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리처드 론크레인 Richard Loncraine

주연
이언 맥켈런....리처드 3세
Ian McKellen....Richard III
아네트 베닝....엘리자베스 왕비
Annette Bening....Queen Elizabeth
크리스틴 스코트 토머스....레이디 앤
Kristin Scott Thomas....Lady Anne
짐 브로드벤트....버킹햄
Jim Broadbent....Buckingham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리버스
Robert Downey Jr.....Rivers
매기 스미스....요크 공작부인
Maggie Smith....Duchess of York
나이젤 호손....클라렌스
Nigel Hawthorne....Clarence
짐 카터....헤이스팅스
Jim Carter....Hastings
도니믹 웨스트....리치몬드
Dominic West....Richmond
존 우드....에드워드 왕
John Wood....King Edward
빌 패터슨....래트클리프
Bill Paterson....Ratcliffe
에이드리언 던바....티렐
Adrian Dunbar....Tyrell
도널드 섬터....브라켄버리
Donald Sumpter....Brackenbury
팀 매키너니....케이츠비
Tim McInnerny....Catesby
케이트 스티븐슨-페인....엘리자베스 공주
Kate Steavenson-Payne....Princess Elizabeth

듀나 로렌스 올리비에의 [리처드 3세]에 대해 내가 기억해 낼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올리비에의 벙거지 가발이 [헨리 5세] 때보다 덜 우스꽝스러웠고 그 위에 양철 깡통을 오려 만든 것 같은 왕관이 얹혀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파프리카 나는 조금 더 기억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영화가 꽤 잘 된 영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나도 올리비에를 그렇게 대단한 감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만들어낸 [리처드 3세]는 흥미진진하고 그럴 듯 했습니다.

듀나 그랬던가요? 모르겠군요. 하여간 어차피 오늘 본 영화와 비교는 불가능합니다. 도대체 생각나지가 않으니까요.

파프리카 갑자기 셰익스피어 열풍이 부는 듯합니다. 론크레인의 [리처드 3세]는 시작일 뿐입니다. 이미 트레버 넌이 [십이야(내가 가장 좋아하는 희극입니다)]를 버즈 루어만이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이번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오래동안 고대했던 케네스 브래너의 무삭제판 [햄릿]이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이 네 영화의 공통점이 뭔지 아세요?

듀나 고증을 그대로 지킨 영화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죠.

파프리카 맞습니다. 루어만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는 현대 미국이고 [햄릿]과 [십이야]는 19세기 말엽을 무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리처드 3세]의 경우는 1930년대가 무대입니다. 왜 갑자기...

듀나 거기에 특별한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원래 셰익스피어 극에 고증을 첨가하는 행위 자체가 최근의 시도니까요. 셰익스피어 시대에는 당시 복장으로 그냥 공연했고 그 이후 시대엔 셰익스피어 시대의 복장으로 공연하는 게 전통이었지요. 18세기 말에야 고증에 따른 복장이 시도되기 시작했지만 그것도 아주 보편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극단들이 다양한 복장과 세트로 셰익스피어를 공연합니다. 연극에서는 이것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영화에서는 화제거리가 됩니다. 그걸 보면 영화라는 장르가 사실주의적인 표현 속에 지나치게 갇혀있는 것 같지 않아요? 아마 모든 것들을 너무나 쉽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리처드 3세]는 30년대를 무대로 하고 있는데 거기에 꼭 역사적, 정치적인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뭣하려요? 거기엔 아르 데코 풍의 복장과 세트가 있고 탱크와 복엽기가 있으며 요크가의 하얀 장미를 하겐크로이츠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히틀러의 유령도 있습니다. 게다가 갱 영화의 시대이기도 했고요. 론크레인과 맥켈런이 30년대를 셰익스피어를 빌어 새로 해석할 생각이었건 아니었건, 그 분위기는 이 살벌한 영화에 꽤 잘 어울립니다.

나는 그 정도면 족합니다. 지금은 더 이상 깊이 생각할 기분도 아니고요. 어차피 [리처드 3세]가 그렇게 깊이 있는 작품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 작품은 원래부터 만화이고 편협한 정치 팜플렛이고 요란한 폭력물입니다. 리처드는 맥베드가 아니고 다른 등장인물들도 카드 보드로 만든 인형 같습니다. 이 작품을 좋아하는 관객들은 갱 영화 애호가와 같은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요란하고 그로테스크한 악당이 온갖 짓을 다하다가 몰락하는 걸 구경하길 좋아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리고 영화는 바로 그것을 보여주었습니다.

