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막스 쉐릭--노스페라투

막스 쉐릭은 영화 사상 첫번째 드라큘라 백작이지만, 드라큘라의 전형성을 세운 배우는 아닙니다.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는 브람 스토커의 원작을 자유롭게 변형시켜 만든 영화로, 영화 속의 드라큘라도 원작이나 이후에 굳어진 이미지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쉐릭은 대머리에 커다란 눈과 박쥐처럼 넓고 큰 귀 그리고 긴 손톱을 한 흉칙한 인물로 등장합니다.

그런 용모답게 그의 드라큘라는 반쯤 미친 것 같습니다. "밤의 아이들의 노래소리요."라고 말할 때, 그는 경직된 동작으로 몸을 으쓱거리며 정신병자처럼 키득거립니다(제가 본 프린트가 속도 조정을 안 한 것이어서 그런 느낌이 더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무성 영화는 속도 조정을 안하면 실제 속도보다 다소 빨리 돌아갑니다.) 촌스럽고 그로테스크하며 조금도 동정심이 가지 않는 악의 화신, 바로 이것이 막스 쉐릭이 연기한 드라큘라입니다.

2. 벨라 루고시--드라큘라

토드 브라우닝의 영화 [드라큘라]부터 영화 속의 드라큘라는 하나의 전형성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가장 큰 역할을 한 장본인은 브라우닝이 아니라 드라큘라 역을 연기한 배우인 벨라 루고시입니다. 벨라 루고시는 이미 그가 전에 연극에서 한 역할을 충실하게 영화 속에서 재현했습니다.

루고시의 드라큘라는 그래서 그런지 매우 힘이 넘치고 다소 연극적이기까지 합니다. "나는 드라큘라요."라고 말할 때, 르고시의 목소리는 자신감과 카리스마로 가득차 있으며, "밤의 아이들의 노래소리..."까지 나가면 그의 자기과시적인 사악함이 극한에 도달합니다. 그는 지금 보기엔 다소 우스꽝스럽지만(당연하죠. 드라큘라 역의 운명인 걸요) 여전히 강렬한 하나의 원형을 연기했습니다.

3. 크리스토퍼 리--드라큘라의 공포

벨라 르고시의 드라큘라가 거대하고 연극적인 악당이라면, 크리스토퍼 리의 드라큘라는 음흉한 사기꾼입니다. 그는 얼핏 보기엔 잘난 척하는 영국 신사 같습니다. 그런 그의 속을 벗겨보면 살인 강간범의 시꺼먼 뱃속이 드러나는 거죠.

이런 이중적인 면 때문에, 르고시의 드라큘라에 비해 리의 드라큘라는 더 복합적으로 보입니다. 리는 "나는 드라큘라요."라고 말할 때는 정중하기 그지없지만 곧 그 신사의 껍질이 여지없이 벗겨지고 말지요.

리의 드라큘라에 대해 언급할 때는 피터 쿠싱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쿠싱이 연기한 반 헬싱 교수는 이전의 어떤 반 헬싱 보다 강렬합니다. 그의 날카로운 외모와 정밀기계와 같은 엄격한 동작 때문에 쿠싱은 오히려 리보다 강한 인상을 남기기까지 합니다. 상호보완적인 리와 쿠싱 때문에 해머 사의 드라큘라 영화는 다른 드라큘라 영화들에 비해 훨씬 결투적인 요소가 강합니다.

4. 클라우스 킨스키--노스페라투 더 뱀파이어

헤어조크가 무르나우의 고전을 리메이크한 [노스페라투 더 뱀파이어]에서 클라우스 킨스키는 이미 고전이 된 쉐릭의 메이크업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쉐릭의 연기를 그대로 차용하는 부분도 많고요.

하지만 그가 흉내만 낸 것은 아닙니다. 하커 앞에서 서류를 읽는 장면을 예로 들죠. 킨스키는 쉐릭이 얼굴은 움직이지 않고 커다란 눈만 왔다갔다 했던 동작을 모방하고 있는데, 쉐릭의 허기진 육식동물과 같은 느낌은 완전히 사라지고 피곤한 몽유병환자 같은 느낌만 남습니다.

킨스키의 드라큘라는 서글프고 피곤하며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질투를 느끼는 아웃사이더입니다. "나는 드라큘라요."라고 말하는 킨스키의 목소리는 지쳐빠져 있으며, "밤의 아이들의 노래소리요."라고 말할 때 그는 정말로 늑대들의 울음 소리에 위안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5. 게리 올드먼--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

게리 올드먼은 코폴라의 [드라큘라]에서 르고시의 연극적인 화려함과 로맨티시즘을 결합시켰습니다. 올드먼의 드라큘라는 어떤 때는 르고시 못지 않은 매력적인 악당이었다가 또 다른 때는 트랜슬바니아에서 온 흡혈귀판 로미오가 되기도 합니다. 에이코 이시오카가 디자인한 화려하고 그로테스크한 의상 속에서 그는 드라큘라 역의 변신 가능성을 즐기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배우들을 비교하는 데 제가 요긴하게 썼던 두 대사도 올드먼의 역을 설명하는 데에는 큰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나는 드라큘라요."라고 말할 때 그는 음흉함을 뱃속에 숨기고 있는 늙은 악당이고, "밤의 아이들 의 노래 소리요."라고 말할 때는 새디스틱한 연극 배우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그가 가장 많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흡혈귀판 로미오입니다. "나는 당신을 만나러 시간의 대양을 건너왔소"라며 그가 미나의 침실에서 흐느낄 때, 우리는 올드먼이 지금까지와는 선배 배우들이 했던 드라큘라와는 전혀 다른 드라큘라를 연기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95/07/12)

DJU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