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Andrei Tarkovsky

주연
도나타스 바리오니스....크리스 켈빈
Donatas Banionis....Kris Kelvin
나탈리아 본다르추크....하리
Natalya Bondarchuk....Khari
유리 야르베트....스나우트 박사
Jüri Järvet....Dr. Snauth
아나콜리 솔로니친.....사르토리우스 박사
Anatoli Solonitsyn....Dr. Sartorius
니콜라이 그린코....켈빈의 아버지
Nikolai Grinko....Kelvin's father
블라디슬라프 드보르제츠키....버튼
Vladislav Dvorzhetsky....Berton

1.

하리와 크리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솔라리스]의 원작은 폴란드의 SF 작가 스타니스와프 렘이 61년에 발표한 동명 소설입니다. 이 작품은 20세기 폴란드 문학 최고 히트작이고 다른 언어권의 작품들에는 야박하기 짝이 없는 영미권에서도 굉장한 인기를 끌었었지요. 덕택에 렘은 국제적인 SF 작가로 떠올랐고 그 뒤로도 수많은 작품들을 썼지만 지금까지 [솔라리스]의 인기를 넘어서는 책은 쓰지 못한 것 같습니다.

유명한 책이고 국내에서도 여러차례 번역된 적 있으니까 줄거리는 다들 아시리라 믿습니다. 이런 이야기죠. 솔라리스 행성의 '생각하는 바다'를 연구하는 우주 스테이션에 크리스 켈빈이라는 심리학자가 찾아옵니다. 그런데 그의 동료는 자살했고 남은 두 사람의 과학자도 어딘지 모르게 상태가 이상합니다. 스테이션의 텅빈 복도에는 절대로 존재해서는 안되는 이상한 사람들이 돌아다니고요. 알고 봤더니 솔라리스의 바다가 스테이션 사람들의 기억을 읽어내 모사한 중성미자 유기체인 '방문객'들을 스테이션으로 보낸 것이었죠. 그리고 켈빈의 방문객은 몇 년 전에 자살한 그의 아내였습니다.

스타니스와프 렘은 비교적 정통적인 SF 작가입니다. [솔라리스]도 아이디어의 개념만 따진다면 꽤 '하드'한 편이에요. 하지만 이 작품은 그의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몽환적이고 로맨틱한 분위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여전히 아이디어와 주제는 냉정하기 짝이 없지만 이야기 자체는 좀 다른 거예요.

아마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이 작품을 영화화하려고 했던 것도 소설의 '물렁한' 분위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타르코프스키는 SF를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요. 아마 그는 SF가 기본적으로 제공해주는 환상적인 소재만 취한 일반 영화를 만들고 싶어했을 겁니다. 그럴싸한 방패막 같지 않은가요? 먼 미래의 일이라고 우기면서 영화를 만들면 검열 문제도 어느 정도 피해갈 수 있을테니까요.

원작자 스타니스와프 렘은 당연히 타르코프스키의 비전을 싫어했습니다. 사실 최종적으로 나온 작품도 어느 정도 타협의 결과죠. 타협은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했습니다. 렘은 영화를 공개적으로 비난했고, 타르코프스키도 [솔라리스]를 가장 맘에 안 드는 작품으로 뽑았으니까요. 웃기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렘의 [솔라리스]를 타르코프스키 영화를 통해 기억하고, 영화 [솔라리스]는 대중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타르코프스키 영화가 되었다는 거죠.

2.

[솔라리스]는 SF 분위기가 거의 안나는 영화입니다. 타르코프스키는 심지어 그 흔해빠진 우주선도 제대로 그려넣지 않았습니다. 착륙선과 스테이션의 디테일 묘사가 나오는 몇 장면을 찍긴 했지만 나중에 대부분을 잘라버렸죠. 솔라리스의 스테이션은 낡은 모텔과 같고, 몇몇 '첨단 기계들'을 제외하면 도입부의 지구는 그냥 현대입니다. 렘의 소설에서는 꽤 중요한 과학자 세계에 대한 풍자나 하드 SF적 요소들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도 했던가요?

영화는 징그러울 정도로 타르코프스키적이기도 합니다. 영화를 안 본 사람들도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거예요. 경악스러울 정도로 긴 롱 테이크, 내러티브와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회화적 비주얼, 종종 넋나갈 정도로 아름다운 이미지를 내보내다가 갑자기 채도를 잃고 흑백이 되어버리는 컬러 화면 그리고 너무나도 노골적이라 잘난 척과 순진함이 한꺼번에 드러나는 그 엄청난 심각함.

