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김청기

로보트 태권 V

한동안 전 [로보트 태권 V]를 극장에서 봤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어요. 제가 당시 동네 극장에서 본 건 [로보트 태권 V] 3편인 [수중 특공대]였어요. 1편은 아마 80년대 초에 텔레비전으로 봤을 거예요. 컬러로 봤던 게 기억나거든요.

1편이건 3편이건, 제가 당시 무얼 봤는지는 거의 기억나지 않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건 극장과 영화 관람의 분위기예요. 꽤 즐거운 기억이지만 반복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당시 그 영화를 봤던 극장이 가끔 그립지만 정말로 그 극장에서 다시 영화를 보고 싶지는 않은 것처럼요.

하여간 [로보트 태권 V]가 복원되었습니다. 2003년에 영진위 창고에서 듀프 네가가 발견되어 지금까지 디지털 복원작업을 했죠. 사운드는 상태가 좋지 않아 돌비 5.1 디지털로 새로 리메이크 작업을 했고요. 그렇다고 걱정 마시길. 상태가 좋지는 않지만 오리지널 모노 사운드도 남아 있고 나름대로 노이즈 빼는 작업도 끝냈다는군요. DVD가 나온다면 두 트랙 모두 수록될 게 분명합니다.

다시 보니 영화는 어땠냐고요? 뭐, 걸작은 아닙니다. 사실 상당히 투박하게 만들어진 영화죠. 스토리는 논리가 부족하고 사방으로 방황합니다. 캐릭터는 뻔하고 도식적이고요. 아무리 팬들이 독립성을 주장하고 싶어해도 일본 로봇 만화들의 아류임을 부인할 수 없고요. 곳곳에 숨어 있는 국수주의, 징고이즘 그밖의 구닥다리 편견들도 쉽게 무시될 수 있는 종류가 아닙니다. 결정적으로 애니메이션의 쾌락이 그렇게까지 대단한 편은 아니에요. [로보트 태권 V]의 성과는 작품 자체의 질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도 당시에 이런 걸 했다'인 것 같아요. 물론 그 척박한 환경에 이런 걸 만들어 흥행에 성공했고 한 세대의 기억에 영구적으로 남아 우리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면 그 정도만 해도 대단한 업적이긴 하지만요.

이전 극장 관람에 대한 기억이 없는 현대 관객들은 이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단 하나의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는군요. C.A.M.P. 캠프요. [로보트 태권 V]는 지금 절대로 순수하게 작품 자체만을 즐길 수 있는 영화가 아닙니다. 영화가 사방으로 흘리고 다니는 촌스러움과 우스꽝스러움을 즐겨야 해요. 그것들을 작정하고 받아들인다면 요새 관객들에게도 [로보트 태권 V]는 상당히 즐거운 작품입니다. 에드 우드의 영화들처럼요.

유감스럽게도 새로 녹음된 리메이크 사운드 트랙은 그런 즐거움을 조금 깨먹습니다. 그들이 일을 잘 못했다는 건 아니에요. 70년대처럼 원초적으로 촌스럽지는 않지만 그래도 적당히 구식인 성우들의 연기는 좋습니다. 이질감 없이 쉽게 몰두할 만 하고요. 그러나 여전히 남아 있는 우스꽝스러운 대사들과 설정에도 불구하고 새 녹음은 관객들이 영화의 캠피함을 제대로 즐기기엔 지나치게 멀끔합니다.

그래도 원래의 녹음이 보존판으로 남아 있으니 선택의 여지는 존재합니다. 전혀 다른 두 개의 녹음이 존재한다면 팬들이 자기만의 트랙을 덧 입혀도 상관없을 거고요. 오리지널 [로보트 태권 V]가 지난 세대의 향수 없이도 살아남으려면 그냥 원작 그대로 남아서는 곤란하겠죠. 새 관객들은 이 낡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할 겁니다. 물론 그들이 그냥 이 영화를 자료실에 박아두고 잊어버린다고 해서 우리가 뭐랄 수 있는 것도 아니죠. (05/09/20)

DJUNA

기타등등

위에 걸린 IMDb의 링크는 아무래도 정보 오류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