립적인 작품들도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몇 십 편이 끝도 없이 이어지며 하나의 이야기를 끌어가는 연속극은 견뎌낼 자신이 없어요. 마치 텔레비전 시리즈의 감옥 안에 갇힌 듯한 느낌이 든답니다. 특히 거의 매일같이 이야기를 끌어가는 아침 연속극이나 미국 소프 오페라들은 무섭기까지 합니다. [제너럴 호스피탈]이나 [가이딩 라이트]같은 시리즈들은 보통 수십 년을 끌잖아요.

파프리카 소프 오페라들은 원래 영화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봐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건 우리네 삶처럼 끝없이 구불구불 이어지는 거예요. 단지 더 자극적이고 극적이고 야할 뿐이죠. 우리가 이웃의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봐야 할 필요 없는 것처럼 그런 시리즈도 처음부터 시작해야 할 필요도 없고 강박적으로 에피소드들을 모두 봐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바로 그런 면이 소프 오페라 캐릭터들에 대한 시청자들의 친근감을 극대화시키는 것일지도 모르죠. 중간중간에 배우들이 바뀌는 경우도 있지만 열성팬들은 주로 수십 년 동안 같은 캐릭터들을 쫓아가기 마련입니다. 이들이 캐릭터들과 설정에 푹 빠져 현실과 혼동한다고 해서 이상해할 필요는 없죠.

듀나 그러고보니 소프 오페라에 미친 할머니가 악역 배우를 독살하던 내용의 단편 추리 소설이 생각나는군요. 제목이 뭐였더라?

[너스 베티]도 비슷한 집착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베티에겐 보다 그럴싸한 이유가 있습니다. 베티는 원래부터 현실과 환상을 구별 못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중고차 딜러인 남편이 청부업자에게 살해당하자 그 충격으로 좋아하는 소프 오페라 [사랑하는 이유]의 이야기가 진짜라고 믿어버리는 거죠. 그 시리즈의 주인공 데이빗 라벨 박사에 빠져 있던 베티는 라벨 박사를 만나러 로스앤젤레스로 갑니다.

파프리카 [너스 베티]는 [오즈의 마법사]를 원형으로 하고 있는 수많은 미국 영화들 중 하나입니다. 특별히 숨기려고 하지도 않아요. 일단 베티는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캔자스 출신이잖아요. 베티가 세트장에서 정신을 차리는 장면도 도로시가 오즈의 정체를 알아차리는 장면과 유사하고요.

듀나 하지만 [너스 베티]에서 환상과 현실의 경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일단 베티가 현실 세계에서 겪는 모험담은 [사랑하는 이유]보다 훨씬 극적입니다. 머리가죽을 벗기는 살인 청부업자가 뒤를 쫓는 동안 꿈 속의 왕자님을 극적으로 만나기까지 하니까요. 마지막의 완벽한 해피 엔딩 역시 영화가 또다른 멜로드라마의 관습 속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베티가 소프 오페라 세계에 환상을 품고 있는 것처럼 살인청부업자 찰리 역시 베티에게 환상을 품고 있습니다. 영화 후반부는 베티가 환상에서 깨어나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찰리가 베티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나는 이야기이기도 하죠.

파프리카 그 부분은 설득력이 좀 떨어지지 않던가요? 전 아직도 왜 찰리가 베티에게 그렇게 푹 빠져 있었는지 모르겠답니다. 베티는 매력적인 캐릭터지만, 찰리가 그런 식의 환상을 품을 여지는 별로 없습니다.

듀나 이론이 스토리보다 더 강한 작품에서 종종 등장하는 결함이죠. :-)

하여간 이 영화의 모든 사람들은 상대방을 자기 식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베티에게 데이빗은 실존 인물이고, 찰리에게 베티는 꿈 속의 여성이며, 데이빗을 연기하는 조지 맥코드에게 베티는 배우 지망생입니다. 영화는 이런 착각들을 그럴싸하게 연결하면서 여러 재미있는 해프닝들을 만들어내지요.

파프리카 심지어 그나마 현실적으로 보이는 웨슬리 역시 그런 환상에 빠져 있어요. 그는 [사랑하는 이유]의 간호사 캐릭터 자스민의 팬입니다. 자스민이 레즈비언으로 밝혀지자 분노하는 웨슬리의 모습은 이 영화에 나오는 다른 캐릭터들의 심정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듀나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 영화에서 환상의 파괴는 대부분 긍정적입니다. 찰리는 베티를 베티로서 사랑하게 되고, 베티는 환상에서 벗어나면서 새로운 자신을 찾게 되니까요. 그러나 그런 베티가 다시 [로마의 휴일]의 무대인 로마로 여행을 떠나며 끝나는 장면은 우리가 아주 완벽하게 환상에서 떨어져 살 수 없다는 소리가 아닐까요? 적어도 전 이걸 아주 냉소적으로 읽고 싶지는 않습니다.

파프리카 결말에는 환상과 현실에 대한 재미있는 주석이 따라붙습니다. [사랑하는 이유]가 사실이라고 믿던 베티는 정작 촬영장에서 대사 한마디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게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한 뒤로는 63회나 출연하는 능력있는 배우가 되지요. 결국 실제로 환상을 창조하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현실적이어야 합니다. 여기서 창조자와 수용자의 권력 관계가 드러나죠.

듀나 영화는 잔혹한 폭력과 달콤한 코미디를 적당히 뒤섞고 있는데, 이런 칵테일은 타란티노와 페렐리 형제 이후 아주 보편화되어서 아이디어 자체가 그렇게 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르네 젤위거의 순진하고 단순한 얼굴이 이런 복합적인 자극 속에 말려들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젤위거는 아주 잘 활용된 배우입니다. 우리가 별 부담없이 베티라는 정신나간 캐릭터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젤위거가 아무런 부담없이 자기 자신을 열어보일 수 있는 배우이기 때문입니다.

살인 청부 업자 역의 모건 프리먼도 훌륭합니다. 이 캐릭터의 동기가 더욱 잘 살아 있었다면 더욱 좋았겠지요. 하여간 정말 드물게 보여주는 로맨틱한 연기여서 신기하기까지 했습니다.

저에게 닐 라뷰트의 영화는 이게 처음입니다. [In the Company of Men]은 볼 생각이 전혀 들지 않고 [Your Friends & Neighbors]는 동네 비디오 가게에 없더군요.

그래도 [너스 베티]가 라뷰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단 각본가부터가 다르니까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 전작의 냉소주의에서 벗어나 보다 인간적인 작품들로 방향을 옮길 생각을 품고 있다고 추측할 수도 있겠죠. 진짜로 그런 의도라면 [너스 베티]는 꽤 성공작입니다.

파프리카 필름스 사이트에는 [사랑하는 이유]가 실제 소프 오페라라고 나와 있더군요. 그럴 리가요.

듀나 아, 그 정보는 믿지 말아요. 앨리슨 재니가 실존 인물 라일라 브랜치라고 나와 있는 걸요, 뭐.

파프리카 클로이 역의 엘리자베스 미첼과 자스민 역의 이승희가 키스하는 장면에서 마구 데자뷔 현상이 일어나지 않아요? 미첼이 [ER]의 킴이라는 걸 잊을 수 없는 걸요. 게다가 [사랑하는 이유]도 병원 드라마잖아요. (01/03/23)

D&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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