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박대민

주연
황정민....홍진호
류덕환....장광수
오달수....오영달
엄지원....순덕

장광수와 홍진호

[그림자 살인]을 보기 전에 제가 갖고 있었던 정보. 일제시대를 배경으로한 명탐정 모험담이래! 황정민, 류덕환, 엄지원, 오달수가 나온대! 시나리오는 어디선가 무슨 상도 받았대! 음, 마지막 건 그렇게 대단한 정보는 아니었습니다. 상 탄 시나리오에 실망한 것도 꽤 여러 번이니까요. 그래도 앞의 두 정보는 기대할만하지 않습니까?

조금 더 자세히 영화에 대해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이 영화에서 황정민이 연기한 홍진호는 실종된 사람을 찾고 불륜현장을 폭로하는 게 전문인 남자입니다. 자기를 사립탐정이라고 부르지는 않지만 사립탐정이죠. 그는 위험한 일은 잘 안 하려고 하는 사람이지만 어느 날 조금 심각한 살인사건을 떠맡게 됩니다. 버려진 시체를 해부용 실습으로 쓰던 의학도 장광수가 살인범을 잡아달라고 찾아온 것이죠.

아니, 그냥 칼에 찔린 시체가 버려져 있는 걸 주워왔다면 그 시체가 살인사건의 희생자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 당연하지 않나요? 왜 똑똑한 의대생이라는 친구가 그걸 모르고 있었을까요? 여기서부터 영화는 많이 수상합니다. 당시 사람들의 관점에서 봐도 그럴 거예요. 독서를 어느 정도 한 당시 경성 사람들이라면 추리소설의 기본 정도는 알았습니다. 아무리 시체가 고픈 의대생이라고 해도요. 그 의대생의 의견이 가난한 사람이 살해당했다면 시체를 주워와 자기가 멋대로 이용해도 상관없지만 죽은 사람이 고관대작의 아들이어서 자기 생명이 위험하면 사정이 다르다는 것이라면 캐릭터에 대한 호감이 확 떨어지고요.

뭐, 이걸 사립탐정과 장래의 의사선생을 콤비로 엮어 살인사건을 수사하게 하려는 핑계라고 한다면... 이해해줄 수는 있습니다. 이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홍진호와 장광수를 경성판 셜록 홈즈와 왓슨으로 만들려 하고 있으니까요. 이름도 대충 비슷하지 않습니까? 홈즈 - 홍진호. 존 왓슨 - 장광수. 근데 여기엔 치명적인 결함이 있어요. 셜록 홈즈 소설들을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홈즈와 왓슨은 모두 개성이 아주 뚜렷한 사람들입니다. 첫 몇 페이지만 읽어도 두 사람이 어떤 캐릭터인지 알 수 있지요. 그런데 [그림자 살인]에서는 도대체 이들이 어떤 인물들인지 모르겠어요. 특히 홍진호의 경우는 심각합니다. 얘는 정체가 뭡니까? 프와로처럼 회색 뇌세포를 놀리는 명탐정인가요? 그러기엔 머리가 너무 나쁩니다. 이름을 따온 셜록 홈즈처럼 절충주의적인 초인인가요? 그렇게 보기엔 할 줄 아는 게 너무 없어요. 샘 스페이드처럼 터프 가이인가요? 아뇨, 이 친구는 싸움도 못 하고 지하 세계에서 잘 버티지도 못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홍진호에게 사건을 의뢰해야 하는 거랍니까?

홍진호가 이렇게 딱한 건 영화가 그에게 제대로 자신의 개성과 능력을 드러낼 기회를 전혀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각본을 쓸 때 머리를 쓰지 않은 거예요. 이 영화에는 미스터리라고 할 만 한 게 없어요. 10분 이상 지속되는 복선도 없고, 단서는 대부분의 경우 다음 시퀀스에서 의미가 밝혀집니다. 게다가 용의자가 한 명밖에 없답니다. 아니, 두 명인가? 마찬가지죠. 어느 쪽이건 명탐정이 할 일이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Q가 007에게 만들어줄 법한 장난감을 들고 돌아다닌다고 해도 써먹을 데가 없으니 어쩌나요.

근데 그 장난감은 누가 만들어줬냐고요? 순덕이라는 발명가가 만들어줬답니다. 엄지원이 연기한 이 인물은 비현실적이지만 재미있을 수도 있는 사람이에요. 사대부 가문의 마나님인데 서구 현대 과학에 매료되어 버려진 교회에 연구실을 차려두고 온갖 것들을 만드는 사람이지요. 워낙 설정이 튀기 때문에 정상적인 각본에서라면 당연히 주인공이어야 하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순덕은 그냥 비중없는 조연이에요. 덕택에 캐릭터고 뭐고 아주 이상해집니다. 왜 나오는지도 모르겠고 나와서 하는 일도 많지 않고.

마찬가지로 잘못 쓰인 인물은 종로서 순사 부장인 오영달입니다. 언제나처럼 오달수가 재미있고 귀엽게 연기를 하고 있기는 한데, 결코 그런 대접이 어울리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 처음부터 밝혀지기 때문이죠. 한 캐릭터에게 코믹하고 무해한 어릿광대와 사악한 범죄의 공범자 노릇을 동시에 시키면 일이 틀어지기 마련이죠. 아무리 오달수가 좋은 배우라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영화는 부족한 내용과 캐릭터를 액션으로 커버하려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액션 장면들도 그렇게 잘 짜여진 편이 아니에요. 가장 쉽게 지적할 수 있는 건 삿갓 쓴 미행자와 홍진호의 추격전이에요. 근사한 야외 세트에서 야마카시를 하면 멋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인데, 이게 영 별로입니다. 우선 리듬이 엉망이고 타이밍이 나빠요. 하나만 예로 들죠. 이 시퀀스는 아주 명쾌한 슬랩스틱 코미디로 끝나는데, 각본만 읽는다면 재미있을 수도 있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1초 안에 깔끔하게 끊어야 할 것을 몇 초 동안 여분의 컷을 넣어 아주 지루하게 끌어버려요. 이런 장면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이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영화라는 매체를 제대로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09/03/23)

DJUNA

기타등등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같은 캐릭터들을 이용한 속편을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던데, 그건 좀 어렵겠군요. 하지만 같은 캐릭터나 설정을 이용한 텔레비전 시리즈는 시도해봐도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전 순덕이 네로 울프식 안락의자 탐정으로 나와 아치 굿윈인 홍진호를 수족처럼 부리며 경성의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시리즈를 제안합니다. 괜찮을 것 같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