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펠바운드 Spellbound (1945) * * *

감독
알프레드 히치콕 Alfred Hitchcock

주연
잉그리드 버그먼....콘스턴스 피터슨 박사
Ingrid Bergman....Dr. Constance Peterson
그레고리 펙....존 발랜타인
Gregory Peck....John Ballantine
마이클 체호프....알렉스 브룰로프 박사
Michael Chekhov....Dr. Alex Brulov
리오 G. 캐롤....머치슨 박사
Leo G. Carroll....Dr. Murchison
존 에머리....플뢰로 박사
John Emery....Dr. Fleurot
스티븐 게레이....그라프 박사
Steven Geray....Dr. Graff
폴 하비....하니쉬 박사
Paul Harvey....Dr. Hanish
도널드 커티스....해리
Donald Curtis....Harry
론다 플레밍....메리 카마이클
Rhonda Fleming....Mary Carmichael
노먼 로이드....감즈씨
Norman Lloyd....Mr. Garmes

J.B.와 콘스턴스
[스펠바운드]는 그렇게 나이를 잘 먹은 히치콕의 '고전'은 아닙니다. 소재 때문일 거예요. 이 영화는 할리우드에서 정신분석을 소재로 다룬 거의 최초의 영화입니다.

히치콕과 정신분석을 안 어울리는 결합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심심풀이 땅콩으로 정신분석이론을 영화 비평과 결합시키려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감독 중 하나니까요. 하지만 히치콕이 의식적으로 정신분석을 영화와 결합시킬 때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한번 40년대의 정신분석 영화들이 어땠는지 떠올려보세요. 그 순진무구한 직설법은 결코 장점이 아닙니다. 정신분석을 다룬 당시의 고전인 [베일 속의 사랑]이나 [캣피플]같은 영화들은 오히려 그 뻔뻔스러운 정신분석학의 찌꺼기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고 해야겠지요.

[스펠바운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영화는 여전히 좋은 작품이지만, 영화의 등뼈인 정신분석은 히치콕 영화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불투명한 매력을 지워버립니다. [히치콕과의 대화]에서 트뤼포는 그 점을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지요. "당신의 많은 작품들 -- [오명]이라든가 [현기증] 등 --을 보면 악몽을 그대로 영화화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관객들은 히치콕의 영화에서 광기와 착란이 풍부한 정신분석학적인 영화를 기대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당신 작품 중에서 가장 상식적인 영화로 보입니다. 대화도 많고요. 당신의 다른 영화와 비교해볼 때 [망각의 여로(스펠바운드)]는 상상이나 환상이 부족하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펠바운드]는 기본적으로 정신분석을 산문적인 무기로 내세운 추리물입니다. 원작으로 사용된 프란시스 비딩의 소설 [The House of Dr. Edwardes]는 훨씬 과격하고 미친 작품이었다고 합니다만, 각본가인 벤 헥트와 히치콕은 톤을 낮추는 게 더 적절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영화는 정신분석의인 주인공 콘스턴스 피터슨이 새로 병원에 부임한 에드워즈 원장과 사랑에 빠지면서 시작됩니다. 하지만 콘스턴스가 사랑에 빠진 남자는 진짜 에드워즈 박사가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에드워즈 박사를 죽였다고 믿는 기억상실증 환자였지요. 콘스턴스와 J.B.라는 이니셜만 밝혀진 그 남자는 경찰에 쫓기면서 에드워즈 박사의 실종 사건의 비밀을 해결하려 합니다. 물론 그 모든 비밀은 J.B.가 꾼 꿈에 숨어 있었지요.

이런 식의 스토리를 놀려대는 건 쉬운 일입니다. 우린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꿈해몽 한 번과 스키 여행 한 번으로 J.B.와 같은 중증 환자가 단숨에 치료가 된다면 얼마나 세상이 편하겠어요. [스펠바운드]의 정신분석은 너무나도 명쾌해서 굉장히 작위적으로 보입니다.

반대로 영화의 로맨스는 의도적인 몽롱함에 의해 방해를 받습니다. 콘스턴스와 J.B.의 로맨스는 가짜 에드워즈 박사의 정체가 밝혀지기까지는 꿈결과 같은 몽롱한 분위기에 감싸여 있는데, 그런 장치가 너무나도 뻔해서 그들의 로맨스는 힘을 많이 잃습니다. 당연히 이들을 따라가는 것도 조금 힘겨워지고요. 히치콕과 헥트의 접근법은 계획만 따진다면 지극히 타당했지만, 정작 스크린 위에 떴을 때는 사정이 달랐던 것이지요.

그래도 [스펠바운드]는 여전히 흥미진진한 영화입니다. 정신분석을 다루는 방식이 거칠고 서툴다는 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런 소재는 살바도르 달리라는 거장과의 흥미로운 조우를 낳기도 했습니다. 달리는 J.B.의 꿈을 자신만의 독특한 비주얼로 현실화시켰는데, 보다 오래동안 대중들과 비평가들을 기만해온 초현실주의 예술가답게, 그는 히치콕보다 사기에 더 능한 편입니다.

잉그리드 버그먼의 존재 역시 잊을 수 없습니다. 이 영화는 버그먼과 히치콕의 첫 콤비작으로, 이 영화에서 버그먼은 가장 이상적인 히치콕 여자 주인공의 표본을 연기해냈습니다. 화려한 금발 미인이면서도 풍부한 지성과 인간적 느낌이 가득 한 캐릭터지요. 상대역인 그레고리 펙이 좀 밋밋하긴 하지만 버그먼을 바라보기만해도 배우에 대한 갈증은 멎습니다.

종종 직업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당시 영화들의 뻔한 클리셰가 코를 간지럽히기는 하지만,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의 역할 전환도 흥미롭습니다. 콘스턴스는 짜증날 정도로 진부한 사랑에 빠져 있지만, 그만큼이나 능력있는 추리물의 주인공이기도 하니까요.

미클로쉬 로자가 작곡한 요란하게 로맨틱한 음악도 [스펠바운드]의 명성을 높혀주는 요인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히치콕은 그 뒤로 로자와 작업을 하지 않았는데,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로자의 음악은 [스펠바운드]와 잘 맞긴 했지만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직설적이어서 히치콕의 감성과는 아주 어울리는 편이 아니었으니까요.

[스펠바운드]는 정신분석을 직접적으로 다룬 또다른 히치콕 영화인 [마니]처럼 어정쩡한 중간에 주저앉은 작품입니다. [마니]가 과한 영화였다면 [스펠바운드]는 너무 얌전했다고 할까요? (02/10/04)

DJUNA


기타등등

1. 우리나라 텔레비전 영화 담당자들은 이 영화에 사용된 미클로쉬 로자의 음악을 지나칠 정도로 좋아했습니다. 특히 MBC 사람들은 로맨틱한 장면이 나올 때마다 원래 대사에 가려진 원래 음악 대신 [스펠바운드]의 음악을 틀어댔었죠. 듣다보면 질릴 지경이었습니다.

2. 히치콕은 40분쯤 뒤에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나옵니다.

3. 영화는 흑백이지만 마지막 자살 장면의 두 프레임은 빨간 칼라로 처리되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주말의 명화 시간 때 이 작품을 보았을 때는 그 장면의 빨간색이 살지 못했답니다. 그 빨간색을 제대로 본 건 오늘이 처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