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바즈 루어만 Baz Luhrmann

주연
클레어 데인즈....줄리엣 캐퓰릿
Claire Danes....Juliet Capulet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로미오 몬터규
Leonardo DiCaprio....Romeo Montague
해롤드 패리노....머큐시오
Harold Perrineau....Mercutio
피트 포슬스웨이트....로렌스 신부
Pete Postlethwaite....Father Laurence
폴 소비노....풀젠치오 캐퓰릿
Paul Sorvino....Fulgencio Capulet
브라이언 데니....테드 몬터규
Brian Dennehy....Ted Montague

1.

[로미오와 줄리엣]은 아직도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중 가장 사랑받는 희곡입니다. 하지만 왜일까요? [로미오와 줄리엣]은 결코 셰익스피어의 최대 걸작도 아니고 가장 매력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도 없으며 또 당시에 살았던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 비교해서도 특별히 뛰어나지도 않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시시한 작품이라고 할 수도 없겠지요. 아직 설익었지만 천재임이 분명한 젊은 작가의 재기 발랄함이 이곳저곳에서 통통 튀고 있으니까요. 깊이는 없지만 감정은 격렬하고 대사는 종종 지나치지만 아름답습니다. 아마도 이 걷잡을 수 없는 젊은이의 혈기가 원숙한 걸작들의 완벽함보다 오히려 관객들에게 더 가깝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의 아우라 덕도 상당히 보고 있겠지만요.

2.

일단 아우라를 싹 거두고 나면 뭐가 남을까요? 우선 이 시끄러운 희곡이 정서적으로 미숙한 젊은 사람들을 다룬 젊은 사람의 작품이라는 것을 생각해야겠지요? 그리고 무척이나 센세이셔널하고 자극적인 작품입니다. 셰익스피어라는 남자가 원래 대중작가이긴 하지만 이 작품엔 정말 앞뒤 가리지 않는 요란함이 바글바글합니다. 경주용차가 씽씽 질주하는 것 같은 스피드에다, 시체가 산으로 쌓이는 살인과 자살에, 타란티노를 옛날옛적에 능가해버린 요란한 장광설에,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하여간 무척 시끄럽습니다.

흠, 그렇다면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희곡을 영화로 만드는 방법으로 삐까뻔쩍한 시각적 스타일과 요란한 연기를 택한다고 해서 나무랄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거죠. 그게 MTV 스타일이건 뭐건. 어차피 젊은 애들 이야기잖아요?

3.

바즈 루어만의 MTV식 스타일은 절반은 성공하고 절반은 실패했습니다. 초반부에서는 성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카메라가 정신없이 돌아가고 필름이 이리저리 팡팡 튀는 동안 우리가 느끼게 되는 혼란은 16살, 14살 짜리들이 그들 앞에 버티고 선 골치 아픈 운명과 접했을 때 느낄 수 있는 바로 그 혼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후반으로 넘어가면 갈수록 이 스타일이 오히려 짐이 됩니다. 고조되어 가는 감정을 북돋아야 할 스타일이 오히려 감정을 차단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관객들이 두 연인의 죽음으로 어떤 카타르시스를 느껴야 할 순간에도 마땅히 올라가야할 그 정점에 오르지 못하고 말죠. 관객 모두가 절정에서 공유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멀미가 아니었을까요?

4.

시대 배경에 대해서 한 마디. 이 영화는 20세기 현대를 무대로 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점을 확실하게 알아두셨으면 해요. 물론 저희들 귀에도 사방에서 빵빵 쏘아대는 총소리가 들리고 하늘에서 윙윙거리며 돌아다니는 헬기가 눈에 보입니다. 그러나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건가요? 지금도 수많은 극단에서 엘리자베스 왕조 풍의 옷을 입고 [줄리어스 시저]를 공연합니다. 설마 그 연극들이 모두 르네상스 시대의 영국으로 시대 배경을 바꾼 건 아니겠지요.

솔직히 따져 봅시다. 이게 현대라면 왜 나오는 사람들이 그렇게 고색창연한 옛 영어를 지껄여대고, 간단히 전화 한 통을 쳐도 될 일을 엉터리 우편 서비스로 보내 허탕을 치고, 엄마 아빠한테 반항하고 싶으면 그냥 가방에 옷 몇 벌과 곰인형을 넣고 가출해 버리면 될 일 가지고 가짜 장례식까지 치르는 쇼를 합니까?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나 [차이나 걸]은 현대를 무대로 한 [로미오와 줄리엣]입니다. 하지만 루어만의 영화는 아니에요. 그는 매우 옛스럽지만 보편적인 스토리에 현대적인 스타일을 덧입혔을 뿐입니다. 스타일을 선택하는 거야 감독 맘이지요. 그러나 스타일이 영화의 내용까지 바꾸지는 않았잖아요?

