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알렉산드르 사쿠로프 Aleksandr Sokurov

주연
세르게이 드라이덴....이방인
Sergei Dreiden....Stranger
마리야 쿠즈네쵸바....에카체리나 대제
Mariya Kuznetsova....Catherine The Great
레오니드 모즈고보이....스파이
Leonid Mozgovoy....The Spy
막심 세르게예프....표트르 대제
Maksim Sergeyev....Peter the Great
블라디미르 바라노프....니콜라이 2세
Vladimir Baranov....Nicholas II
미하일 표트로프스키....자기자신
Mikhail Piotrovsky....Himself

로마노프 왕가

알렉산드르 사쿠로프의 [러시아 방주]는 아이맥스 영화처럼 거창한 감각적 체험입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내용이 아니라 영화를 담은 방식입니다. 사쿠로프의 아이디어는 간단했습니다. 디지탈 카메라로 단 한 번의 컷도 없이 1시간 반동안 하나의 신으로 이어지는 영화를 찍는 것이죠. 이 아이디어는 타르코프스키가 거의 사고실험처럼 맘 속에 품고 있다가 기술 한계 때문에 포기했던 것이었습니다.

아이디어 자체는 이미 알프레드 히치콕이 반 세기 전에 [로프]에서 써먹은 적 있었습니다. 필름 길이 때문에 약간의 잔재주를 동원해야했지만요. 더 거창한 시도는 마이클 피기스가 [타임코드]에서 한 적 있어요. 그 영화에서 피기스는 디지탈 카메라를 이용해 상호작용하는 연속적인 화면 네 개를 동시에 내보냈었습니다.

그러나 사쿠로프가 [러시아 방주]에서 한 시도는 여전히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는 히치콕처럼 사운드 스테이지에서 몇십 분 단위로 끊어 촬영한 게 아니었습니다. 피기스처럼 충분한 시간 여유를 두고 촬영을 반복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요. 그가 무대와 소재로 삼았던 곳은 성 페테르스부르크의 에르미타쥬 박물관이었습니다. 길거리나 사운드 스테이지처럼 감독이 맘대로 통제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지요. 그에겐 단 하루밖에 주어지지 않았고 햇빛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겨우 몇 시간의 여유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는 해가 짧을 대로 짧은 겨울이었어요. 게다가 그가 통제해야 하는 등장인물들은 수백년의 역사를 커버하는 수천 명의 엑스트라들과 세 개의 오케스트라였습니다. 생각만 해도 소름끼치지 않습니까?

사쿠로프는 해냈습니다. 아슬아슬하게요. 그리고 그 결과는 굉장히 근사합니다. 디지탈 화면은 예상외로 좋고 스테디캠 위에서 물흐르 듯 흘러가는 카메라가 잡아내는 에르미타쥬 박물관의 모습은 꿈결처럼 아름답습니다. [러시아 방주]를 한시간 반 동안 감상하는 건 정말 보기 드문 영상 체험입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 영화의 내용은 뭐죠? 1시간 반 동안의 박물관 투어? 네, 맞아요. 이 영화는 지금까지 나온 작품들 중 가장 압도적인 박물관 가이드 영화입니다.

다행히도 사쿠로프는 이 영화를 그렇게까지 산문적으로 처리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영화를 위해 시와 픽션을 도입했습니다. 이 영화에는 두 시간 여행자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나레이터(사쿠로프 자신이 목소리를 맡고 있습니다)는 정체불명의 사고로 니콜라이 2세 말기의 러시아 에르미타쥬 박물관에 떨어집니다. 그리고 그가 도착한 박물관은 [스타트렉: 보이저]의 시간 여행 에피소드에 나오는 보이저호처럼 각 구역마다 역사적 시간대로 쪼개져있었죠. 나레이터는 박물관을 방황하는 동안 '후작'이라고 불리우는 프랑스인 귀족을 만나고 그들은 함께 에르미타쥬 박물관을 탐사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표토르 대제나 에카체리나 1세, 푸쉬킨, 니콜라이 2세와 그의 가족들과 같은 유명한 역사적 인물들을 만납니다.

