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양주남

주연
문예봉....애순
이금룡....남편
유선옥....정희

애순

[미몽]의 줄거리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건 조금 힘든 일입니다. 굉장히 심한 잡음 때문에 대사의 반 이상을 놓쳤거든요. 차라리 옆에 달린 일본어 자막으로 대사를 읽은 사람들이 더 정확하게 내용을 알고 있을 겁니다.

하여간 어느 정도 확실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애순은 정이 부족하고 허영이 심한 가정주부입니다. 참다 못한 남편은 애순을 쫓아내고 애순 역시 별다른 미련 없이 집을 떠납니다. 집을 떠나 부자집 아들인 척 행세하는 콧수염 단 남자와 살던 애순은 그 남자가 범죄자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와 패거리들을 경찰에 신고합니다. 집으로 돌아오던 도중 애순이 탄 택시가 딸 정희를 치고 두 사람은 같이 병원에 옵니다. 정희는 살아나지만 애순은 같은 병실에서 독을 먹고 자살하지요.

이런 이야기가 왜 나왔느냐... 30년대였으니까요. 이 영화는 호러영화입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현대여성들'과 그들의 요구와 존재감에 분노와 공포를 느낀 남자들의 경고라고 할까요. 오히려 당시는 [자유부인]이 나왔던 50년대보다 더 절실했을 겁니다.

애순의 묘사는 그래서 재미있습니다. 이 캐릭터는 영화의 주인공이면서 등장할 때부터 퇴장할 때까지 철저하게 타자화되어 있습니다. 살아 남아서는 안 되는 악당이고 괴물이지요. 그 때문에 이 캐릭터의 심리 묘사는 형편없습니다. 특히 이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마지막 장면은요. 도대체 왜 자살을 하는 거랍니까? 엄마로서 죄책감을 느껴서요? 농담합니까? 뜬금없이 공익광고로 흐르는 교통사고 설정에 대해서는 말을 안 하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관객들에게 [미몽]의 세계는 30년대 중반에 이 영화를 만들었던 사람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읽힙니다. 애순은 성격 나쁘고 허영이 심한 바람둥이지만 이 사람의 싸늘하고 이기적인 성격은 은근히 애교스럽고 시원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특히 남자친구가 범죄자라는 걸 알자 다짜고짜 신고한 뒤 아무런 미련도 남겨두지 않고 떠나는 부분에선 미소가 절로 나와요. 대신 우리의 감독님과 작가님이 선량한 피해자로 잡은 남편은 시스템의 권위를 방패로 피해자 행세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상당히 재수없고 불쾌합니다. 만드는 사람들은 그걸 알았는지 모르겠어요.

영화로서 [미몽]은 은근히 모양이 잘 잡혀 있습니다. '잘 보이고 잘 들릴' 뿐만 아니라 나름대로 꽤 재미있는 시도도 하고 있어요. 영화는 애순의 남편을 거울 안에 집어넣어 이중의 프레임 안에 가두기도 하고 전혀 다른 상황에서 말해진 두 개의 대사를 연결시켜 자연스럽게 하나의 대사로 만드는 장난을 치기도 합니다. 이들은 모두 조금씩은 공식적이지만 30년대 한국 영화의 테크닉이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는 달리 꽤 세련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단지 배우들의 연기는 거슬립니다. 그들의 연기는 지나칠 정도로 학예회 풍이고 심리묘사는 일차원적입니다. '나는 악당이오'라는 딱지를 달고 나온 듯한 콧수염 남자친구는 처음부터 실소감이지만 주연배우인 문예봉도 썩 좋은 편은 아니에요. 그나마 배우로서 장기를 과시한다고 할 수 있는 마지막 장면은 전체적인 이야기와 전혀 맞지 않아서 튀고요. 조금 슬프네요. 당시는 이웃 동네 일본과 중국에서는 역사에 남을 전설적인 영화 스타들이 태어나던 시절이었으니 말이죠.

[미몽]을 보다 보면 영감이 떠오릅니다. 애순이 남자친구를 버리고 나가는 장면에서 이야기를 완전히 새로 쓰면 어떨까요? 냉정하고 이기적이며 여성성에 전혀 얽매이지 않은 여자주인공을 내세운 발랄한 악당소설식 모험담을 그리는 겁니다. 그게 훨씬 재미있지 않겠어요? (06/03/08)

DJUNA

기타등등

영상자료원에서 가져온 [미몽]의 참고 자료에 보면 '방탕한 아내가 외간 남자와 바람을 피우다가 자신이 탄 차에 딸이 치는 상황에 직면 했을 때, 차에 태우고 가면될 것을 굳이 운전사에게 의사를 불러달라고 부탁하는 결함'을 비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런 걸 볼 때마다 전 한국 사람들의 기본 상식 부족에 소름이 돋습니다. 정희와 같은 교통사고 피해자는 구급요원이 올 때까지 절대로 움직여서는 안 돼요. 애순은 그 상황에서 가장 옳은 일을 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