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마리오 바바 Mario Bava

주연
자코모 로시-스튜어트....폴 에스웨이 박사
Giacomo Rossi-Stuart....Dr. Paul Eswai
에리카 블랑....모니카 슈프탄
Erika Blanc....Monica Schuftan
파비엔 달리....루트
Fabienne Dali....Ruth
피에로 룰리....크루거 경위
Piero Lulli....Inspector Kruger
막스 로렌스....칼
Max Lawrence....Karl
자나 비발디....그랍스 남작부인
Giana Vivaldi....Baroness Graps
주제페 아돌바티....여관 주인
Giuseppe Addobbati....Innkeeper
발레리오 발레리....멜리사 그랍스
Valerio Valeri....Melissa Graps

파프리카 안녕하세요, 여러분. 듀나의 추억의 영화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듀나 자꾸 그렇게 이죽거릴래요?

파프리카 하지만 사실이잖아요, 그렇죠? [킬, 베이비... 킬!]은 제 앞에 있는 누군가의 추억의 영화입니다. 같은 나이 또래 사람들과 감상을 공유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게 추억의 영화가 아니라는 건 아니지요. 솔직해집시다. 듀나가 지금 이 영화에 대해 떠들어댈 수 있는 것은 박학한 영화적 지식 때문이 아니라 AFKN 금요일 자정 호러 영화 시간에 우연히 이 영화를 보았기 때문이지요.

듀나 그게 금요일 자정 호러 영화 시간에 본 영화인지는 모르겠어요. 일요일 8시 영화였을 수도 있어요. 그리고 여기에서 그런 체계적인 박학함이 그렇게까지 중요합니까? 구식 비유를 써먹는다면, 중요한 것은 누구를 사랑하느냐지, 그 사람을 어떻게 만났느냐가 아니지요. 게다가 제가 그런 체계적인 지식과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라는 거야 모두가 아는 사실이잖아요.

서투른 비유를 꺼내다가 좀 지나쳤는데, [킬, 베이비... 킬!]을 제가 '사랑하는' 영화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영화외적으로 저에게 정서적 영향을 끼치는 작품이라는 것은 분명하죠. 그건 AFKN 호러 영화 시간대에 대한 기억과도 상관 있습니다. 아마 밤에 몰래 본 영화들이라 그렇게 기억에 남는 것이겠지만요...

네, 추억의 영화가 맞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전 꿀릴 게 없답니다. 앞으로 회고적 분위기에 매달리지도 않을 거고요.

파프리카 안 보신 분들을 위해 간단히 줄거리를 요약해보기로 하죠. 이 영화의 무대는 트란실바니아의 작은 마을이고 무대는 20세기 초엽입니다. 대충 1910년이나 그 안쪽일 거예요. 경찰에 자신의 살인을 막아달라는 편지를 보내고 어떤 여자가 죽자, 검시의인 에스웨이 박사와 크루거 경위가 마을에 파견됩니다. 에스웨이 박사는 마을에서 일어나는 연속살인의 범인이 20여년전에 죽은 그랍스 남작부인의 딸 멜리사의 유령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을에 돌아온 의대생 모니카가 다음 표적이 되자, 그는 동네 마녀 루트와 함께 그랍스 부인의 저택으로 뛰어듭니다...

줄거리를 보면 알겠지만 이 영화는 초자연현상을 삽입한 추리물입니다. 오래된 장르이고 선례도 많지요. 하지만 영화가 미스테리에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에스웨이 박사도 그렇게 좋은 탐정은 아니고요.

듀나 그러나 결코 보기만큼 단순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적어도 이 영화는 잔혹한 장면을 보여주기 위한 핑계로 어설픈 스토리를 사용하는 그런 부류와는 다릅니다. 영화를 보다보면 꽤 재미있는 서브텍스트들을 찾아낼 수 있어서 평론가들도 재미있죠.

