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폴 버호벤 Paul Verhoeven

주연
캐스퍼 반 디엔....자니 리코
Casper Van Dien....Johnny Rico
디나 메이어....디지 플로레스
Dina Meyer....Dizzy Flores
드니스 리처즈....카르멘 이바네스
Denise Richards....Carmen Ibanez
제이크 부시....에이스 레비
Jake Busey....Ace Levy
닐 패트릭 해리스....칼 젠킨즈
Neil Patrick Harris....Carl Jenkins
클랜시 브라운....짐 상사
Clancy Brown....Sgt. Zim
세스 질리언....슈가 왓킨즈
Seth Gilliam....Sugar Watkins
패트릭 멀둔....잰더 바칼로
Patrick Muldoon....Zander Barcalow
마이클 아이언사이드....진 라첵
Michael Ironside....Jean Rasczak
루 맥클라한....생물학 교사
Rue McClanahan....Biology Teacher
마샬 벨....오웬 장군
Marshall Bell....General Owen

1. 로버트 앤슨 하인라인

언젠가 저는 하인라인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 적 있죠. 하인라인은 SF작가 하인라인, 스토리텔러 하인라인, 동네 약장수 하인라인 셋이 뭉친 인간이고 SF작가와 스토리텔러가 앞에 있을수록 작품은 좋아지며 약장수가 앞으로 나설수록 망가진다고요.

[스타쉽 트루퍼즈]는 어떨까요? 한마디로 동네 약장수 하인라인이 지나치게 앞으로 나간 작품입니다. 하인라인은 소설 전체에 걸쳐서 자신의 '극우 사상'을 직접적으로 전파하느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는데, 그 말투가 너무 노골적이고 그의 생각이 너무나도 순진해서 거의 당혹스럽기까지 하지요.

일단 [스타쉽 트루퍼즈]라는 소설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를 알고 넘어가는 게 도움이 될 겁니다. 일단 이 소설은 (1) 교양 소설이고, (2) 유토피아 소설이며, (3) 청소년 소설이며, (4) 전쟁 소설입니다.

전쟁 소설이라는 건 너무 뻔하니까 넘어가고, 이 작품이 청소년물임을 우선 밝혀두기로 하죠. 하인라인은 데뷰 시절부터 청소년 물에 상당한 열정을 보여왔고 사실 그 작품들 중 몇몇은 그의 최고 작품입니다. 그런 소설들의 대부분은 일단의 틴에이저들이 SF적인 모험에 말려들고 그 와중에서 어른으로 성숙하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지요.

[스타쉽 트루퍼즈] 역시 그런 공식에서 조금도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단지 이 작품에는 교양소설의 차원이 좀 더 강조되어 있는데, 그건 주인공 자니 리코가 성숙해가는 과정이 그의 사상적 성숙(?)과 병행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인라인이 액션과 SF로는 만족을 못하고 죽어라 수다를 떨었단 말이죠. 아마, 청소년 물이라는 장르가 그의 자제력을 풀어놓았을 겁니다.

리코의 성숙은 결코 깊이 있는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가 하인라인이 만들어낸 그 극우국가의 이념을 그냥 꿀꺽꿀꺽 삼켜버린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 작품이 유토피아 소설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건 어느 정도 자연스럽습니다. 피가 터지고 수백만이 죽어나가는 전쟁 소설이지만 [스타쉽 트루퍼즈]는 유토피아 소설이기도 합니다. 하인라인은 그가 만들어낸 세계가 옳다고 믿으며 소설 전체를 통해 그것을 설명해나가니까요. 하인라인은 소설 전체를 통해서 '나는 옳아, 나는 옳아, 나는 옳아'를 끝없이 되풀이 해대는데, 그 정도가 지나쳐서 기괴하다는 생각마저 들어요. 하긴 그 황당함이 이 소설의 또다른 재미이기도 하겠지만.

2. [스타쉽 트루퍼즈]

그렇다면 버호벤의 영화 [스타쉽 트루퍼즈]는 원작과 어떤 점을 공유하고 있을까요? (1) 전쟁 영화일까요? 물론 그렇습니다. (2) 청소년 영화일까요? 애들 보여주기엔 좀 그런 장면들이 많지만 맞습니다. (3) 교양 영화일까요?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인라인의 장광설들은 거의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4) 유토피아 영화일까요? 절대로 아닙니다!

