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거스 반 산트 Gus Van Sant

주연
빈스 본....노먼 베이츠
Vince Vaughn....Norman Bates
앤 헤이시....마리온 크레인
Anne Heche....Marion Crane
줄리안 무어....라일라 크레인
Julianne Moore....Lila Crane
비고 모르텐센....샘 루미스
Viggo Mortensen....Sam Loomis
윌리엄 H. 메이시....밀튼 아보가스트
William H. Macy....Milton Arbogast

0.

우선 이 '별점 없음'이라는 말을 설명해야겠군요. '별점 없음'은 레너드 말틴의 'BOMB'과는 전혀 다릅니다. 'BOMB'은 최악이란 뜻이지만 '별점 없음'은 말 그대로 별점을 주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거스 반 산트(왜 다들 '구스'라고 쓰는 지 모르겠습니다)의 [사이코]에 별점을 주는 것은 거의 무의미한 일입니다. 이 영화는 혼자서 서려고 하지 않는 작품이니까요. 이 영화의 가치는 오리지널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존재합니다. 만약 영화가 원작과 아주 닮았다고 해도 그건 영화의 질과는 무관합니다. 이런 작품을 그 자체의 가치로 평가하는 것은 의미가 없죠.

1.

대충 기초적인 것부터. 반 산트의 [사이코]는 히치콕의 [사이코]와 얼마나 비슷할까요?

상당히 비슷합니다. 대사는 살짝 업데이트 되었지만 여전히 많이 남아있고, 버나드 허먼의 근사한 음악 역시 거의 그대로 쓰이고 있습니다. 화면 구성과 카메라 움직임이 거의 같은 장면도 많습니다. 심지어 솔 바스의 타이틀 그래픽도 그대로 쓰이고 있고요.

그러나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차이점도 꽤 많이 발견됩니다. 거장의 영화를 그대로 만들겠다는 감독의 의도를 생각하면 지나치게 많은 거죠. 배우들의 이미지나 연기, 칼라, 노출과 폭력의 강화, 대사의 90년대식 업데이트는 당연하다고 봐 줄 수 있지만, 많은 장면들은 그 선을 넘어섭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장면들이 원작과 닮았느냐 닮지 않았느냐가 아닙니다. 그것들이 바뀌면서 영화가 어떻게 변했느냐가 중요한 거죠.

2.

반 산트의 [사이코]와 히치콕의 [사이코]의 가장 큰 차이는 말하는 어조입니다.

히치콕은 [사이코]에서 아주 건조한 화법을 쓰고 있습니다. 살인과 다중인격이 판을 치는 센세이셔널한 소재지만 히치콕은 의도적으로 그 센세이셔널리즘을 억누르고 있지요. 영화는 아주 교묘하게 무표정함을 위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어조는 50년대 '사실주의적 영화'들이 주로 사용하던 저널리스틱한 태도와 아주 닮아 있지요.

히치콕이 건조하고 작은 영화를 의식적으로 지향했다는 증거는 많습니다. 그가 음악 사용을 아주 주저했다는 것, 감정이 거세된 장면 전환, 그리고 무책임할 정도로 긴 정신분석 강의를 아무런 테크닉없이 끼워넣은 것 등등... 그는 이 영화가 [드라그넷]의 한 에피소드처럼 하찮고 일상적으로 보이길 바랬을 겁니다.

물론 히치콕은 사실주의적인 영화를 만들려고 한 게 아닙니다. 그런 방식을 삼가말하기의 '표현적' 도구로 삼아 정서적 충격을 극대화 시키려고 했을 뿐이죠. 이런 태평스럽고 절제된 (물론 거장의 테크닉이 도처에 눈에 뜨이지만) 어조 때문에 갑작스럽고 비현실적인 폭력이 그처럼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거스 반 산트는 이 모든 무표정을 지워버렸습니다. 반 산트의 [사이코]는 정신병자가 [사이코]를 보고 꾼 꿈 같습니다. 영화 속에 나오는 모든 것이 아주 예민하게 날이 서 있지요. 확장된 소음, 미친 녹색, 샌드위치에 붙은 파리 같은 걸 보세요. 아보가스트가 죽어가는 동안 삽입된 의미없는 영상들, 노먼 베이츠의 자위행위 등등은 건조하게 아주 잘 말라있던 원작에 신경질적인 인격을 부여했습니다.

그 때문에 반 산트의 영화는 뭔가 지나치게 많다는 느낌을 줍니다. 지나치게 많은 색들이 판을 치는 컬러 화면도 그 원흉입니다. 지나치게 디테일이 많은 현대적 연기도 문제고요. 하지만 설명적인 컷들이 지나치게 많이 삽입된 것이 진짜 문제점입니다.