렘의 소설은 기본적으로 미지의 대상과 의사소통을 나누려는 지구인들의 시도를 다루고 있는 정통 SF였지만, 타르코프스키는 솔라리스의 바다를 핑계 삼아 주인공의 내면과 과거를 파고 드는 편을 택합니다.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는 죽은 아내, 멀어진 가족과 고향 (이 경우는 지구)에 대한 회한과 향수로 가득합니다. 영화는 방문객들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바다와 의사소통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냥 원작이 제공한 정보를 몽유병자처럼 읊을 뿐이지요. 사실 그런 데 적극적이 되기엔 켈빈이 지구에서 가져온 감정의 짐이 너무 많은 겁니다.

[솔라리스]는 기본적으로 병적인 로맨스입니다. 많은 평론가들은 [솔라리스]와 [현기증]의 유사점을 지적했습니다. 고전 애호가들은 이 영화를 SF 버전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로 보았고요. 구색을 맞추기 위해 에드거 앨런 포우와의 비교도 시도해볼 만합니다. [솔라리스]는 죽은 자들과 그들의 기억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러브 스토리입니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존재한다고 해도 접근할 수 없는 대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죠.

여기서부터 [솔라리스]는 타르코프스키식 꿈이 됩니다. 몽환적인 이미지와 사운드가 분명한 스토리 없이 연결되어 있지만, 그러면서도 톨스토이에서부터 브뤼겔에 이르는 다양한 서구 문명의 유물들이 장황한 사유의 재료를 제공해주는 그런 꿈이지요. 관객들이 타르코프스키의 짜증날 정도로 느린 호흡에 익숙해지면 이 모든 것들은 생각보다 훨씬 근사한 영화적 성찬이 됩니다. 상당히 힘이 드는 감상이지만 노력 없이 모든 걸 얻을 수는 없지 않겠어요?

거의 완벽하게 캐스팅된 배우들도 타르코프스키의 비전에 충실하게 봉사합니다. 크리스 켈빈 역의 도나타스 바리오니스의 지치고 초라한 모습은 렘의 비전과는 거리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타르코프스키식 주인공에는 굉장히 잘 맞습니다. 하리를 연기한 나탈리아 본다르추크의 시적인 아름다움 역시 대체물을 찾기 힘들고요. 과연 이들의 이미지를 잊고 소더버그의 리메이크 버전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게다가 요새 와서 보면, 타르코프스키의 SF 비주얼에 대한 결벽증은 오히려 꽤 시대를 앞선 접근법이었습니다. 그와 미술감독 미하일 로마딘이 창조해낸 낡고 복고적인 세트는 당시에 만들어진 번들거리는 SF 세트들과는 달리 거의 시대에 뒤쳐져 보이지 않습니다. 조지 루카스가 우주진에 잔뜩 절은 구닥다리 중고차와 같은 우주선들을 그의 [스타 워즈]에 등장시키기 5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니, 오히려 미래의 유행에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솔라리스]는 종종 비교되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와는 달리 '완벽한' 영화가 아닙니다. 일단 그런 영화가 되기엔 타협과 충돌이 너무 많았지요. 그리고 생각해보면 타르코프스키는 초기작인 [안드레이 류블료프] 이후로 '완벽한' 영화를 만든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애당초부터 그의 개성이 '완벽함'의 추구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지요. 타르코프스키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건, [솔라리스]는 그의 진정한 영화 스타일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첫번째 영화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02/12/13)

DJUNA

기타등등

1. 타르코프스키에게 렘의 [솔라리스]를 소개해 준 사람은 주연 배우 나탈리아 본다르추크였다고 합니다. 물론 당시 13살짜리였던 본다르추크는 자기가 나중에 그 소설을 각색한 영화의 주연을 맡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겠지만요.

2. 보통 [솔라리스]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대한 타르코프스키의 응답'으로 여겨지는데, 타르코프스키는 영화를 만들기 전에 정말로 큐브릭의 영화를 보았었고 의식적으로 그 반대 방향을 모색했었습니다. 하지만 전혀 다른 성격의 영화들임에도 불구하고 이 두 작품이 거울면과 같은 유사성을 보여주는 건 꽤 흥미롭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