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루벤 마물리안 Rouben Mamoulian

주연
그레타 가르보....크리스티나
Greta Garbo....Christina
존 길버트....돈 안토니오 델 라 프라다
John Gilbert....Don Antonio de la Prada
이언 키스....마그누스
Ian Keith....Magnus
루이스 스톤....옥센스티에르나
Lewis Stone....Oxenstierna
엘리자베스 영....에바 스파레 백작부인
Elizabeth Young....Countess Ebba Sparre
C. 오브리 스미스....아게
C. Aubrey Smith....Aage
레지날드 오웬....찰스
Reginald Owen....Charles

1.

크리스티나 여왕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이 기억할만한 인물이었다는 건 부인할 수 없지요. 스웨덴에 문화적 황금시대를 가져온 국제적 교양인이었고, 30년 전쟁을 종식시킨 평화주의자였으며, 종교의 자유를 외쳤던 인도주의자였고, 유럽 사교계의 중요 인사였는데다가, 데카르트, 베르니니, 코렐리와 같은 당대 중요한 예술가와 학자들의 후견인이기도 했던 사람이니까요. (데카르트는 여왕의 가정 교사 노릇을 하던 도중 스웨덴에서 폐병에 걸려 죽어버렸지만요.)

이 사람은 아주 로맨틱한 이미지로 기억되는 사람이기도 해요. 자진해서 왕위를 버린 사실 때문에도 그렇고, 많긴 하지만 분명한 건 하나도 없는 흐릿한 스캔들 때문에도 그렇고요. 물론 오늘 이야기할 그레타 가르보의 영화 [크리스티나 여왕]은 그런 이미지를 결정적으로 굳혀버린 주범이지요. 그러고보면 우리가 품고 있는 크리스티나 여왕의 이미지 상당부분은 가짜인 셈입니다. 실제 크리스티나 여왕은 영화 속의 가르보와 같은 화려한 남장 미인과는 거리가 멀었으니 말이에요.

2.

여왕과 돈 안토니오

루벤 마물리안이 감독한 이 초기 토키 영화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뭘까요? 우리의 크리스티나 여왕은 6살에 왕좌에 올라 30년 전쟁이 한창인 스웨덴을 멀끔하게 통치했는데, 스페인 대사인 돈 안토니오와 사랑에 빠져 왕위를 포기한답니다. 하지만 돈 안토니오는 역시 여왕을 눈독 들이고 있던 재무대신인 마그누스와 결투하다 죽고 여왕은 죽은 연인의 시체와 함께 스웨덴을 떠나는군요.

정말이냐고요? 아뇨. 이게 참말이라면 [셰익스피어 인 러브]도 전기 영화게요? 이 영화에 나오는 이야기 절반 이상은 말 그대로 로맨스 영화를 만들기 위한 픽션에 불과합니다.

영화는 스페인 대사와의 로맨스를 왕위 포기의 이유로 내세우는데, 그건 심하게 과장되었습니다. 돈 안토니오 델 라 프라다가 여왕의 친구였던 건 사실이지만 애인이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요. 실제 크리스티나 여왕은 자신의 카톨릭 개종에 스페인의 조력을 구하려고 그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크리스티나 여왕이 왕위를 포기한 진짜 이유도 순전히 왕노릇하기가 싫어서였을 거예요. 한참 젊고 지적 호기심으로 가득한 사람이 좋아하는 학문 연구나 예술을 포기하고 따분한 서류철이나 뒤적이고 있어야 했으니 싫기도 했겠죠. 왕위 포기 몇 달 전인가엔 신경 쇠약에 시달리기도 했다니까요. 이 사람은 계속 카톨릭으로 개종하고 싶어했으니까 종교 문제도 있었겠죠. 물론 정략 결혼 강요도 짜증났을 거고요. 이 사람은 레즈비언이었거나 바이였을 거고 영화에도 나오는 에바 스파레 백작부인과 여왕의 관계는 누구나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거든요.

3.

라스트 신

실제 크리스티나 여왕이 누구건, 영화는 크리스티나 여왕을 가르보 스타일의 여자 주인공으로 묘사합니다. 드라마틱한 로맨스에 빠진 비련의 주인공이지요. 좀더 험악하게 말한다면, 크리스티나 여왕은 가르보표 기성품 로맨스 영화를 만들기 위한 재료에 불과합니다.

영화는 그랜드 로맨스지만 정작 크리스티나의 연인으로 나오는 돈 안토니오는 그렇게까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아니, 별로 나오지도 않아요. 나와도 늘 그레타 가르보의 그늘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도 않고요. 영화에서 사랑은 사랑에 빠진 그레타 가르보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 이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일종의 부스터죠. 영화는 이 사람의 다른 영화들이 그런 것처럼 가르보 쇼입니다. 관객들이 이 사람의 사랑과 헌신과 희생과 좌절을 보며 황홀해한다면 영화의 역할은 끝난 거예요.

숨겨진 영화의 음모는 마지막 장면에서 노골적으로 폭로됩니다. 이 유명한 장면에서 크리스티나 여왕은 돈 안토니오의 시체를 뒤로하고 뱃머리로 걸어나옵니다. 클로즈업된 여왕의 얼굴은 지극히 아름답지만 그 얼굴엔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습니다. 이 모호함은 관객들을 매료시키지만 카메라 뒤에 숨어 있는 의미는 보다 노골적입니다. 지금까지 관객들이 끌려다녔던 모든 로맨틱한 감정들은 사무적이고 냉정한 스웨덴 여자 배우가 카메라 앞에서 슬리퍼를 질질 끌고 돌아다니며 만들어낸 허상이었던 거죠.

