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고영남

주연
김영애....선희
이기선....미옥
윤일봉....유진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미옥과 선희

[깊은 밤 갑자기]는 [여곡성]과 함께 가장 인기있는 80년대 한국호러영화입니다. 인기는 [여곡성]이 더 있는 편이지만 스토리의 창의성이나 모험정신은 [깊은 밤 갑자기]가 한 수 위죠. [여곡성]과는 달리 [깊은 밤 갑자기]는 안정적인 [전설의 고향] 공식을 따르는 대신 자신만의 길을 파고 있습니다.

[깊은 밤 갑자기]의 주인공은 30대 초반의 가정주부 선희입니다. 선희는 저명한 곤충학자인 남편 사이에 딸을 하나 두고 비교적 안락한 삶을 살고 있죠.

남편이 화재로 엄마를 잃은 미옥이라는 시골 처녀를 집에 데리고 오면서 선희의 삶은 깨어집니다. 선희가 가장 먼저 눈치챈 건 미옥이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는 목각인형입니다. 선희는 미옥의 무당 엄마가 죽기 전에 주었다는 이 인형을 전에도 본 적이 있거든요. 남편이 찍은 사진 슬라이드 속에서요.

미옥이 가정부로 일하면서 선희는 남편과 미옥의 관계를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둘이 특별히 의심가는 행동을 해서가 아니라, 젊은 가정부와 남편과의 관계를 의심하는 건 당연한 공식이기 때문이죠. 저라면 그런 느끼한 영감탱이는 트럭째 주어도 안 갖겠지만, 가정주부라는 위치 빼면 남는 게 없는 선희에겐 그 느끼한 영감탱이를 젊은 여자에게 잃는다는 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악몽입니다. 자신의 존재의미 자체가 사라지는 걸요.

선희는 '여자가 봐도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미옥의 육체(라고 각본에 쓰여있지만 전형적인 80년대 살빛 영화식 몸매죠)'를 질투하고 자신의 간통 각본에 남편과 미옥의 수상쩍은 행동을 끼워넣습니다. 남편과 미옥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선희의 의심을 정당화할만큼 분명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지만, 그 때문에 선희는 더욱 미칠 지경입니다. 무당의 딸이라는 미옥의 출신과 불쾌한 목각인형은 선희의 불안한 정신을 완전히 흔들어놓고요.

결국 선희는 미옥을 집에서 몰아내기로 마음 먹습니다. 위태로운 삼층 다락 창틀에 망가지기 직전의 의자를 세워놓고 미옥에게 창문을 닦으라고 시킨 거죠. 시키는 대로 한 미옥은 떨어져 죽습니다.

이제 모든 게 끝난 걸까요? 아뇨. 목각 인형이 남았잖아요. 목각 인형은 이런 종류의 호러 영화에서 수상쩍은 인형들이 할만한 일들은 모두 한답니다. 버려도 다시 돌아오고 가끔 선희의 환상 속에 뛰어들기도 하고 사람 크기로 부풀어 선희를 공격하기도 하고요.

결국 선희는 홀로 버려집니다. 단 하나밖에 없는 친구는 더 이상 찾아오지 않습니다. 딸은 할머니네 집에 갔고요. 일의 원인은 다 자기가 만들었으면서도 여전히 잘난 척이 하늘을 찌르는 재수탱이 남편은 치료랍시고 정신나간 아내와 인형을 남겨두고 채집여행을 떠납니다. 그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났는지 제가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요?

[깊은 밤 갑자기]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은 그 모호함입니다. 영화는 끝까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선희의 환상인지 말해주지 않습니다. 남편의 불륜, 미옥의 수상쩍은 행동, 목각인형의 출연과 같은 건 모두 선희의 환상일 수도 있고 진짜 일어난 일일 수도 있죠. 영화는 무엇이 사실인지 밝히는 대신 처음부터 끝까지 선희의 주관적인 관점을 따라갑니다. 이런 스토리 전개는 폴란스키의 [리펄션]이나 나중에 나온 후배 한국 호러인 [아카시아]와 닮아있기도 합니다. 80년대 한국 호러 영화 시장의 분위기를 생각해보세요. 이런 도전은 상당한 모험이었습니다.

선희의 욕망과 공포는 뻔하고 도식적이지만 그만큼이나 보편적이고 일반 관객들에게 잘 먹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전설의 고향] 이야기들과는 달리 설정이 현실과 가깝기 때문에 더 입체적인 분석이 가능하고 더 의미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죠. 이런 이야기를 완벽한 이해와 설명이 불가능한 미로 속에 던져넣었으니 이 영화에 제대로 몰입한 관객들의 악몽은 굉장했을 거예요.

도전과 의도가 언제나 결과와 연결되는 건 아닙니다. 감독 고영남이나 각본가 윤삼육은 야심이 넘쳐나긴 했어도 그를 구체화할만한 테크닉과 어휘는 충분히 갖추고 있지 못했어요. 대사는 80년대식으로 어색하고 화면을 조각내는 만화경 효과는 지겨울 정도로 반복되며 지방 극장업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삽입한 수줍은 노출신은 우스꽝스럽고 심심하죠. 김영애가 열심히 연기하긴 했어도 자기 목소리도 없는 다른 배우들은 구식 뻐끔 연기에 게으르게 갇혀 있고요. 하긴 그 때문에 자기 목소리로 연기하는 유일한 배우인 김영애에게 영화 전체가 집중되는 효과가 연출되기도 하지만요.

[깊은 밤 갑자기]는 비교적 흥미로운 예술적 파탄입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미소를 지으며 "그래도 그 정도면 시도해볼만은 했지"라고 말할 정도는 되는 거예요. 생각해보면 호러 영화에 대한 진지한 평가가 전무하던 시대에 찍은 영화치곤 이 정도만 해도 상당히 잘된 편입니다. (04/09/16)

DJUNA

기타등등

1. 윤일봉 할아버지가 샤워하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그러고 나오지 좀 말지"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답니다. 당시엔 정말 벗으면 다 에로라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하긴 또 모르죠. 세월이 조금만 더 지나면 톱 스타의 누드가 아니라 보통 사람의 불완전한 육체의 평범함을 강조한 사실적인 시도처럼 보이게 될는지.

2. 80년대에 인기있던 에로 영화들의 취향이나 거기 출연한 배우들의 몸매를 생각해보면 당시 미옥의 몸매는 꽤 경쟁력이 있었을지도 몰라요. 선희가 그런 의심을 품기 시작한 것도 숨은 한국영화팬이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