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김기영

주연
김지미....숙영
이정길....훈
박정자....간수

숙영과 훈

[육체의 약속]은 지금은 필름이 사라지고 그에 대한 소문만 돌고있는 이만희의 고전 [만추]의 리메이크입니다. [만추]는 흥행실패작이었지만 이 영화는 꽤 괜찮은 흥행 성적을 거둔 작품이죠. 평도 좋았고 김지미와 박정자가 대종상 여우주연상과 조연상을 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원작이 갖춘(또는 갖추었을) 고전적 멜로드라마의 안정된 아름다움을 기대하지는 마시길. 이 영화엔 그런 건 없습니다. 사실 기본적인 스토리와 설정만 빌리고 있을 뿐, [육체의 약속]은 지독할 정도로 뻔뻔스러운 김기영식 극단을 추구합니다. 덕택에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엄청나게 어색해요. 절대로 로맨스가 아닌 영화가 이성복장착용자처럼 로맨스 영화를 흉내내고 있으니까요. 이 영화는 로맨스 영화가 아니에요. 로맨스가 있어야 할 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은 부글부글 끓는 육체적 욕구와 폭력뿐입니다.

기본 설정은 같습니다. 주인공 숙영은 간수와 함께 어머니 산소를 방문하기 위해 하루 휴가를 나온 죄수인데, 기차 안에서 만난 훈이라는 청년과 사랑에 빠진다는 거죠.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는 방식은 다릅니다. 원작과는 달리 고향까지 숙영을 따라가는 간수가 삶의 목적을 완전히 상실한 숙영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훈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든요. 잠시 주저하다 그 제안을 받아들인 훈은 거의 미치광이처럼 그 아이디어에 집착하며 숙영을 끌고 다니고요.

김기영은 언제나처럼 캐릭터들의 생물학적 숙명을 극단적으로 과장합니다. 반은 폭력적이고 정신없는 이미지의 공격으로, 반은 그 양반 특유의 거창하고 어색한 장광설을 통해서요. 영화는 로맨스보다는 그로테스크한 코미디에 가깝습니다. 특히 계속 남자들에게 속고 당하는 숙영의 과거를 회상으로 보여주는 도입부는요. 전 정말 70년대 당시 관객들이 이런 식의 영화들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궁금하답니다. 지금이야 우리들은 김기영을 컬트 영화 감독으로 받아들이며 그의 어처구니없음을 개성으로 읽지만요.

영화가 이 무시무시한 코미디를 쏘아대는 동안 로맨스의 설정은 당연히 방향을 잃습니다. 사실 숙영은 로맨스의 주인공이 될만큼 주체적인 사람이 아니에요. 숙영은 영화 내내 끌려다닙니다. 앞부분에서는 간수에게, 뒷부분에서는 희망을 준답시고 설교를 늘어놓으며 숙영을 거의 강간해대는 훈에게요. 이래놨으니 나중에 울부짖으며 훈과 마지막 작별을 나누는 숙영이 은근히 마약중독자처럼 보이는 것도 당연하죠. 정신이 똑바른 사람이라면 이 과정 중 삶의 희망과 인간에 대한 믿음을 찾는 대신 더 심한 남성혐오증과 자살중독에 빠졌을 걸요.

로맨스를 과감하게 버리고 영화를 보면 오히려 이야기가 잡힙니다. 이 영화가 가장 그럴싸하게 먹힐 때는 영화가 감금과 복종, 통제에 대한 은유로 흘러갈 때인 듯 해요. 1박 2일의 휴가가 배경인 영화지만, 숙영은 영화가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다양한 종류의 감금과 통제의 대상입니다. 마땅히 자유선언이어야 할 훈과의 관계도 간수에 의해 조작되고 통제된 것이잖아요. 결정적으로 숙영의 한심한 인생 자체가 이해불능의 생물학적 힘에 의해 조작되고 있지요.

간수와 숙영의 관계를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건 숙영을 통제하기 위해 간수가 들고다니는 사탕입니다. 훈은 나중에 숙영이 물고 있는 사탕을 빼앗아 던지며 자기가 숙영을 해방시키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그 역시 또다른 간수에 불과하죠. 먹히지도 않을 희망에 매달리며 매년 약속 장소를 찾는 숙영은 여전히 죄수처럼 보인답니다. 사탕이 희망으로 바뀌었을 뿐이죠.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죄수처럼 보이는 건 숙영뿐만이 아닙니다. 숙영을 연기하는 김지미 역시 영화의 죄수처럼 보여요. 처음부터 끝까지 쿨한 통제력을 유지하는 간수역의 박정자와는 달리 김지미는 좀비같은 모습으로 영화에 끌려다니기만 하거든요. 의도적인 연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그게 영화에 맞아보이긴 한답니다. (04/01/16)

DJUNA

기타등등

정보 절반과 원래 대사의 그 어색한 황당함을 몽땅 날려버린 영화 자막을 보면서 "저 영화를 엄청 진지하게 보는 외국 관객들도 있겠지"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