단순한 이야기지만 생각보다는 숨은 의미가 많은 설정입니다. 우린 영화에서 그 정체불명의 외교관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역사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영화가 주는 자잘한 힌트만으로 그가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습니다. 그는 에카체리나 여제 당시의 러시아를 방문하고 그 나라에 대한 수많은 저서를 남겼던 19세기 프랑스 외교관인 아스톨프 드 쿠스틴이거나 그를 모델로 삼은 가공의 인물입니다. 그리고 드 쿠스틴은 그의 [러시아에서 온 편지]에서 러시아 짜르 체제 하의 독재정치에 대해 흥미로운 분석을 시도한 사람입니다. 아직도 짜르 체제에 대한 그의 분석을 혁명 이후 스탈린과 그 이후 세대의 소비에트 러시아를 설명하는 데 이용하는 사람들도 많죠.

후작

그러니까 이렇게 됩니다. 러시아의 문화와 정치에 대해 아주 비판적인 19세기 유럽 지식인이 에르미타쥬 박물관이 품고 있는 삼백년의 러시아 역사에 대해 달콤씁쓸한 회상의 감정을 품은 21세기 영화 감독과 만난 것이죠. 그리고 그 무대가 되는 에르미타쥬 박물관은 얼마나 그럴싸한 무대인가요. 생각해보세요. 이 박물관은 삼백년에 걸친 러시아 역사를 품고 있는 러시아의 보물입니다. 하지만 이 박물관이 품고 있는 소장품 대부분은 서구 유럽에서 들어온 것이죠!

영화는 자연스럽게 대립되는 입장을 대표하는 두 사람들의 대화를 통해 러시아의 역사를 고찰하게 됩니다. 이 영화는 러시아와 유럽의 대화이기도 하고 과거와 현대의 대화이기도 합니다. 영화는 이들을 압도하는 과거의 아름다움에 매료되기도 하고 그 호사스러운 아름다움 속에 숨은 어리석음과 그 뒤에 닥칠 비극의 서주를 읽어내기도 합니다.

이 과정에는 생각외로 강한 감정이 녹아있습니다. 특히 사쿠로프는 관객들의 정서를 조작하기 위해 후작 캐릭터를 아주 효율적으로 활용했어요. 그는 정말 멋진 유령입니다. 지적이고 냉철한 독설가이지만, 그가 속해 있는 과거가 그와 함께 서서히 시간 속에 소멸되어 간다는 걸 인식하고 있는 슬픈 노인이기도 해요. 시간 속을 방황하는 후작과 지금까지의 역사를 꿰뚫고 있는 나레이터의 대화는 그런 어쩔 수 없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사라져가는 장려함에 대한 향수로 가득합니다.

이 복잡한 감정은 영화의 니콜라이 2세의 마지막 무도회에서 절정에 달합니다. 이 장면은 일단 수천 명의 엑스트라들을 동원한 어마어마한 스케일로 관객들을 휘어잡지만 그 역사적 의미를 읽어낼 수 있고 그 장려함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인식하는 관객들에게 독특한 풍미의 서글픈 향수를 제공해주기도 합니다.

사쿠로프의 [러시아 방주]는 흥미진진한 역사 교과서이고 인상적인 귀신들린 집 영화이며 효과적인 박물관 가이드 영화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거의 순수 음악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거대한 스케일의 러시아 교향곡과 같습니다. 분명한 스토리도 없고 영화적 줄거리도 없지만 영화는 아름답게 흐르며 교활하게 관객들의 정서를 자극할 줄 압니다. 물론 관객들에게 어느 정도 예습이 필요하니 완벽한 순수 음악에 비교하는 데엔 약간의 무리가 있지만 말이에요. (03/10/09)

DJUNA

기타등등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지휘자로 나옵니다. 아니, 그냥 화면 위에서 마지막 무도회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것이지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