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정윤철

주연
조승우....초원
김미숙....경숙
이기영....정욱
백성현....중원

1.

경숙과 초원

[말아톤]의 모델이 된 사건은 실화입니다. 2001년, 배형진이라는 자폐증 청년이 춘천마라톤대회에서 풀코스를 완주했지요. 그 이듬해엔 강원도 속초에서 열린 철인3종 경기에 최연소 참가자로 성공해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요. 배형진의 이야기는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지기도 했고 어머니 박미경이 쓴 수기인 [달려라! 형진아]가 출판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말아톤]은 실화 영화가 아닙니다. 배형진의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고 실제 인물들과 사건에서 많은 부분을 차용하고 있지만 이 영화의 초원과 경숙은 기본적으로 허구의 인물이며 그들이 겪는 이야기도 허구입니다.

실화에 바탕을 둔 픽션은 두 가지 방향을 택할 수 있습니다. 우선 실화를 상상력의 기반으로 삼아 자유롭게 뻗어가는 작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소재에 맞는 규격화된 스토리를 찾아 그 안에 작품을 끼워 넣을 수도 있죠.

[말아톤]은 후자를 택한 영화입니다. 여러분은 [말아톤]에서 엄청나게 새롭거나 참신한 이야기는 찾아내지 못할 겁니다. 이 영화를 구성하는 스토리와 갈등은 정신지체 장애인을 다룬 멜로드라마와 스포츠 영화에서 가장 안전한 공식만을 따와 엮은 것들입니다.

문제가 될까요? 글쎄요. 영화는 중간중간에 실화의 진솔함과 관습적 해결책들 사이에서 위태롭게 흔들립니다. 더 나은 대안이 분명히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이 관습적인 해결책들이 모두 효과적이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들은 모두 먹히니까 살아남은 것들이니까요. 뻔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이야기이고 극적인 국면 전환을 위해 만들어낸 몇몇 설정은 필요이상으로 작위적이지만 전체적으로 영화의 울림은 상당히 큽니다.

2.

영화는 마라톤을 하는 장애인인 초원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사실 이 영화는 초원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초원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린 초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그의 노력에 감동하지만 그의 마음 속 깊은 곳까지 들어가지는 못하죠. 하지만 그런 초원을 이끄는 어머니 경숙이나 코치 정욱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걸 생각해보셨는지요. 만약 여러분이 평범한 중산계층 가족에 속해 있는 전업주부라면 결혼 후 몇 십년 동안 자격 조건을 묻는 일련의 테스트를 치를 것입니다. 그 동안 좋은 집을 사고 남편을 출세시키고 아이들을 괜찮은 학교에 보내는데 성공하면 여러분은 A학점을 받습니다.

이 영화에서 어머니인 경숙은 마치 필사적으로 좋은 점수를 받으려는 모범생처럼 행동합니다. 자폐증은 치료될 수 없으므로 초원을 정상적인 수준까지 키우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런 아들을 그냥 방치해두거나 그 위치에서 안주하는 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정상적인 발전이 불가능하다면 발전 가능한 다른 길을 찾아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거죠. 경숙에게, 어떤 수준까지 아들을 다그치며 성과를 얻어내는 것은 엄마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재미있게도 이 영화에는 경숙이 초원의 재능을 발견하고 키우는 과정이 거의 생략되어 있습니다. 영화가 본 궤도에 오르면 벌써 초원은 10킬로미터 단축 마라톤에서 3등을 한 뒤죠. 영화 초반에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장애를 딛고 일어나 자신의 재능을 찾아 나서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아들에게 특정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 옹고집 엄마가 수동적인 아들과 주변 사람들을 필사적으로 몰아세우는 이야기입니다.

그 뒤부터 이야기는 장르 공식과는 반대 방향으로 나갑니다. 이 영화에서 경숙의 드라마는 믿음을 발견하는 과정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과 목표에 대해 회의하는 과정입니다. 이 드라마는 지금까지 자신과 아들을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던 경숙이 자신과 아들의 한계를 인정하고 포기를 선언하는 순간에 절정에 달합니다. 바로 그 순간 자기가 마구 밀어붙이던 아들과 코치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처럼 자신의 의지와 동기를 물려받고 뛰어나간다는 건 어쩔 수 없는 아이러니지만요. 초원은 엄마의 목표를 달성하지만 그와 동시에 엄마는 아들과 자신의 관계와 위치를 재조정하게 됩니다.

[말아톤]을 모성 예찬으로 보는 건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감독의 원래 의도가 무엇이건, 이 영화를 통해 한국사회에서 어머니라는 위치와 임무가 어떤 것인지 재점검해보는 것도 유익할 겁니다.

3.

시사회가 끝난 뒤 기자간담회가 있었는데, 이 영화의 조승우를 [오아시스]의 문소리나 [레인 맨]의 더스틴 호프먼과 연결시키려는 질문이 많이 나오더군요. 어떤 영향을 받았냐, 비교해보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장애인 역은 인정받기 위한 중요한 단계인데 어떻게 준비했느냐... 구석에서 들으면서 조금 짜증이 났습니다. 문소리의 캐릭터는 자폐증도 아니었고 더스틴 호프먼과 조승우의 캐릭터도 전혀 달랐으니 말이죠. 게다가 장애인 역할을 무슨 상을 타기 위한 과시용으로만 이해하는 태도는 도대체 뭐랍니까?

그래도 이런 질문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조승우는 이 영화에서 어쩔 수 없이 그런 과시적인 연기를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쁘다는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단지 캐릭터의 특이한 습관이나 어투를 바깥으로 드러내는 건 그 역할을 맡은 배우의 의무였던 것이죠. 그리고 그 결과는 흠잡을 데 없이 좋았고요.

어떻게 보면 조승우보다 더 어려운 역할을 맡았던 건 김미숙이었습니다. 김미숙은 속으로 마음 고생을 하는 사람의 냉정한 외면과 부글거리는 내면을, 아무런 장식적 기교도 없이 표출해야 했으니까요. 가끔 도식적인 멜로드라마의 공식과 대사들이 발목을 잡긴해도 관객들은 캐릭터의 진실성을 쉽게 받아들였을 겁니다.

4.

[말아톤]은 불멸의 걸작도 아니고 창의적인 예술작품도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지나칠 정도로 안전하게 소재에 안주해버린 느낌도 들죠. 하지만 예술이 늘 소재를 지배하고 통제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때엔 소재가 관습적인 멜로드라마의 공식을 따라 흐르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더 예의바른 일일 수도 있죠. 제가 뭐라고 하건 영화는 모델이 된 실제 사람들과 사건들에 대해 충분한 예의를 지켰고 그건 잘한 일이었어요. (05/01/19)

DJUNA

기타등등

시사회 때엔 엔드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현악 사중주단이 무대에서 생음악을 연주하더군요. 어째 엔드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자리를 뜨지 말라고 부탁하더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