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 Persuasion (1995) * * * 1/2

감독
로저 미첼 Roger Michell

주연
아만다 루트....앤 엘리어트
Amanda Root....Anne Elliot
키아란 하인즈....웬트워스 대령
Ciarán Hinds....Captain Wentworth
수잔 플리트우드....레이디 러셀
Susan Fleetwood....Lady Russell
코린 레드그레이브....월터 엘리어트
Corin Redgrave....Sir Walter Elliot
피오나 쇼....크로프트 부인
Fiona Shaw....Mrs. Croft
존 우드바인....크로프트 제독
John Woodvine....Admiral Croft
피비 니콜즈....엘리자베스 엘리어트
Phoebe Nicholls....Elizabeth Elliot
사무엘 웨스트....엘리어트
Samuel West....Mr. Elliot
소피 톰슨....메리 머스그로브
Sophie Thompson....Mary Musgrove
주디 콘웰....머스그로브 부인
Judy Cornwell....Mrs. Musgrove
사이몬 러셀 빌....찰스 머스그로브
Simon Russell Beale....Charles Musgrove
펠리시티 딘....클레이 부인
Felicity Dean....Mrs. Clay
로즈 해몬드....머스그로브 씨
Roger Hammond....Mr. Musgrove
엠마 로버츠....루이자 머스그로브
Emma Roberts....Louisa Musgrove
빅토리아 해밀턴....헨리에타 머스그로브
Victoria Hamilton....Henrietta Musgrove

1.

7년전, 앤 엘리어트는 친지들의 설득에 못이겨 젊은 해군장교 웬트워스의 청혼을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이 막 끝난 지금, 사정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앤의 가문은 몰락해가고 있었고 웬트워스는 전쟁으로 출세를 거듭하고 있었으니까요. 둘은 아직도 서로를 사랑하지만 그 놈의 자존심이라는 것이 도대체 꺾이지를 않습니다...

2.

네, 또다른 제인 오스틴 영화입니다. 수많은 수다쟁이 캐릭터들과 복잡한 인간관계, 갑자기 벼락같이 다가오는 결혼, 경제적으로 미묘하게 얽힌 연애와 청혼... [설득]에도 오스틴 소설에 늘 들어가는 기본 재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뭔가 다릅니다!

3.

로저 미첼의 [설득]은 최근에 분 오스틴 붐을 탄 영화들 중 유일한 영국 영화(프랑스 자본도 들어갔지만)이고 가장 높은 비평적 성과를 거둔 영화이면서도 가장 조용히 묻힌 영화입니다. 그리고 [클루리스]를 뺀다면 가장 독특한 영화일 겁니다. 영화계의 오스틴 붐은 갑작스러운 유행치고는 상당히 높은 질적 성과를 거두었지만 만약 단 하나의 오스틴 영화를 뽑으라면 아무래도 이 [설득]을 뽑게 될 것 같군요.

하지만 왜? 로저 미첼은 이 영화가 극장용으로는 처음이고 이전이나 이후 경력도 별볼일 없습니다. 이 영화를 아무리 뒤져 보아도 스타라고 할 만한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아만다 루트나, 소피 톰슨, 사무엘 웨스트 같은 낯익은 얼굴들이 보이긴 하지만 그들을 스타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대충 작업 내용을 보아도 이 작품은 또 하나의 [마스터피스 시어터]처럼 보일뿐입니다(실제로 [마스터피스 시어터]입니다. BBC가 제작한 고전 각색 영화니까요.)

그러나 [설득]에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스타 시스템에 의존하지 않는 캐스팅은 단순히 적절하기만 한 게 아니라 그 자체로 스타일의 일부를 형성합니다.

우선 최근 오스틴 영화들 중 이렇게 잘생긴 사람들이 안 나오는 영화가 있나요? 아만드 루트는 아주 뛰어난 배우지만 헐리웃 제작자라면 절대로 이런 영화의 여주인공으로 쓰지는 않을 정도로 평범하게 생겼습니다. 중간에 들어온 관객들이라면 주연이라고 생각도 하지 못할 걸요!

주변의 조연들 중에서도 잘생긴 사람들은 찾기 힘들지요. 로저 미첼은 사람들의 주름살을 무자비하게 강조하고 화장을 흉하게 일그러뜨리는 등, 어떻게든 사람들을 못생기게 보이게 만들면서 즐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이 심술궂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미첼은 분명히 하나의 방향을 잡고 있습니다. 제인 오스틴의 마지막 소설인 [설득]은 [오만과 편견]이나 [엠마]처럼 재기발랄한 코미디가 아닙니다. 비교적 무거운 스토리이며 오스틴 소설 중에서는 예외적으로 당시의 역사적인 흐름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 유배되는 시기에 시작해서 그가 엘바 섬을 탈출할 때 끝납니다. 그리고 이런 역사적 배경은 단순히 달력 이상의 것입니다. 오스틴이 [설득]에서 묘사하고 있는 사회는 더이상 고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은 전쟁터에서 그랬던 것처럼 세상과는 전혀 인연이 없어보이는 오스틴 세계마저도 완전히 바꾸어 버렸으니까요. 웬트워스의 출세와 엘리어트 가문의 몰락은 단순히 개인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조용히 뒤에 숨은 채 진행되었던 변화는 이제 노골적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겉으로는 조용하지만 사실은 지독하게 격동적인 이 배경을 가장 잘 묘사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미첼은 (표현의 방법으로) 리얼리즘을 택했습니다.

