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레아 풀 Léa Pool

주연
파트리샤 툴라슨....마리안느
Patricia Tulasne....Marianne
마티아스 하비히....엘리제
Matthias Habich....Élysée
로제 장들리....마루이스
Roger Jendly....Maruice
미셀 보이타....형사부장
Michel Voïta....Policier en chef

마리안느와 엘리제

[야만의 여인]은 남자 친구를 죽이고 달아나는 캐나다인 간호사와 스위스인 댐 엔지니어의 러브 스토리입니다. 둘은 엔지니어가 일하는 댐 근처에 있는 오두막과 그의 집을 오가며 위태로운 사랑을 나눕니다만 경찰의 포위망은 점점 조여오고 유뷰남인 엔지니어 역시 가족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야만의 여인]에서 이 위태로운 상황은 일종의 필터 역할을 합니다. 두 주인공은 거의 순수할 정도로 황량한 공간에서 사랑을 나눕니다. 둘은 서로에 대해 아는 것도 거의 없고 사회적인 연관성도 없습니다. 그들이 가진 건 상대방의 육체와 그들에 대해 느끼는 환영과도 같은 로맨틱한 감정 뿐이지요. 어떻게 보면 가장 이상적인 로맨스 영화의 설정입니다.

그러나 S. 코리나 빌의 단편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이 영화는 순수한 로맨스를 의도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차가운 사회학적 사고실험처럼 보여요. 영화는 로맨스를 확대 과장하는 대신 그런 설정의 메마른 절망을 냉정하게 탐구하고 있습니다.

살인과 도주 이후 사회적 끈이 완전히 제거된 주인공 마리안느의 로맨스는 댐을 둘러싼 황무지에서만 간신히 의미를 지닙니다. 댐에 직장을 가지고 있지만 어쩔 수 없는 황무지의 '방문객'일 수밖에 없는 엔지니어 엘리제와의 관계는 이런 제약 때문에 결국 시한부일 수밖에 없죠. 아무리 마리안느가 진짜 이름까지 포함한 모든 과거를 벗어던지려고 해도 짊어진 게 많은 사회인인 엘리제와의 관계는 끌고 다녀야 할 짐이 되어 결국 다시 그녀를 결박하게 됩니다.

영화는 레아 풀식으로 암담합니다. 전체적으로 컴컴한 멜랑콜리가 가득한 황량함으로 가득 차 있어요. 풀의 다른 영화들처럼 이 작품도 때깔이 참 곱긴 한데, 재료가 되는 알프스의 차갑고 거친 느낌이 강하기 때문에 그게 달콤한 예쁨으로 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특히 무대가 되는 댐은 정말 적절한 선택입니다. 현대 문명의 거대한 산물이면서 동시에 그 문명 사회와 연관성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황무지인 거죠.

[야만의 여인]은 레아 풀의 작품들 중 예술적 통제가 가장 잘 된 작품입니다. 소재가 강요하는 미니멀리즘 때문일 가능성이 크죠. 그만큼 정리가 잘된 영화이기도 합니다. 망명과 도피라는 레아 풀의 단골 주제에 대해 접근하려면 이 영화부터 시작하는 게 가장 좋죠. 하지만 그 바로 그 안전함 때문에 오히려 조금 거리가 느껴지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03/04/23)

DJUNA

기타등등

이 영화의 남자 주연 배우인 마티아스 하비히는 레아 풀의 88년작 [À corps perdu]의 주연이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