가장 눈에 뜨이는 것은 호러 관객들의 일반적인 선입견을 뒤집는 그 수법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흑발의 동네 마녀가 착한 쪽이고, 하얀 옷을 입은 금발 머리 여자 아이가 악역이지요.

단순한 역할 전환으로도 효과적이지만, 여기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많은 호러 영화들, 특히 바바가 자주 모방하고 또 장르를 쌓아갔던 19세기식 호러물들에는 다양한 계급 충돌의 흔적이 묻어 있습니다. 여러분도 [프랑켄슈타인]이나 [드라큘라]와 같은 영화들을 텍스트로 삼아 그런 식의 분석을 시도한 글을 꽤 많이 접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보통 이런 이야기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또는 자기가 속해있는 선입견을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지만, 아무래도 바바는 의도적인 것 같습니다. 하긴 60년대 중반의 이탈리아 감독이 이런 식의 접근법을 택했던 건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니지요.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면, 이 영화에서는 그랍스 남작부인과 멜리사로 대표되는 귀족 계급과 루트로 대표되는 평민 계급의 충돌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상대방의 악몽에 나올 것 같은 존재들로, 모두 기존 호러 영화 클리셰를 뒤집어 쓰고 있으며 (저택의 귀족 유령, 하층 계급의 마녀) 상대방에 대한 증오와 두려움의 감정에 휩싸여 있습니다. 그랍스 남작부인에게 '그 평민들'은 도움을 외치며 죽어가는 딸을 태평스럽게 방치한 괴물같은 '집단'이며, 마을 사람들에게 그랍스 남작부인은 딸의 유령을 이용해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여대는 자연 재해와 같은 존재죠. 단순한 유령의 복수극처럼 보이던 이야기는 영화가 진행되면서 점점 흐릿해져, 결국 타계급 전체에 대한 증오와 혐오, 두려움으로 이어집니다.

파프리카 역할 전환이라고 했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분명한 역할 전환은 아닙니다. 마녀 루트도 그렇게까지 결백한 사람은 아니며, 멜리사 역시 사악한 괴물은 아니죠. 악역을 맡을 만한 사람은 그랍스 남작부인뿐인데, 그 사람도 꼭 책임을 물을 수 있을만큼 정신이 멀쩡하지는 않으니까요.

듀나 네, 영화가 괴물 이미지와 희생자 이미지를 한꺼번에 묶어서 양쪽 모두한테 부여하고 있습니다. 역할 전환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건 상대적인 대조 때문이지요. 바바가 어떤 모럴이나 정치적 비판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 거대한 증오와 공포의 감정을 이용해 출구없는 악몽과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진짜 목적이 아니었겠어요?

파프리카 하여간 분위기는 죽입니다. :-) 그러나 이 영화의 분위기는 [사탄의 가면]의 고풍스럽고 세련된 그것과는 다르지요. 보다 싼 맛이 나며 천박합니다. 특히 배경 음악은 정말 싸구려죠.

하긴 그건 시대 영향일 겁니다. 6, 70년대 유럽의 다국적 호러 영화들은 다들 이런 식이었으니까요. 게다가 이 영화는 아주 싸고 빠르게 찍은 작품이지요? 겨우 2주만에 촬영을 끝냈다고 들었습니다.

듀나 보다 나은 버전으로 보았다면 다른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르지요. 우리가 본 것은 아무래도 16밀리 필름을 옮긴 것 같죠? 제대로 된 버전이라면 블로우업한 화면의 거친 느낌 같은 건 없었을지 모릅니다. 지금도 괜찮습니다만.

영화는 근사한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가장 훌륭한 건 역시 우리의 유령 멜리사입니다.

파프리카 그리고 제 앞에 있는 누군가는 기괴한 아역을 보기만 하면 무조건 환장하는 사람이지요!