나중에 비디오가 나왔을 때 컷의 수를 세어보세요. 이 영화가 원작보다 훨씬 자잘하고 공격적으로 편집되어 있다는 알게 될 겁니다. 노먼 베이츠가 라일라를 공격하는 장면도 원작에서는 단지 서너 컷으로 간결하게 처리하고 있지만, 반 산트의 영화에선 상당히 길고 복잡한 액션 신이 되었습니다. 원작에선 철저하게 무성의를 가장했던 정신분석강의도 반 산트의 영화에서는 클로즈 업, 음악 삽입, 카메라 이동과 같은 다양한 영화적 테크닉을 이용해서 훨씬 입체적이 되었습니다.

더 나아진 게 아니냐고요? 천만에요. 그 결과 원작 속에서는 공포스럽게 비어있던 그 정서적 공간이 사라졌습니다. 그 공간의 부재 때문에 원작에서는 그렇게 자극적이었던 폭력과 광기가 훨씬 차별화가 덜 되고 말았고요. '쇼커'가 쇼크를 잃어버린 겁니다.

3.

빈스 본은 좋은 배우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미스 캐스팅입니다. 워낙 안소니 퍼킨즈의 이미지가 강했으니 그를 넘어서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을 거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퍼킨즈를 잊고 생각해보아도 본은 뭔가 잘 맞지 않습니다.

일단 그는 지나치게 강건하고 안정된 느낌을 줍니다. 퍼킨스의 베이츠는 소년같은 수줍음과 예민함으로 교묘하게 자신의 광기를 숨기고 있었지요. 하지만 본의 강건함은 그의 광기를 아주 위협적으로 만듭니다. 앤 헤이시를 엿보며 해대는 자위행위나 그림자 속에 숨은 그의 섬뜩한 표정까지 덧붙이면 뭐 볼장 다 본 것입니다.

앤 헤이시는 옥석이 섞여 있습니다. 헤이시는 공금횡령자의 두려움, 불안, 초조 등을 연기할 때 아주 잘합니다. 여기까지는 좋은 부분입니다. 그러나 헤이시의 장난꾸러기 소년같은 외모는 원작에서 관객들이 자넷 리한테 느꼈던 것만큼의 믿음과 동정심을 끌어내는 데 방해가 됩니다. 원작에서 관객들이 자넷 리에 철저하게 동화되었다면, 반 산트의 영화 관객들은 조금 뒤에 떨어져 앤 헤이시를 그냥 바라보기만 합니다.

비고 모르텐센은 존 개빈보다 좋은 배우지만, 바로 그게 문제입니다. 평범하고 투명해야 할 샘 루이스 역을 하기엔 너무 튀죠. 게다가 그의 남부 사투리는 무의미한 터치치곤 지나치게 강합니다.

줄리안 무어는... 글쎄요. 베라 마일즈보다 적극적인 탐정 역에는 더 어울립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마지막의 충격 효과가 더 약해졌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가 베이츠를 후려치는 장면은 '정치적으로 공정'할지는 몰라도 (사실 보면서 조금 신났습니다) 결정적으로 클라이맥스여야 할 마지막을 안티 클라이맥스로 바꾸어 놓고 말았습니다. 무시무시한 살인마여야 하는 캐릭터를, 마치 유치원 교사가 악동 다루듯 대하고 있었으니까요.

윌리엄 H. 메이시는 언제나처럼 잘하지만 아보가스트 역은 연기를 따지기엔 너무 작습니다.

4.

앞에서 별점을 안주겠다고 버텼지만, 그래도 반 산트의 영화가 성공작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원작을 잊고 봐도 문제가 많아요. 심지어 감각까지 뒤지는 것 같으니까요. 특히 샤워실 장면은 대실망입니다. 스톱워치를 들고 원작을 그대로 베끼기만 했어도 훨씬 나은 결과를 얻었을 거예요.

하지만 거스 반 산트의 이 실험이 아주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반 산트가 히치콕의 원작의 에센스를 끄집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반 산트의 [사이코]는 비교 분석 교육 과제로 아주 유용한 교과서입니다. 물론 늘 히치콕 영화 뒤를 따라야 하겠지만요.

자잘한 비교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교훈은 대충 이런 것들입니다. "걸작의 디테일은 전체만큼 중요하다. 완벽한 이해없이 해대는 모방은 성공할 수 없다."

적어도 저희는 반 산트가 고맙습니다. 이제 왜 히치콕이 천재인지 분명히 알 것 같으니까요. (99/02/02)

D&P

기타등등

이 영화에서는 로이 브록스미스 Roy Brocksmith라는 배우가 히치콕이 연기했던 카메오를 대신 연기합니다. 아무래도 그 앞에서 훈수를 듣고 있던 남자가 거스 반 산트의 카메오였던 것 같군요. 얼굴이 너무 빨리 지나가서 확인은 못하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