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수지 템플턴 Suzie Templeton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피터와 오리

그냥 편안하게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에 맞춘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이나 보자...하고 수지 템플턴의 [피터와 늑대]를 튼 사람들은 당황하기 마련입니다. 일단 처음 6분 동안은 전혀 음악이 나오지 않아요! 게다가 분위기가 뭔가 이상합니다. 템플턴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건 우리가 익숙한 전통 동화의 세계가 아니라 헐어빠지고 험악한 현대 러시아의 시골마을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피터는 결코 귀여운 어린 소년이 아니에요. 척 봐도 따돌림 당하고 있는 게 뻔한 음습하고 우울한 소년이지요. 종종 이 녀석의 눈빛이 변하는 걸 보면 소름이 끼칩니다. 지금까지 쌓인 게 폭발해 연쇄살인이라도 저지를 것 같아요. 피터의 유일한 친구인 오리와 새도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오리는 영양실조에 걸린 게 분명하고 새는 (아마도 까치로 추정되는 커다란 조류인데) 날개를 다쳐서 풍선을 묶고 방방 뛰지 않으면 날지를 못합니다.

6분이 지나면 드디어 음악이 시작되고 본격적인 액션이 시작됩니다. 늑대가 오리를 잡아먹고 (네, 정말 잡아먹습니다. 뱃속에서 살아남거나 하는 일 따위는 없어요. 끝입니다. 명복을!) 피터는 늑대 사냥에 나섭니다. 보고 있노라면 약간 멀미가 납니다. 나레이션이 빠지고 편집되었지만,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은 여전히 발랄하고 즐거워요. 하지만 템플턴이 그리는 이야기는 어둡고 침침하며 암담합니다. 음악은 충실하게 스토리를 들려주지만 그 스토리와 분위기가 어긋나는 건 어쩔 수 없지요. 이런 어긋남이 얼마나 의도적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봐도 완벽하게 느껴지지는 않아요.

영화의 액션은 같은 원작을 다룬 디즈니 애니메이션과는 달리 정적입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셀 애니메이션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이용한 역동적인 모험담이라면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인 템플턴의 영화는 세르지오 레오네의 영화처럼 돌처럼 굳어있는 적수간의 시선 교환에 더 신경을 쓰는 것 같습니다. 매체의 한계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전체적인 성격과도 맞는 것 같아요.

영화의 결말은 프로코피예프의 원작에서 가장 벗어나 있습니다. 피터는 할아버지와 함께 사로잡은 늑대를 마을로 데려갑니다. 그리고 으스스한 표정을 지으면서 지금까지 그를 따돌렸고 괴롭혔던 사람들을 노려보지요. 그리고 할아버지가 늑대를 팔려고 하는 순간 늑대를 풀어줍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주인공은 친구를 죽인 원수였던 야수에 감정이입을 하게 된 것이죠. (08/11/11)

DJUNA

기타등등

태원에서도 제작에 참여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