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박한준

주연
김정화....림계순
공유....최고봉
남상미....남진아
자두....박효진
백일섭....박무순
김애경....오미자
이광기....김영광
조달환....송효국
허율....장웅길
유인영....우월란
김명국....고봉아빠
안해숙....고봉엄마

1.

계순

[그녀를 모르면 간첩]은 간단한 말장난에서 시작됩니다. 그것도 아주 핀트가 맞는 말장난은 아니지요. '그녀를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갑작스럽게 유명세를 탄 여자 주인공이 알고 봤더니 진짜 간첩이었다는 설정이니까요. 말장난을 엄격하게 지킨다면 간첩이어야 할 사람은 여자 주인공의 상대역이어야 하겠죠. 물론 그런 걸 신경쓰는 사람은 없겠지만요. 이야기만 그럴싸하게 만든다면 과정이 무슨 상관이겠어요.

2.

조금 더 자세하게 줄거리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자 주인공 림계순은 공작금 5천만원을 들고 사라진 공작원을 잡으러 파견된 북한 간첩입니다. 하지만 버거킹에서 아르바이트 직원으로 일하면서 사라진 공작원을 기다리고 있던 림계순에게 엉뚱한 일이 닥칩니다. 계순에게 반한 3수생 고봉이 몰래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을 홈페이지에 올린 거죠. 엉겁결에 인터넷 얼짱이 된 계순은 순식간에 유명인사가 됩니다.

3.

영화가 기둥 소재로 내세운 건 소위 '얼짱 신드롬'입니다. 소위 롯데리아 걸로 알려진 원조 얼짱 남상미의 기용도 그 때문이겠죠. 하지만 영화는 이 신드롬에 대해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또 깊이 생각하고 싶어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영화는 평범한 사람이 순전히 반반한 외모 때문에 갑자기 전국적 스타가 된다는 일반적인 현상 자체엔 관심없습니다. 중간에 원조 얼짱 남진아와 계순의 대결과 같은 게 잠시 나오긴 하지만 그 역시 날라리 세계의 영역 다툼 이상의 의미는 없어요. 영화에서 얼짱 신드롬은 순전히 스토리 국면 전환을 위한 도구에 불과합니다.

4.

[그녀를 모르면 간첩]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 중 하나는 영화의 철저한 무정치성입니다. 이 영화는 최근에 연달아 나온 남북문제를 소재로 한 가벼운 코미디들 중 하나이고, 그 중 가장 정치에 신경쓰지 않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서 분단 상황은 순전히 스파이의 당위성을 만들어주기 위해 존재합니다. 영화는 어느 쪽을 편들 생각도 없고 그 상황에 대한 정치적인 메시지를 말할 생각도 없습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무거운 주제엔 관심도 없습니다. 심지어 영화는 남한과 북한이 가진 최소한의 차이에도 무관심합니다. 계순은 초반에 잠시 읊조리는 북한 사투리를 제외하면 거의 북한 사람처럼 굴지도,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대단한 문화 차이를 겪는 것 같지도 않고요. 북한 간첩이 아니라 강남으로 침투한 강북 스파이 같아요.

장진이 [간첩 리철진]에서 비교적 예의바르게 이 주제를 다룬 뒤로, 영화계에서는 우리가 반공 교육을 통해 어쩔 수 없이 머리 속에 주입할 수밖에 없었던 북한과 북한 사람들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을 가지고 놀거나 뒤집는 것만으로도 비교적 손쉬운 코미디를 만들 수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녀를 모르면 간첩]도 그런 영화들 중 하나입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군기 빠진 간첩들은 모두 우리가 어렸을 때 봤던 반공수사물의 이미지를 뒤집은 캐릭터들이죠. 하지만 기존 이미지나 생각을 뒤집는 것만으로는 효과적인 아이러니를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진실에 가까운 무언가가 내재되어 있어야 하죠. 그런데 과연 림계순이 그런 진실을 이야기하는 캐릭터일까요? 그런 생각은 들지 않는군요. 이 캐릭터는 그냥 허공 중에서 떨어진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일 뿐입니다.

5.

[그녀를 모르면 간첩]은 당연히 [엽기적인 그녀]의 아류작입니다. 인터넷 소설을 각색한 작품은 아니지만 여전히 인터넷 세대의 정서에 호소하고 있고 인터넷 현상을 소재로 하고 있죠. '엽기적인 코미디'와 감상적인 연애담의 진부한 결합 역시 이 장르의 공식에 충실합니다. (도대체 최첨단 인기 코미디란 영화들이 이렇게까지 'uncool'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지 영화는 그렇게까지 '엽기성'에 치중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계순과 고봉은 [엽기적인 그녀]를 벤치마킹한 캐릭터들임이 분명하지만 그들의 캐릭터들은 그렇게까지 과격하지는 않습니다. 좋게 말하면 거북스러운 느낌없이 비교적 편하고, 나쁘게 말하면 무개성적이고 튀는 구석이 없는 어정쩡한 인물들이죠. 이 영화에 대한 선호도는 이 장르의 '자극성'에 대한 선호도와 연결되어 있을 겁니다.

6.

연기력 때문에 김정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없을 겁니다. 이 배우의 매력은 아직 완벽하게 구현되지 않은 배우로서의 재능보다는 그 시원스럽고 편한 이미지에서 나오죠. 그것만 제대로 보존된다면 팬들은 대부분 만족합니다. 김정화가 연기하는 계순도 여기서 특별히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그냥 예쁘고 시원스럽고 털털하고 편한 사람이지요. 영화는 김정화의 기존 이미지를 안전하게 재활용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팬들도 그 정도면 만족하겠지요. 하긴 제대로 여물지도 않은 배우가 시작부터 모험을 할 필요는 없을 거고요. 백일섭이나 김애경과 같은 노련한 고참들이 괜찮은 보조자로 뛰어주니 그렇게 균형이 맞지 않는 편도 아니고요.

7.

[그녀를 모르면 간첩]의 가장 큰 문제점은 위험에 빠지지 않는 쉬운 길만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보기 편한 영화가 되기도 했지만 주제와 소재, 캐릭터의 가능성을 하나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영화가 되어버렸어요. 얼짱 신드롬이나 남북 관계와 같은 흥미진진한 소재를 쥐고 있으면서 평범하고 예쁜 로맨틱 코미디로 만족했다면 그건 안이하다고밖에 할 수 없죠. (04/01/15)

DJUNA

기타등등

롯데리아 대신 버거 킹이 무대로 나오니 아무래도 조금 어색하더라고요. 찍기 전에 롯데리아에 물어보기나 했는지 궁금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