파프리카 론크레인은 30년대로 무대로 옮기면서 여러 재미있는 시도들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영화에서 대사들은 그렇게 많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 유명한 '불만의 겨울은 가고...'나 '나에게 말을 주면 왕국을 주겠다.' 따위의 대사들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맥켈런과 론크레인의 각본은 이것들을 적당히 잘라내고 또 위치를 바꾸어서 자기들 영화에 재치있게 끼워넣었습니다. 예를 들어 '불만의 겨울'의 도입부는 요크 가의 연설로 시작해서 남자 화장실의 리처드가 그 연설을 비아냥거리는 장면으로 그리고 곧 방백으로 이어집니다. 요크 공작부인은 마가렛의 대사까지 한꺼번에 하고 레이디 앤의 대사들은 중간중간이 끊어져 삽입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말을 달라!'에도 나름대로의 당위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사실 나는 이 장면이 가장 궁금했습니다.) 아주 성공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아무리 30년대라고 해도 리처드가 '나에게 탱크를 달라!'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밖에도 몇몇 부분들은 흥미롭습니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 티렐의 비중은 아주 큽니다. 그는 단순한 자객이 아니라 리처드의 가장 믿을만한 심복입니다. 레이디 앤도 원작보다는 훨씬 입체적인 캐릭터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게 대부분 셰익스피어의 원래 대사들을 삭제함으로써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듀나 그러나 레이디 앤이 리처드의 청혼을 받아들이는 장면에서 극장 안의 관객들은 웃음을 터뜨렸지요. 그 캐릭터의 갑작스러운 심경변화가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건 앤을 연기한 크리스틴 스코트 토머스의 탓도 아니고 리처드를 연기한 맥켈런의 탓도 아닙니다. 둘 다 아주 잘했어요. 특히 맥켈런은 뛰어납니다. 하긴 이 장면은 리처드 역 배우의 시금석이라고 할 만한 부분이니 열성을 기울이는 것이 당연하죠.

하지만 론크레인은 그 장면을 아주 잘 꾸려내지 못했습니다. 앤과 리처드의 파워 게임의 변화를 카메라로 추적하는 대신 그냥 배우들의 연기만을 비추었기 때문이지요.

이 영화의 곳곳에 그런 장면들이 보입니다. 이 영화의 시각적 요소들은 재미있고 아름답지만 정작 각 시퀀스들은 유기적인 흐름을 형성하지 못합니다. 원래 연극을 그대로 옮기는 영화에서 흔히 발견되는 문제점이지만 케네스 브래너나 심지어 프랑코 제피렐리도 이 문제점을 훨씬 매끄럽게 극복해냈기 때문에 비판은 좀 거세질 필요성이 있습니다.

파프리카 하여간 이언 맥켈런이 그려낸 리처드의 캐리커쳐는 재미있고 박진감이 넘치며 흥미진진합니다. 리처드가 잘 되었다? 그럼 이 작품의 완성도는 어느 정도 보장받은 편입니다. 사실 [리처드 3세]는 어떤 식으로 각색되건 리처드의 원맨쇼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듀나 그러나 다른 배우들도 만만치는 않습니다. 크리스틴 스코트 토머스, 나이젤 호손, 매기 스미스, 짐 브로드벤트와 같은 쟁쟁한 배우들이 뒤에서 진을 치고 있습니다. 이들의 비중은 모두 그렇게 큰 편은 아니지만 각각 자신만의 아리아를 부를 수 있는 공간을 배정받고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아네트 베닝과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좀 기가 죽은 듯 합니다.

파프리카 솔직히 말해 그들의 캐스팅은 국제적인 배급 시장에서 보다 영화를 쉽게 팔 수 있기 위해 일부러 조작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당위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어차피 엘리자베스 왕비와 리버스 백작은 랭커스터 쪽 사람이었으니 요크 가 안에서도 이질적인 존재로 남아 있었을 겁니다. 그러니 그들을 양키들로 만든 게 아주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드빌 가 사람들이 미국에서 온 돈많은 사촌들이었나 보죠.

그리고 베닝의 연기가 아주 나쁘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베닝의 대사들은 영국 배우들처럼 능란하게 잘 굴러가지는 않습니다만 그 배우의 미국식 영어는 그녀의 고립감을 꽤 잘 표현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다우니 주니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어차피 큰 역도 아니니까요.

듀나 [리처드 3세]는 군데군데 거칠고 서툰 구석이 보이긴 해도 빠르고 재미있습니다. 이 영화는 원작이 그랬던 것처럼 요란하고 거창한 액션 영화입니다.

파프리카 맞아요. 특히 리치몬드와 리처드가 싸우는 장면은 전형적인 액션 영화의 결말을 따르고 있습니다. 리치몬드는 기관총을 쏴대며 돌진하다 정의의 형사처럼 권총 한 자루를 뽑아 들고 리처드를 쫓아가죠. 리처드가 떨어질 때 얼빠진 표정으로 관객들을 쳐다보는 리치몬드의 표정을 보고 난 배꼽이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리처드 3세]가 튜더 가의 집권 옹호용으로 쓰여졌다는 걸 생각하면 요런 장면은 꽤 아이러니컬하죠.

듀나 번역이 짜증나지 않았나요? 난 그랬는데요. 이 영화의 여러 부분이 꽤 우스꽝스럽기는 하지만 관객들은 대부분 엉뚱한 부분에서 웃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단순무식한 번역 때문이었습니다.

파프리카 내 생각에는 번역을 조금 산문투로 하는 편이 나았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셰익스피어의 운문을 그대로 살리지 못할 바에야 매끄럽게 흘러가는 게 낫지요.

듀나 마지막으로 국도 극장의 나태한 사악함을 지적하고 넘어가야 겠습니다. 우리가 본 첫회 때 이 엉터리 극장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단 한번도 초점을 제대로 맞추지 않았습니다! (96/11/09)

D&P

기타등등

1.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나오는 리처드 상을 그대로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 작품은 튜더 왕조 때 쓰여졌으니까요. 리처드 3세가 정말로 조카를 죽였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요새는 리처드 3세의 무죄를 믿는 역사학자들도 아주 많답니다.

2. 이 영화는 이언 맥켈런과 리처드 에어가 연출한 [리처드 3세]를 각색한 것입니다. 이 연극을 본 사람들은 연극 쪽이 영화보다 훨씬 낫다고 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