그 결과는 참으로 신기합니다. 사실 [설득]이라는 소설 자체는 오스틴의 다른 소설과 크게 차별화되는 스타일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미첼이 보여주는 오스틴의 세계는 정말로 새롭습니다. 밤의 실내는 진짜 어둡고 청혼자의 하얀 장갑에는 때가 끼어 있으며 그릇들은 지저분하고 세상엔 오스틴 세계의 사람들 말고 다른 계급의 사람들까지 살고 있습니다!

거의 우상 파괴의 흥분까지 느껴지지 않습니까? 물론 이런 우상파괴적인 효과는 부수적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오스틴 세계 사람들이 당시 역사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4.

닉 디어의 각본은 맥그러드의 것처럼 우아하게 장난스럽지도 않고 엠마 톰슨의 것처럼 활달하거나 대중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는 거의 무식해 보일 정도로 정공법을 취합니다. 이 얄미운 작가는 스토리에 당의를 입히지도 않고, 친절하게 배경 설명을 하지도 않으며, 심지어 등장인물들의 기본적인 심리 묘사도 잘 하지 않으니, 원작을 읽지 않으신 분은 초반에 골치깨나 아플 겁니다!

하지만 초반의 관문을 통과하고나면 디어의 각본은 상당히 흥미진진합니다. 그의 불친절은 단순한 불친절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어 그의 무뚝뚝한 사건 진행은 인물 심리의 구두 묘사를 거의 허용하지 않는데, 이 때문에 영화는 이중적이 됩니다.

아만다 루트의 훌륭한 연기 때문에, 관객들은 속비치지 않는 예절바른 대사들과 의도적으로 비틀린 행동들에도 불구하고, 앤의 감정을 상당히 상세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웬트워스는 어떨까요? 그는 정말로 앤을 아직 생각하고 있을까요? 아니면 그의 모든 행동은 단순한 보복행위일까요?

그 결과 원작에는 없는 상당히 강한 서스펜스가 발생합니다. 스토리 전개의 이러한 이중성 때문에 관객들이 등장인물들의 심리전에 직접 동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의중을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 심리전의 핵심임은 말할 필요도 없지요.

그러나 단순히 서스펜스를 얻기 위해 디어가 이렇게 무뚝뚝해졌다는 것은 아닙니다. 디어의 각본은 등장인물들의 행동에 강한 당위성을 부여해 믿음직하게 만들고 그들의 감추어진 감정을 적절한 시기에 터뜨림으로써 영화의 호소력을 배가시키며 배우들이 자신의 비르투오시티를 발휘할 수 있게 충분한 공간을 제공해줍니다.

그리고... 이런 스타일은 당연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설득]은 [오만과 편견]이 아닙니다. 죽어가는 중년 여자가 피곤한 손을 놀려가며 쓴 소설이지요. [설득]은 감정을 능숙하게 절제할 줄 알고 또 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센스 앤 센서빌리티]와는 다른 식으로 전개하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5.

아만다 루트는 아주 훌륭합니다. 철저하게 믿을 만하며 절제된 행동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미묘한 연기는 일급입니다. 그런 걸 다 잊더라도 이 배우의 연기에 담뿍 녹아있는 진지한 감정은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소피 톰슨은 [엠마]에서도 재치있는 코믹 연기를 선보였지만 이 영화의 메리 역이 훨씬 고단수입니다. 키아란 하인즈의 무뚝뚝한 연기 역시 아주 잘 계산되어 있습니다. 코린 레드그레이브의 정신나간 아빠 역은 언제나처럼 재미있습니다. 사무엘 웨스트가 이번엔 콧수염을 안 달고 나오는데 여전히 패자지만 그래도 예전 영화들보다 훨씬 덜 불쌍해보입니다.

[설득]은 진지하고 성숙한 감정을 정공법으로 다루는 위험한 일을 아주 성공적으로 해낸 작품입니다. 사실 이런 영화는 겉보기보다 훨씬 무시무시한 법입니다!

이제 오스틴 물결을 탄 극장용 영화는 다 본 셈이군요. 남은 건 BBC의 미니 시리즈 [오만과 편견] 뿐입니다. 아는 콜린 퍼스 팬들을 어떻게 꼬시면 이것도 볼 수 있을 듯 한데요... :-) (97/09/16)

D&P


기타등등

[오만과 편견]도 결국 보고 말았습니다. 얼마 전에 A&C에서 방영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