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비번 키드론 Beeban Kidron

주연
에밀리 애스턴....어린 제스
Emily Aston....Small Jess
샬로트 콜먼....제스
Charlotte Coleman....Jess
제랄딘 맥규안....어머니
Geraldine McEwan....Mother
케네스 크랜햄....핀치 목사
Kenneth Cranham....Pastor Finch
마저리 위더스....엘시
Margery Withers....Elsie
캐스린 브래드쇼....멜라니
Cathryn Bradshaw....Melanie
실리아 임리....쥬스베리 양
Celia Imrie....Miss Jewsbury
타니아 로드리게즈....캐시
Tania Rodrigues....Katy
바바라 힉스....시시
Barbara Hicks....Cissy
엘리자베스 스프릭스....메이
Elizabeth Spriggs....May

1. [오렌지만 과일은 아니다]

제스는 열정적인 기독교 신자 가족에게 입양된 빨강 머리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오렌지색 머리) 소녀입니다. 그러나 양녀를 선교사로 키우려는 어머니의 소망과는 상관없이 제스의 육체와 정신은 서서히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죠. 제스가 여자 친구 멜라니와 사랑에 빠졌을 때, 제스와 그녀가 속해있던 작은 세계는 결국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2. [오렌지...]와 [내 책상 위의 천사]

[내 책상 위의 천사]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두 괴상한 헤어 스타일의 빨강 머리 주인공이 힘겹게 성장해가는 내용의 3부작 미니 시리즈이고 둘 다 1990년작이니까요. 둘다 자서전 또는 자서전적인 소설이 원작이며 감독도 작가도 여성입니다. 우연일까요? 아니면 세계 빨강 머리 협회가 뒤에서 몰래 사주한 음모일까요?

3. 원작과 영화

[내 책상 위의 천사]와 달리 [오렌지만 과일은 아니다]의 작가 지넷 윈터슨은 자기 소설을 직접 각색했습니다. 적어도 원작자가 각색에 불만을 품을 이유는 없는 셈이죠. 그래서인지 이 영화에서는 감독인 비번 키드론보다 윈터슨의 비중이 더 큽니다. 적어도 오프닝 크레딧 맨 앞에 등장하는 이름은 키드론이 아니라 윈터슨입니다.

원작과 영화를 점수 매겨 비교 평가하는 것은 의미없는 일입니다. [오렌지...]의 경우도 예외가 아닌데, 같은 스토리를 따라가면서도 내용은 꽤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각색했다면 재해석이라고 해야겠지만, [오렌지...]에서는 윈터슨이 같은 내용을 약간 다른 입장에서 다시 썼다고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하긴 그 동안 자기 삶을 다시 돌이켜 볼 여유가 생겼겠지요. [오렌지...]를 쓸 때와는 달리, 영화로 각색될 당시의 윈터슨은 잘 나가는 작가였으니까요. 적어도 영화 [오렌지...]는 소설 [오렌지...]보다 관대합니다.

가장 눈에 뜨이는 차이는 서술 방식의 변화입니다. [오렌지...]는 자서전적인 일인칭 소설이며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지넷(영화에서는 제스)의 입담입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소설은 철저하게 지넷의 시점으로만 구성되어 있고 이 분노에 떠는 틴에이저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그렇게 입체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 소설이 진행되어가는 동안 근사하게 피어나는 지넷을 제외하면 주변 캐릭터들은 캐리커쳐 수준에 머물고 말지요.

그러나 영화는 소설처럼 철저하게 일인칭이 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영화는 소설의 입담과 상징, 우화들을 제거해 보다 단순한 이야기가 되었지만, 반대로 주변 캐릭터들은 소설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롭게 구현되어 있습니다. 엘시, 쥬스베리 양, 시시(이 캐릭터는 원작에선 이름도 나오지 않습니다)와 같은 인물들은 모두 원작보다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더 복잡한 인물들입니다.

쥬스베리 양을 예를 들어 본다면, 소설에서 그녀는 단순히 자신을 감추고 있는 레즈비언에 불과하죠. 하지만 영화는 레즈비언이라는 구체적인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소속 집단에서 제거될까봐 두려워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억누르는 그 캐릭터의 심리를 훨씬 공감가게 표현해냅니다. 왜 맞서지 않느냐고 떠들어대는 제스에게 "그럼 나는 어디로 가야 하니"라고 힘없이 대꾸하는 쥬스베리 양의 모습은 거의 강간에 가까운 원작 속의 섹스 신보다 훨씬 효과적이지요.

엘시와 제스의 우정도 훨씬 깊이 있습니다. 깊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정서적 충만감으로 넘쳐 나지요. 이 고집쟁이 틴에이저와 죽어가는 노인의 우정에는 단순한 아름다움 이상이 있습니다.

