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송일곤

주연
감우성....강민
서정....민수인/서은아
강경헌....황수영
장현성....최성현
손병호....김철주
정승길....박형사
박원상....문기사
윤영....간호사
김영재....동료의사
윤주상....교감선생님
김희정....소녀
김학준....소년

민수인과 강민

교통사고로 14일 동안 의식을 잃은 남자, 그 동안 산장에 방치되었던 두 구의 변사체. 송일곤 감독의 [거미숲]의 도입부는 전형적인 추리영화풍입니다. 주인공이 겪는 시간의 이상한 반복 때문에 사실적인 추리물의 분위기에서 벗어나 있다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 도입부가 특별히 덜 전형적인 건 아니지요. 경험많은 장르 관객들이나 독자들은 이런 식의 순환 구조를 사용한 이야기들을 정말 수도 없이 접해왔으니까요. 대부분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흠... 진상이 저거구나. 그런데, 저걸 언제 터뜨릴 작정일까? 중간에? 아니면 무게잡은 반전으로 만들어 후반부에?' 후반에 터뜨린답니다. 최선의 선택이었는지는 모르겠어요. 구성상 필요하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 뻔하거든요.

그러나 그렇다고 미리 김이 빠질 것도 없으니, [거미숲]은 그렇게 노골적인 추리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에는 두 개의 장르가 공존해요. 하나는 살인용의자로 몰린 주인공이 기억을 더듬어가며 진상에 다가가는 추리물이고, 다른 하나는 자동적으로 데이빗 린치의 이름이 연상되는 초현실적인 아트하우스 영화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정말 중요한 부분은 후자입니다. 추리물의 도입부는 송일곤의 전작인 [꽃섬]과 특별히 다르지 않은 우울한 아트하우스 영화의 핵심까지 관객들을 끌고가기 위한 맥거핀이지요. 영화 후반에 도달하면 '누가 살인범인가'나 '거미숲에 숨겨진 비밀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들은 연기처럼 사라져버립니다.

영화의 제목에 사용된 거미숲은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도는 숲입니다. 잊혀진 영혼들이 누군가 기억을 해줄 때까지 거미로 변신해 숲에 살고 있다는 전설이 있다는 곳이죠. 흠, 누가 그런 전설을 지어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사실이더라도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게 분명해요. 그렇게 토속적인 느낌은 들지 않잖아요? 하여간 [심야 미스터리 극장]의 PD인 주인공 강민은 그 이야기를 보내온 제보자를 만나기 위해 거미숲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그리고 그 제보자라는 사진관 주인은 이상할 정도로 그의 죽은 아내와 닮은 민수인이라는 여인이었죠. 여기서 며칠 동안 머물던 강민은 위에 언급한 불쾌한 살인사건 속에 말려들고 맙니다.

거미숲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논리를 꼼꼼하게 따질 필요는 없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초자연적 현상이 개입되었는지 분석할 필요도 없고요. 이 모든 건 심하게 뇌를 다친 남자의 철저하게 주관적인 회상이거든요. 거미숲의 이야기 속에서 강민의 삶은 조각조각 이미지와 사건의 파편들로 부수어져 연관성없는 다른 요소들과 뒤섞입니다. 전체적으로 일관된 하나의 이야기를 형성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이야기들을 구성하는 각각의 파편들은 독립적이죠. 분석가 흉내를 내며 이들을 앞뒤에 맞게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런 짓을 안한다고 영화가 특별히 죽거나 이해불능의 함정에 빠지는 것도 아닙니다.

덕택에 피투성이 살인과 적나라한 섹스, 신경 거슬리는 욕들로 가득한 이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는 중반 이후부터 20년대 초현실주의자들이 머리 속에 품었을 것 같은 그런 분열된 시를 터뜨리게 됩니다. 특히 이 영화의 유령들은 아름다워요. 마르크 샤갈의 연인들처럼 하늘로 날아오르는 어린 소녀나 프레임 속에 슬픈 뒷모습의 잔영을 남긴 채 굳어버린 여인의 이미지는 쉽게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영화는 몇 퍼센트가 모자랍니다. 전에 저는 [꽃섬]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영화가 의도했던 마술적 기적에 완전히 도달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는데, [거미숲]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는 분명 자기만의 서글픈 시적 아름다움을 관객들에게 전달합니다. 하지만 의도는 그 이상이었음이 분명해요. 무언가가 중간에 빠진 거죠. 아무리 맥거핀이어도 지나치게 뻔한 추리물 파트가 몇몇 부분을 뒤로 잡아끌었을 수도 있겠지요. 수인과 강민이 등장하는 에피소드 몇몇은 지나치게 모호하게 묘사되어 오히려 일종의 예술 영화 클리셰에 빠져 있다는 느낌도 들어요.

그래도 [거미숲]은 일정한 수준의 성취를 이룩했습니다. 영화는 종종 사람들의 폐부를 찌르고 가끔은 그만큼 사람 신경을 긁기도 합니다. 거미숲과 유령들은 아름다우며 감우성과 서정은 모두 설득력있고 종종 상당히 매력적이기까지 한 연기를 보여주죠. 둘 다 좋은 피사체이기도 하고요. 장르물의 함정에 조금만 더 유의했다면 이들의 총합은 훨씬 더 컸을 거예요. (04/07/09)

DJUNA

기타등등

시사회가 끝나고 기자 회견을 하는 동안 소녀 역을 한 아역배우 김희정을 봤거든요. 설마 그 아이에게 이 영화를 전부 보여주지는 않았겠죠? 꼼짝없는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