[스타쉽 트루퍼즈]는 어딘가 [거미 여인의 키스]에 나오는 나찌 선전 영화만 꺼내 SF로 만든 작품 같습니다. 많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하인라인의 장광설 중 꽤 여럿이 남아 정말로 진지하게 그걸 믿는 캐릭터들 (예를 들어 라첵 같은 친구들)에 의해 진지하게 설파되고 순진한 주인공들은 모두 그걸 믿습니다.

그러나 장광설 중 극히 일부만 나올 뿐이고 그 과격함이 생경하기까지 하기 때문에 하인라인의 사상은 영화에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 결과 그가 공들여 만든 유토피아는 코믹하고 약간 정신나간 가상 공간으로 추락합니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랐는지 버호벤은 버호벤식 [배달의 기수]인 [페더럴 뉴스]를 중간중간에 내보내 상황설정을 보다 확실하게 비웃습니다.

이런 것들은 군국주의나 파시즘에 대한 진지한 비판은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나갔더라면 이 영화는 원작의 황당함마저 상실한 지루한 교훈극이 되었을 겁니다. 애당초부터 버호벤은 그런 진지한 교훈극과 맞는 체질이 아니니까요.

[스타쉽 트루퍼즈]는 기질적으로 생각없는 폭력적인 코미디이며 로저 이버트가 말했듯이 'kiddie movie'입니다. 따라서 이 영화를 가장 정확하게 보고 즐길 수 있는 방법은 이 영화를 'kiddie movie'로 인식하는 것이겠지요.

3. 당위성

당위성에 대해서도 이미 여러번 언급했지요? 이런 것들은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스펙타클과 정서적 효과를 위해 얼마든지 희생될 수 있지만 그 당위성의 결여 자체가 감상에 방해가 된다면 문제가 있다고요.

그런데 전 정말 방해를 받았답니다.

하인라인의 원작은 황당한 유토피아 소설이지만 일급의 SF 전쟁 소설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 작품의 진짜 가치는 전쟁 소설이라는 면에 있을 겁니다. 그가 소설 전체에서 구사하는 전쟁 묘사는 분명 걸작입니다. 세련되고 적절한 SF적인 가제트가 풍부하고 그럴싸합니다.

그런데 버호벤의 이 영화에서 지구 군발이들은 바보 집단 같습니다. 이 친구들이 하는 일이란 게 트루퍼들에게 총 한자루씩 주어서 우주선에서 뚝 떨어뜨려 벌레들을 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건 암만 봐도 백병 전 상황이 아닙니다! 이 전쟁은 분명 '벌레들을 다 때려잡자!'니까 트루퍼들이 개입될 이유가 정말로 없는 거죠. 누구 말마따나 멀리서 버튼을 눌러 핵폭탄을 떨어뜨리는 게 가장 나은 방법일 겁니다. 게다가 초광속 여행까지 가능한 이 미래 세계의 군대는 어찌된 게 무기가 걸프 전 때 미군보다 못한 것 같습니다. 원작의 '강화복'은 비싸서 못했다고 하니 이해한다고 칩시다. 하지만 이 친구들에겐 탱크 하나 없단 말입니까?

게다가 적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면서 무작정 병사들을 떨어뜨리는 바보짓은 이해하기가 힘들고 원작 속에서는 분명 상당한 당위성을 인정받은 우주선들이 이 영화에서는 운송선 이상이 아닙니다. 원작에서는 귀신같았던 델라들리에 함장이 이 영화에서는 그저 버버거리는 바보로 나오니 답답하고 환장할 노릇이로고.

적인 곤충들의 설정도 뭔가 이상합니다. 이 친구들은 자기 행성에서 지구까지 운석을 던져서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폭격했다고 합니다. 은하계 정반대편에서 운석을 던졌다니 분명 초광속 비행에 관련된 테크놀로지가 개입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묘사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더 황당한 건 운석이 서서히 다가오는데도 어느 누구도 그걸 막을 생각도 하지 않았으며 보고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동네 우주군들은 도대체 뭐하고 있었단 말입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벌레들의 테크놀로지가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영화가 아주 이상해집니다. 전쟁이 일어나는 중에도 과학자들은 벌레들에게 지능이 있나 없나를 놓고 따지고 있습니다. 은하계 반대편에서 지구를 폭격한 생물을 놓고 이런 토론을 벌이는 것도 황당하지만 영화에 나오는 벌레들이 정말로 아무런 테크놀로지도 없는 괴물들로 보이는 것은 더 황당합니다. 심지어 벌레들은 우주선을 파괴할 때도 방귀 뀌듯 뒤로 쏘는 플라즈마를 이용합니다. 이런 걸로 우주선이 박살난다니 믿을 수 없지만 그런 걸 쏘아대는 벌레의 몸이 폭탄 하나로 박살난다는 것은 더 믿을 수 없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하여간 너무 말도 안되는 상황들이 너무나도 자주 나오기 때문에 저처럼 말도 안되는 설정에 집착해서 액션이 있다는 것 자체를 까먹는 관객들도 상당했다고 믿을 수 밖에 없습니다.