다소 확신없이 끝나는 원작에 비해, 집을 나온 제스가 주경야독하여 옥스퍼드에 들어가는 장면은 지나치게 '인간 승리'로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윈터슨이 집을 나와 주경야독해서 옥스포드에 들어간 건 사실인데.

그것보다, 원작에서는 다양한 상징으로 사용되는 '오렌지'가 거의 나오지 않는 것이 저에겐 뜻밖이었습니다. 결국 제목의 '오렌지'는 의미를 잃어버린 셈이지요. 제스와 제스의 가족은 끊임없이 오렌지를 먹어대지만 그 시각적인 인상은 일상 속에 묻혀서 그렇게 쉽게 드러나지 않아요. 아마 그걸 메꾸기 위해 제스가 그렇게 요란한 헤어스타일을 하게 된 것이겠지만요.

4. BBC 미니 시리즈

BBC에서 만든 미니 시리즈는 문학적 스노비즘과 차가운 각색이 결합된 안이한 작품으로 떨어질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단점들을 염두에 두더라도, 그들이 만들어내는 작품들은 늘 어느 정도 일정한 질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워낙 닦아놓은 것이 많고 배우 질이 좋으며 소스들이 풍요로우니까요.

그리고 이런 바탕이 적절한 원작과 시기를 만나면 결과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해집니다. [오렌지...]가 바로 그런 작품이었죠. 윈터슨의 근사한 각색과 키드론의 정교한 연출 덕에 영화는 '문학물' 또는 '텔레비전 미니 시리즈'의 영역에서 쉽게 떨어져 나옵니다. 그 결과 만들어진 건 창백한 각색물이 아니라 피가 끓고 정서적 힘이 넘치는 진짜 '영화'입니다.

순수한 '드라마'의 참맛을 잃어가는 요즘에 [오렌지...]와 같은 굵직한 드라마를 만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배꼽 떨어지는 영국식 음침한 유머로 가건, 종교 재판식 공포로 가건, 제스의 분노로 가건, 자아 탐색의 '감동'으로 가건, 영화는 늘 그 강한 정서적 힘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사실 텔레비전 용이라는 것에 덕 본 것도 많습니다. 165분이라는 장난이 아닌 러닝타임과 우직스러울 정도로 직설적인 어법도 공영 방송의 시리즈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니까요.

공중파 텔레비전이면서도 놀랄 정도로 개방적인 BBC와 영국 방송계의 풍토 역시 영화에 플러스가 됩니다. 아무리 심야 방송용이라지만 멜라니와 제스의 첫 섹스 신은 아주 대담하게 처리되어 있습니다. 억지로 에로티시즘을 조성하는 대신 키드론은 태평스러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이 장면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배우들이 있습니다. :-) 에밀리 애스턴과 샬로트 콜먼([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의 스칼렛)의 연결은 자연스러우며 모두 잘하고 있습니다. 콜먼의 연기는 약간 디테일이 떨어지긴 하지만 힘에 넘치며 무척 공감갑니다. 그 사람의 동글동글하고 조금은 별나 보이는 외모도 제스 역에 참 잘 어울리고요.

애스턴과 콜먼의 반대편에는 어머니를 연기한 제랄딘 맥규안이 있습니다. 맥규안이 그 어마어마한 랭커셔 사투리(이 영화의 사투리는 꽤 강한 편이라 영어권 사람들도 종종 캡션이 필요할 정도입니다)로 구현해낸 어머니의 캐릭터는 너무 재미있어서 중반 이후에 이 캐릭터의 비중이 축소되는 게 아쉬울 정도입니다. 그렇다고 이 캐릭터가 재미 때문에 극적 역할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니거든요.

전체적인 앙상블도 훌륭해요. 정말 이 동네의 든든한 배우들의 질에는 질투심이 듭니다.

5. 그리고...

제스가 윈터슨의 자화상이라면, 이 친구는 옥스포드를 졸업한 뒤 유부녀 꼬시는 내용의 소설을 전문으로 하는 화끈한 레즈비언 작가가 되었겠지요. 제스의 엄마랑 핀치 목사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아, 이런 걸 보면 왜 이렇게 웃음이 나오는지 모르겠어요. :-) (99/09/07)

DJUNA

기타등등

윈터슨-키드론의 콤비는 [Great Moments in Aviation]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이 텔레비전 영화는 [오렌지...]만큼의 호평은 못 받았어요.

윈터슨은 여전히 잘 나가고 있지만 키드론은 BBC 이후 그저 그렇군요. 그 사람이 헐리웃에서 만든 [투 웡 푸]나 [너의 파도 속으로]같은 영화들은 [오렌지...]에 한참 못 미치는 영화들입니다.

윈터슨의 대표작 중 하나인 [The Passion]이 기네스 팰트로 주연으로 영화화된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미라맥스에서 이미 윈터슨이 직접 쓴 각본의 판권을 샀대요. 흠... 소문이 사실이라면 팰트로가 남장 여인 역을 하는 걸 또 보게 생겼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