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E. 일라이어스 메리지 E. Elias Merhige

주연
존 말코비치....F.W. 무르나우
John Malkovich....F.W. Murnau
윌렘 드포....막스 쉬렉
Willem Dafoe....Max Schreck
케리 엘위스....프리츠 아르노 바그너
Cary Elwes....Fritz Arno Wagner
아덴 길레트....헨릭 갈렌
Aden Gillett....Henrick Galeen
에디 이자드....구스타프 폰 방겐하임
Eddie Izzard....Gustav von Wangenheim
우도 키에르....알빈 그라우
Udo Kier....Albin Grau
캐서린 맥코맥....그레타 슈로더
Catherine McCormack....Greta Schröder
로난 바이버트....볼프강 뮬러
Ronan Vibert....Wolfgang Müller

무르나우와 쉬렉

[뱀파이어의 그림자]는 종종 전해에 나온 [존 말코비치 되기]에 비교되는 작품입니다. 이 영화에도 존 말코비치가 출연해서이기도 하지만 [존 말코비치 되기]만큼이나 눈에 띄는 아이디어를 바탕에 깔고 있거든요.

존 칸츠가 각본을 쓴 이 영화의 아이디어는 간결하고 흥미롭습니다. 1921년, F.W. 무르나우는 막스 쉬렉을 주연으로 지금은 고전이 된 흡혈귀 영화 [노스페라투]를 찍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무르나우가 사실적인 흡혈귀 영화를 만들기 위해 막스 쉬렉이라는 진짜 흡혈귀를 고용했다고 우깁니다!

어쩌자고 실존 인물과 실화를 바탕으로 이처럼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를 만들었을까요? 하지만 이 아이디어는 꽤 먹힙니다. 막스 쉬렉은 결코 흡혈귀가 아니었고 [노스페라투] 말고도 수많은 영화를 찍었지만 영화 학자가 아닌 이상 대부분 사람들은 그의 다른 작품들에 대해 전혀 모릅니다. 그리고 그가 연기한 흡혈귀는 정말 특이한 존재이며 우리가 장르 속에서 익숙해진 전형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벨라 르고시나 크리스토퍼 리의 흡혈귀들과는 달리, 정말 그가 흡혈귀라고 믿어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단 말입니다. 이야기가 됩니다.

그럼 이런 과격한 사실 왜곡을 통해 영화가 하려고 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그렇게 어렵지는 않습니다. 꽤 전형화된 이야기니까요. 영화 속의 무르나우는 많은 예술 작품 속에 단골로 등장하는 예술지상주의자입니다. [노스페라투]라는 걸작을 완성시키기 위해 그는 무슨 짓이든 합니다. 스탭들과 배우들을 흡혈귀의 저녁 식사로 내주는 건 당연한 기본이지요.

무르나우의 이 정신나간 행동은 영화라는 매체와 결합되면서 새로운 이야기가 됩니다. 생각해보면 영화란 상당히 으스스한 장르입니다. 연극은 공정한 예술입니다. 살아 숨쉬는 배우들이 무대 앞에 나와 살아 숨쉬는 관객들과 직접 교류하죠. 여기엔 별다른 속임수 같은 건 없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배우들을 직접 취하지 않습니다. 감독이 멋대로 취사 선택한 배우들의 이미지만 슬쩍 가져올뿐이지요. 관객들이 보는 것은 배우들이 아닌 배우들의 유령과도 같은 흐릿한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어떻게 보면 영화 감독은 죽은 유령들의 그림자 연극을 위해 살아있는 사람들의 피를 쥐어짜는 사람입니다. 영화 속의 흡혈귀 막스 쉬렉이 무르나우에게 '너와 나는 그렇게 다르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흡혈귀 막스 쉬렉이 영화판에 들어서면서 중세의 괴물은 현대의 테크놀로지와 만납니다. 시간의 양극에서 왔지만 둘은 이상할 정도로 닮아서 그들의 만남은 종종 감명깊기까지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쉬렉이 영사기를 통해 그가 몇 백 년 동안 볼 수 없었던 일출을 보는 장면이지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으니 그렇게 독창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결과는 훨씬 감동적입니다.

막스 쉬렉의 행동은 종종 현대 영화판의 이야기와 맞아 떨어지면서 기묘한 코미디를 연출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그는 자의식이 강한 무비 스타처럼 행동합니다. 스탭들을 무시하고 줄거리를 바꾸고 작가를 무시하고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감독을 협박하기까지 하면서요. 할리우드의 영화 스탭들이 이 영화를 본다면 속이 후련하거나 반대로 소름이 쫙 끼칠 겁니다. 미치광이 감독과 흡혈귀 주연 배우가 스탭들의 피를 쥐어짜는 광경은 결코 그들에겐 판타지가 아닐테니까요.

E. 일라이어스 메리지는 비교적 정확히 영화의 방향을 잡고 있습니다. 영화는 그로테스크함의 중앙에 위치하며 거창한 호러와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노골적인 블랙 유머를 뒤섞습니다. 이들이 아주 정교하게 뒤섞였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거친 결과물은 인상적이고 강렬합니다. 단지 영화가 좀 짧고 뒷부분이 허겁지겁 달아나는 듯한 느낌이 좀 들긴 하는데, 그건 메리지의 문제라기 보다는 원래 각본의 문제일 겁니다. 아이디어가 강한 각본이 종종 그렇듯, 이 영화도 스토리가 아이디어 1번에만 지나치게 의존하는 느낌이 강하니까요. 전체적으로 보면 그렇게까지 큰 결함은 아닙니다만.

존 말코비치와 윌렘 드포라는 두 배우의 기용은 종종 아이디어에 눌릴 수 있는 이런 영화에 강렬한 힘을 부여합니다. 두 배우 모두 사실적인 연기 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특히 윌렘 드포의 오버 액션은 너무나도 극단적이라 거의 장엄하기까지 하죠. 발레나 가부끼처럼 스타일화된 드포의 막스 쉬렉은 오래간만에 보는 진짜 괴물입니다. 순전히 드포의 존재감에 빚을 지고 있는 부분도 많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영화 속의 막스 쉬렉이 드라큘라가 저녁 식사를 차리는 장면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일 겁니다. 대사도 좋지만 흡혈귀라는 괴물의 뱃속에 이만큼이나 깊숙이 들어가는 연기는 많지 않지요.

[뱀파이어의 그림자]는 비교적 소품입니다. 아이디어는 화끈하지만 그 아이디어를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처럼 적극적으로 발전시키지는 않아요. 남은 부분이 원래 좋아서 발전 가능성에 그렇게까지 신경이 쓰이지 않기는 합니다만. (01/06/04)

DJUNA

기타등등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원작 [노스페라투]와 영화 속의 [노스페라투]를 비교하시며 즐기실 수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 윌렘 드포의 쉬렉에는 원작의 흡혈귀에겐 있는 뾰족한 앞니가 없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