흠, 정말 그래야했을까요? 분명 버호벤은 벌레들로부터 테크놀로지를 제거하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야 사방에서 우르르 밀려오는 괴물들과 싸우는 지구인들을 그릴 수 있었을테니까요. 이런 바보스러운 설정이 영화에 그만큼 바보스런 개그를 부여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최소한의 당위성을 부여하면서 이런 장난을 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아무래도 이 영화는 말도 안되는 게 정도가 지나칩니다.

4. 스펙타클

[스타쉽 트루퍼즈]는 분명 구경거리입니다. 강화복이 안 나온 것이 유감이지만 정말 개미떼처럼 사방에서 몰려드는 벌레들의 총공격에는 얼이 빠질만합니다. 양적인 면에서는 분명 지금까지 나왔던 어떤 영화들보다 압도적이며 그런 CG 괴물들을 사우스 다코타와 와이오밍의 훤한 대낮에 태평스럽게 집어던지는 대담함도 엄청납니다. 사실, 이 영화는 CG기술의 쇼케이스로 더 적절한 기능을 발휘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주로 나가면 좀 심심해지는데, 다소 진부한 우주선 디자인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주군이 너무나도 바보같이 묘사된 게 더 큰 이유입니다. 아무리 바보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더래도 이런 부분은 신경을 좀 썼어야 했어요.

5. 배우들

리코 역의 캐스퍼 반 디엔은 이쁜 배우지만 배우보다는 런웨이에서 뛰쳐나온 남자 패션 모델같습니다. 한마디로 너무 꽉 짜여져서 좀 갑갑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하지만 그의 갑갑한 외모는 단순무식한 리코의 캐릭터에 썩 잘 어울립니다. 카르멘 역의 드니스 리처즈도 역시 예쁜 배우지만 미소 짓는 것 이상의 연기는 안하는 것 같습니다. 닐 패트릭 해리스의 캐릭터 칼은 해리스 자신의 히트작인 '두기 하우저'를 베껴먹는 것 같아서 조금 황당합니다.

가장 강한 인상을 주는 배우는 디지 역의 디나 메이어입니다. 적당히 힘이 넘치며 가장 인간같습니다. 최근들어 무시무시한 역만 연속적으로 해왔던 제이크 부시는 이 영화에서 약간 띨뻥한 병사로 나오는데 귀엽고 꽤 재미있습니다. 마이크 아이언사이드의 라첵 역도 그럴싸합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개인보다는 집단에 대한 영화이고 캐릭터보다는 액션이, 액션보다는 SFX 스펙타클이 더 중시되는 영화입니다. 어떤 배우들을 놓았어도 영화의 질에는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 거예요.

6. 그리고...

[스타쉽 트루퍼즈]는 바보스럽게 황당한 일련의 조크들로 이루어진 폭력적인 코미디입니다. 결코 진지하지 않으며 특별히 구체적인 풍자의 방향을 잡아놓은 영화도 아닙니다. 액션 장면 자체는 지루하지만 근사한 특수효과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대충 그 부족함을 메꾸어줍니다. 조금만 더 영리하게 만들었다면 좋았겠지만 이 영화의 바보스러움도 꽤나 즐길 만합니다. 물론 수많은 하인라인 팬들과 원작 소설팬들이 열을 받겠지만 제가 상관할 바는 아닙니다.

영화를 보면서, 하인라인이 해군 군수공장에서 랄라랄라 노는 대신 안지오 같은 데에 떨어져 죽어라고 포탄 세례를 당해봤더래도 그런 세계관을 고집했을까, 갑자기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차피 그는 실전 경험이 없는 해군장교에 불과했으니까요. 하긴 누군가 대답해줄 수 있는 질문도 아니군요. (97/12/02)

DJUNA

기타등등

몇몇 분들이, 이 영화에 나오는 전술의 결여가, 상부에서 트루퍼들을 여왕을 잡기 위한 미끼로 이용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시더군요. 어느 정도 맞는 말일 겁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쳐도 바보같음이 줄어드는 건 아니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