5.

대사들에 대해서도 한마디 합시다. 한 마디로 혼란스럽기 짝이 없지요. 한 쪽 끝에는 능수능란하게 셰익스피어 식 정통 대사들을 소화해내는 미리엄 마골리스나 피트 포슬트웨이트 같은 배우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래퍼처럼 거칠게 대사들을 쏟아대는 헤럴드 페리노 주니어 같은 배우들이 있습니다. 그 중간에는 다소 절룩거리는 어조로 대사들을 읽어가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자신의 현대적 억양을 반쯤 적용시킨 낭독조의 클레어 데인즈가 있지요.

이 배우들의 스타일들이 하도 이질적이라 장면이 바뀌고 배우들이 바뀔 때마다 도대체 같은 영화를 보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심지어 같은 장면에서도 두 영화를 합성한 것 같아요.

그치만, 꼭 그게 나쁘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루어만의 정신없는 스타일에 잘 적용시키면 이 다양성은 반대로 꽤 잘 어울릴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조절과 지휘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루어만은 통제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또 하지도 않았습니다.

6.

배우들에 대해서도 한 마디. 이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의 평균수준은 아주 높습니다. 디카프리오나 데인즈 모두 여러 다른 영화나 시리즈를 통해 자기 재능을 인정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변에 배치된 다른 배우들(소비노, 에메트 월시, 마골리스, 포슬트웨이트, 드니 기타 등등 기타 등등)도 그들을 믿음직스럽게 받쳐줄 만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들 모두 그렇게 기대에 못 미치는 건가요.

역시 루어만의 잘못입니다. :-) 그는 배우들에게서 최선을 짜내는 데에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디카프리오는 팬들이 고함을 꺅꺅 질러댈 만큼 그럴싸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는 누군가를 미친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으로 보이기엔 지나치게 나르시스트로도 보입니다. 이 배우에게 대사 연습을 더 시키고 감정 자체에 집중할 수 있게 감독이 밀었다면 역은 훨씬 나아질 수도 있었습니다.

클레어 데인즈의 경우도 문제가 있습니다. 이 배우의 장점은, [MSCL] 팬들이라면 다 아시겠지만, 공산당 선언이라도 입술 하나 뻥끗하지 않고 표현해낼 수 있을 것 같은 표정 연기인데, 루어만은 도대체 줄리엣에게 정지할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왜, 왜, 왜, 이 배우의 입에서 나오는 고명하신 바드 영감의 위대한 시구들이 위니 홀츠먼이 마감에 쫓겨가며 허둥지둥 써서 낸 TV 대본 대사들보다 덜 근사하게 들리는 걸까요?

조연배우들도 뒤죽박죽입니다. 루어만은 분명히 무언가 더 끌어낼 수도 있는 배우들을 그냥 장식처럼 세워두기만 하고 (드니, 소비노) 분명히 더 흥미진진해질 수 있는 배우들(레기자모, 페리노 주니어)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데도 실패했습니다. 물론 마골리스나 포슬트웨이트같이 매끄럽게 자기 역을 소화해낸 사람들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앙.상.블.이. 엉.망.입.니.다!

7.

[로미오 + 줄리엣]은 구경할 만한 영화입니다. 스타일만 따져도 상당히 그럴 듯하고 캐더린 마틴의 세트 디자인은 훌륭하며 킴 바렛(그리고 돌체 & 가바나와 프라다)이 담당한 의상 디자인은 한마디로 최고입니다. 배우들이 뒤죽박죽이라지만 그들을 구경하는 재미 역시 만만치는 않습니다. 루어만이 중세 이탈리아의 이야기를 현대에 접목시키는 방식을 들여다보는 것도 또 구경거리죠(예를 들어 그 영화에 나오는 총들 이름들 보셨어요? :->)

이런 [로미오와 줄리엣]이 있어도 나쁠 건 전혀 없겠지요. 셰익스피어 자신도 저승 어디서 이 영화를 킬킬거리며 신나게 보았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러나 전체적으로 루어만의 [로미오 + 줄리엣]은 영화보다는 뮤직 비디오 같아 보이고 배우들은 인간들보다는 마네킹처럼 보입니다. 언제까지 장난만 칠 수는 없습니다. 패러디가 아닌 이상 비극과 인간 감정 자체는 어딘가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97/01/09)

D&P

기타등등

1. 아무리 이 영화에 대해 이죽거리고 싶은 평론가들도, 이 영화가 이후의 셰익스피어 영화 관객들에게 미친 영향은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셰익스피어 인 러브]와 같은 영화들이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바즈 루어만의 이 요란한 영화의 덕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2.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 이 영화는 치명적이었습니다. 가능성 있는 배우 하나를 겉멋 왕자로 변신시킨 영화였으니까요. 이 악영향에서 벗어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