듀나 근사한 건 사실이잖아요? 사실 다시 보기 전까지만 해도 다른 사람들은 거의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기억에 남았던 것은 모두 멜리사와 관련된 이미지였지요. 더러운 창문 너머로 안을 바라보는 그 소름끼치는 모습, 통통 튀어가는 하얀 공으로 아이의 존재를 묘사하는 방식, 그네를 타는 멜리사의 시점에서 바라보다 갑자기 뒤로 쑥 빠지는 흔들리는 카메라 그리고 달아나는 모니카의 손을 잡는 멜리사의...

파프리카 그 장면은 어딘지 모르게 [일곱 번째 희생자]에 나오는 재클린의 탈출 장면과 닮아있지 않아요?

듀나 그렇긴 하군요. 그렇지만 영화는 전체적으로 [현기증]과 더 닮았습니다. 모니카의 꿈 장면은 [현기증]의 영향을 받은 게 분명합니다. 그보다 더 분명한 모방은 후반부에 나오는 나선계단 장면이지요. 단지 바바는 히치콕의 복잡한 트릭 대신 그냥 줌을 사용하고 있죠.

파프리카 그 사람은 줌을 너무 좋아하는 게 탈이에요.

듀나 그래도 보기 좋잖아요? 지나치게 남발하는 경향이 있다곤 하지만 전 바바의 그런 거친 줌이 좋습니다. 역시 감상적인 추억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요.

그리고 그 계단 장면은 단순한 모방은 아닙니다. 바바가 영화 속에 부여한 끝없이 이어지는 나선계단의 이미지는 독립적이니까요. 모방일 수는 있어도 아주 창의적인 모방인 거죠. 다른 모방자들이 모두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고 영화에는 모방보다 창의적인 장면들이 더 많습니다. 그중 가장 근사한 것은 역시 에스웨이 박사의 추격전인 것 같아요. 저택 안에서 모니카의 목소리를 따라 달려가던 그는 그가 끝없이 이어진 똑같은 방안을 질주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립니다. 결국 그는 같은 방 안을 빙빙 돌고 있었던 거죠. 더 황당한 것은 그가 앞에 달려가는 그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고 마지막에는 결국 그를 따라잡는다는 것입니다!

파프리카 그 장면은 영화 맥락과 전혀 상관 없는, 철저하게 무의미한 부분이었지요.

듀나 네, 후반으로 갈수록 그런 느낌이 두드러집니다. 저택 장면부터 그나마 에스웨이와 관객들을 지탱했던 이성은 박살나는 거죠. 그 뒤에 이어지는 것들은 캐롤의 작품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넌센스들입니다.

파프리카 이 영화엔 잔혹한 장면은 그렇게 없죠. 살인을 직접 보여주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멜리사 역시 직접 사람을 죽이는 괴물은 아니고요. 바바는 폭력보다는 그 특유의 막강한 분위기와 아이디어로 이 모든 걸 끌어가고 있습니다.

듀나 타의에 의한 자살이 더 무섭고 폭력적이지 않아요?

파프리카 발 루튼 팬들한테나 그렇겠죠. 다리오 아르젠토 팬들한테 물어보세요. 그게 뭐냐고 하지. 아, 그러고보니 그 부분도 [일곱 번째 희생자]와 닮았네요. 루튼처럼 '철학적'은 아니지만요.

듀나 바바는 루튼처럼 '철학적'인 사람은 아니었지요. 이 영화의 가치도 그런 관념적인 것에 있는 것은 아니지 않겠어요? 그보다는 순전히 영화적인 스타일만으로 관객들을 압도하는 그의 거장다운 터치가 더 중요한 것이겠죠. (00/04/07)

D&P

기타등등

포우의 단편들을 각색한 옴니버스 영화 [Spirits of the Dead]의 마지막 에피소드 [Toby Dammit]에도 멜리사만큼이나 섬뜩한 금발 머리 소녀가 나오죠. 이 두 영화 모두 스콜세지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 나오는 악마에 영향을 주었다고 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