4.

여왕과 에바 스파레

단순하고 명백한 텍스트 밑에는 보다 복잡한 서브 텍스트가 숨어 있습니다. 크리스티나 여왕의 레즈비언 이미지가 워낙 노골적이다보니 어떻게든 이 인물을 이성애자로 만들려는 할리우드의 노력이 중간중간에 망가지고 마는 것이지요. 이 영화는 개봉된 뒤부터 전설적인 퀴어 클래식의 명단에 올랐습니다.

가장 먼저 들어오는 건 역시 남장한 가르보의 이미지였습니다. 가르보는 크리스티나 여왕을 할리우드 고전물의 한도 안에서 가장 부치답게 연기해냈는데, 이런 털털한 연기와 가르보의 조각같은 외모의 결합은 아름다우면서도 박진감 넘쳤습니다. 가르보와 에바 스파레 역의 엘리자베스 영이 나누는 키스는 당시 할리우드에서 기대할 수 있었던 가장 노골적인 레즈비언 키스였고요.

크리스티나 여왕과 돈 안토니오의 로맨스도 동성애 서브텍스트를 깔며 진행되었습니다. 남장한 여왕과 돈 안토니오의 관계는 외부에서 보면 그냥 동성애 관계처럼 보입니다. (여인숙 주인이 침대에 박혀 있는 크리스티나와 돈 안토니오를 게이 커플로 오인하는 장면은 아주 노골적이지요.) 돈 안토니오는 여왕이 여자라는 사실을 모를 때부터 호감을 가지고 시작해서, 이런 식의 가면극에 익숙해져 있던 게이 관객들은 다들 그가 이성애자인 척 행동하는 게이려니 생각했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서브 텍스트가 노골적이라고 해도 퀴어 영화로서 이 영화는 결국 '동성애의 치유'를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꼼짝없는 부치인 여자와 암만봐도 게이인 것 같은 남자가 이성애적인 사랑을 나누면서 서로의 여성성과 남성성을 회복한다는 이야기니까 말이에요. 둘이 맺어지지 않는 걸 보고 안심이 될 지경입니다.

5.

그레타 가르보

이 영화는 제가 두번째로 좋아하는 가르보 영화인데요(첫번째 영화는 [니노치카]입니다), 어떻게 보면 가르보 연기의 종합판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좋은 점에서건 나쁜 점에서건요.

많은 가르보 걸작들과 마찬가지로 [크리스티나 여왕]도 이미지 게임이었습니다. 물론 그 이미지들은 가르보에 의해 완벽하게 통제되었죠. 가르보는 이 영화의 감독, 촬영 기사, 공연 배우, 심지어 엑스트라들까지 직접 선정했습니다. 영화를 보고나면 다른 사람들이 왜 필요했는지 궁금해지지만 말입니다.

가르보는 [크리스티나 여왕]에서 일종의 전환기적 연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성 영화 연기에서 유성 영화 연기로 넘어가는 중간 과정이죠. 하지만 제 생각에 가르보는 늘 무성 영화 배우였습니다. 채플린처럼 대사 연기를 잘했던 무성 영화 전문가였던 거죠. 전환기적이라고 해서 특별히 연기의 방식이 다른 건 아닙니다. 단지 무성 영화적인 테크닉이 후기작들에 비해 조금 더 눈에 잘 들어올 뿐이에요. 다소 다급한 스타카토로 올려붙이는 과장된 제스처 같은 것들 말입니다.

[크리스티나 여왕]이 좋은 건, 가르보의 로맨틱하고 드라마틱한 연기가 현실적이고 위트넘치는 연기와 적절하게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에겐 이런 비율이 언제나 중요했어요. 가르보의 인기 요인이었던 비련의 여자 주인공 이미지를 꺼내면서도 그 거창한 연기에 대한 현실적인 해독제도 함께 제공해주는 것이죠.

상대역인 존 길버트는 이미지가 비교적 약한 편입니다. 하지만 그게 그 사람이 할 일이었을 거예요. 원래 계획대로 로렌스 올리비에가 상대역을 맡았다면 영화가 삐걱거렸을 겁니다. 이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이 하는 일이라곤 여자주인공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피해다니면서 로맨스의 기초 조건을 제공해주는 것이니까요. 다들 길버트를 이류 배우라고 하지만, 가르보 영화에서 그의 이류성은 거의 필수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소문만큼 나쁘지 않습니다. 발성 연기도 무리가 없는 편이고요. 또 소문에 따르면 길버트가 유성 영화 연기가 형편없다는 전설은 그가 맘에 안 든 루스 메이어가 흘린 헛소문이라더군요. 진위여부는 알아서 판단하시길.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배경입니다. 감독인 루벤 마물리안도 예외는 아니죠. 영화와 스타가 상호 작용을 하면서 서로를 보완해주는 [진홍의 여제]와는 달리, [크리스티나 여왕]의 모든 요소들은 가르보의 배경입니다. 눈에 들어오는 마물리안의 공로도 라스트 신의 고안에 불과한 것 같고요. 하지만 가르보 영화에서 뭔가 다른 걸 기대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게 아닐까요? (03/02/19)

DJUNA

기타등등

당시 가르보의 여자 친구였던 메르세데스 다코스타의 자서전에 따르면 가르보와 다코스타는 이 영화 계획을 같이 시작했다고해요. 하지만 다코스타가 크리스티나 여왕의 동성애 성향을 각본에 너무 노골적으로 언급하는 바람에 나중에 가르보가 해고했다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