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라울 루이스 Raúl Ruiz

주연
안느 파리요....제시
Anne Parillaud....Jessie
윌리엄 볼드윈....브라이언
William Baldwin....Brian
리샌 포크....폴라/로라
Lisanne Falk....Paula/Laura
그레이엄 그린....형사
Graham Greene....Detective

[섀터드 이미지]라는 영화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이름은 라울 루이스입니다. 동명이인이 아닙니다. [선원의 세 왕관]과 [삶은 꿈]을 감독한 바로 그 라울 루이스가 이 '에로틱 드릴러'라는 딱지가 붙은 영화의 감독입니다. [섀터드 이미지]는 국내에 공식적으로 개봉되고 비디오로 출시된 최초의 라울 루이스 영화입니다. 그가 감독한 최초의 미국 영화이기도 하고요.

와, 뭔가 굉장히 기념비적인 영화 같군요. 그렇지 않나요?

감독의 이름을 알고 나자 갑자기 영화가 다르게 보입니다. [섀터드 이미지]의 줄거리를 말씀드릴까요? 이 영화의 여주인공 제시는 시애틀의 살인청부업자거나 자마이카로 신혼 여행을 온 강간 피해자입니다. 둘은 서로의 삶을 꿈으로 꾸는데 어느 쪽이 정말로 꿈을 꾸는 쪽이고 어느 쪽이 꿈 속의 인물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물론 영화가 진행되면서 두 삶은 서서히 뒤섞입니다.

그러고보니 상당히 루이스 적이네요? 다중의 아이덴티티를 가진 인물이 꿈과 현실이 뒤섞인 세계 속에서 방황하고 있잖아요. [삶은 꿈]의 감독이 돈이 떨어져 '에로틱 드릴러'를 찍는다면 꼭 이런 영화가 나올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영화의 각본가는 라울 루이스가 아니라 그리핀 풀이라는 아론 스펠링의 부하입니다. 그가 루이스를 염두에 두고 이런 각본을 썼을 리는 없을테니 이 유사점은 순전히 우연일 겁니다. 아마 제작자인 바베트 슈로더가 그 각본을 골라주지 않았을까요? "이봐요, 라울. 꼭 당신 영화같은 각본이 하나 있어요. 이걸로 영어 영화 하나 찍지 않겠어요?"

정말 그랬는지 어땠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그렇게까지 좋지는 않았다는 걸 말씀드려야겠군요. 이 영화는 작년 12월에 미국에서 개봉되었는데, 아마도 곧장 비디오 시장으로 밀려날 것 같습니다. 그쪽 반응은 아주 지독한 혹평 대다수와 약간의 아주 우호적인 평이 뒤섞인 것 같더군요. 욕하는 쪽은 스토리와 대사가 바보같고 연기가 뻣뻣하다는 거고, 우호적인 쪽은 현실과 꿈이 교차하는 그 스토리가 흥미진진하다는 거죠.

글쎄요. 저흰 그 중간 정도의 입장입니다. 우선 라울 루이스라는 이름에 그렇게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감독 이름을 가려놓고 이 영화를 본다면 누가 이 영화를 그 사람 작품으로 생각하겠어요?

각본이 '바보같다'는 평에는 동의하고 싶지 않군요. [섀터드 이미지]는 상당히 그럴싸하게 구성된 미스테리로, 아이디어나 스토리 전개에 참신한 부분들이 엿보입니다. 대사가 덜 떨어졌다고 욕할 수는 있겠지만 (네이티브 스피커가 아닌 저희가 그런 것까지 저울질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적어도 구성은 상당히 날씬합니다. 이 영화의 각본은 요새 쏟아져 나오는 메이저 영화사의 여름 액션 영화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그렇다고 그 각본을 과대평가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영화에는 루이스의 예전 영화에서 느낄 수 있는 그 중의적인 풍요로움은 없습니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각본은 지금까지 애매하게 꼬아왔던 이야기들을 상당히 말끔하게 정리해내는데, 그 방법이 꽤 영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때문에 내용이 빈약하다는 느낌도 들 수 있습니다.

연기가 뻣뻣하다는 비판은 이해가 갑니다. 특히 안느 파리요에 문제가 많습니다. 파리요는 좋은 배우지만 아직 영어 연기는 무리가 많습니다. 게다가 '제시'라는 영어식 이름을 가진 등장인물이 그렇게 강한 프랑스어 악센트를 쓴다는 게 말이 되는 일입니까?

요약하죠. [섀터드 이미지]는 꽤 흥미로운 영화입니다. 그러나 라울 루이스라는 이름의 아우라에 말려들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루이스가 감독했다는 게 방해가 되었을지도 모르죠. 남의 물에서 노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차라리 이 영화를 프랑스에서 불어로 찍었다면 더 효과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감독이 각본에 더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도 있었겠고 파리요도 더 나은 연기를 보여주었겠지요. 이런 내용에 유럽 쪽 평론가들이 더 쉽게 넘어간다는 것도 사실이니 비평적 성과도 높았을 거고요. (99/01/21)

D&P

기타등등

파리요에 대해 투덜거렸지만, [섀터드 이미지]만큼 파리요가 '예쁘게' 나온 영화는 아직까지 본 적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파리요가 이 영화에서 유달리 연기를 '안' 했던 게 그 이유가 아니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