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박찬욱

주연
이영애....이금자
최민식....백선생
이승신....박이정
김부선....우소영
서영주....김양희
김시후....근식
오달수....장씨
남일우....최반장
고수희....마녀
김병옥....전도사
김세원....나레이터

([친절한 금자씨]에는 [올드보이]에 있었던 거창한 반전 따위는 없습니다. 하지만 감독이 될 수 있는 한 관객들에게 공개하고 싶지 않은 국면 전환은 하나 있지요. 예측하기 어려운 건 아니지만 그걸 눈치채고 싶지 않으시다면 이 리뷰는 건너뛰시길.)

금자씨

전 박찬욱의 신작이 '복수 3부작'을 완결하는 [친절한 금자씨]라는 영화라는 말을 들은 뒤로 그 영화에 대해 큰 기대는 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이유야 많죠. 첫째, 3부작의 세 번째 영화가 앞의 두 편과 같은 수준의 작품인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둘째, [올드 보이]의 성공으로 그의 명성과 차기작에 대한 기대가 비정상적일 정도로 부푼 지금, 그 기대치에 맞는 영화가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었습니다. 셋째, 그는 이 영화에서 앞의 영화들을 특징지었던 폭력성을 제한하겠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지금까지 해리 놀즈와 같은 골수 영화팬들을 열광시켰던 극단적인 작품은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넷째, 그는 시점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는데, 이런 식의 의무감이나 죄의식을 커버하기 위해 만든 영화가 실속있는 결과물을 내는 건 드문 일입니다. 그의 이전 여성 묘사들이 특별히 흥미로운 적도 없었고요. 다섯째, 전 주연배우 이영애가 이전 작품의 주연이었던 송강호나 최민식과 같은 수준의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어제 드디어 이 영화를 봤습니다. 제 예측이 맞았냐고요?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은 맞았습니다. 놀랄 일은 아니죠. 하지만 그것만으로 [친절한 금자씨]라는 영화를 간단하게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이 영화의 설정은 여러분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유괴살인죄로 13년간 감옥에서 복역한 이금자가 출옥합니다. 사실 금자씨가 억지로 죄를 뒤집어쓴 범죄의 진짜 범인은 백선생이라는 영어학원 교사였지요. 금자씨의 과거가 같은 교도소를 나온 주변사람들에 의해 조금씩 회상되는 동안, 금자씨는 복수를 계획합니다.

앞의 두 영화들과 이 영화를 갈라놓는 가장 큰 차이점은 복수를 다루는 방식에 있습니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이어지는 복수들은 일종의 카오스 상태에서 벌어졌습니다. 절대적인 악인도 없었고 순수한 피해자도 없었으며 이들은 모두 통제되지 않은 혼란 속에서 서로를 죽여댔습니다. [올드보이]는 그리스 비극과 같았습니다. 피투성이 폭력을 행사하는 주인공들은 무심한 신이 사전에 얄밉게 짜놓은 것 같은 운명의 굴레 속에 얽혀 있었죠. 하지만 [친절한 금자씨]의 주인공 이금자는 앞의 인물들과 전혀 다릅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금자씨는 자신의 의지를 통제하고 그 의지의 주인으로 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분명한 선악구분이 없었던 앞의 두 영화와는 달리 [친절한 금자씨]의 세계는 명확하고 간결합니다. 이 세계에서는 단 두 편만이 존재하죠. 금자씨편과 아닌 편. 금자씨는 지상의 죄를 청소하는 냉정한 집행관이고 금자씨편이 아닌 쪽은 죽어 마땅한 악당들입니다. 유의해야 할 점이 하나 있긴 합니다. 악당들은 당연히 흑이지만 집행관이 꼭 백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거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의 세계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간결하다는 점은 바뀌지 않습니다.

이 영화가 복수를 다루는 방식도 주목할만합니다. 앞의 두 영화들은 마치 복수자라는 동물들의 행동을 관찰하는 자연과학자의 보고서들과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복수라는 행위의 능률과 효용성을 극대화하려고 하는 엔지니어의 설계도와 같습니다. 금자씨는 단순히 악당을 죽이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악당이 자기나 희생자가 당한 고통을 직접 느껴야 하며 그 복수 행위 자체가 관련된 사람들 모두에게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논리를 따르는 동안 영화의 주제는 바뀝니다. 삼부작의 공통된 주제는 복수입니다. 한마디로 "네가 나를 괴롭혔으니 나도 널 괴롭혀주겠어!"의 논리죠. 하지만 [친절한 금자씨]의 후반부에서 주제는 복수에서 정의로 옮겨갑니다. 백선생에 대한 복수가 본격적으로 무르익는 후반부는 박찬욱적이라기보다는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적입니다. 뒤렌마트의 희곡들이 대부분 그렇듯, 이 영화에서도 정의의 실현은 결코 결백한 방식으로 집행되지 않습니다. 뒤렌마트의 작품들보다 이 영화의 깊이가 얕다면 그 결백하지 않은 방식이 정의라는 대상에 대한 고찰보다는 복수의 쾌락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친절한 금자씨]는 여러 모로 편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주제나 내용에 의미가 없기 때문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일 수 있겠죠. [올드보이]를 공허한 기교의 남발이라고 여겼던 평론가들도 [친절한 금자씨]에서는 비교적 명확하고 분명한 주제와 토론거리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올드보이]에 대한 반발감 때문에 [금자씨]를 더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도 나올 수 있을텐데, 사실 전 거기에 특별히 반대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자씨]가 비교적 쉬운 영화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노골적인 폭력은 줄었고 결말도 더 안전합니다.

또 금자씨

너무 편안해서 오히려 심심하기도 합니다. 아마 많은 팬들은 [펄프 픽션]의 차기작을 기다리다 [재키 브라운]을 맞은 타란티노의 팬들처럼 반응할지도 모릅니다. 이 영화에서 [올드보이]의 자극을 기대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 더 나아갈 수 있었을 겁니다. 영화가 백선생을 묘사하는 방식을 예로 들어보죠. 그를 설명 필요 없는 단순한 악당으로 그린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백선생과 금자씨의 대결이 아니라 금자씨의 캐릭터와 행동이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선생에겐 조금 더 무게를 부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복수라는 행위가 의미를 가지려면 우리가 어느 정도 그 대상에게 감정을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죠. 백선생은 끔찍한 악당이지만 관객들은 그에게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의 악행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보들은 대부분 간접지식에 불과하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우리가 이 영화의 결말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가 비교적 약한 악당이기 때문에 복수 이전의 위기가 약해지기도 했고요. 지나치게 뻔한 말처럼 들리지만 후반부의 결말이 제대로 뜨기 위해서는 금자씨가 조금 더 고생을 해야 했고 노력도 어느 정도 더 투여해야 했습니다.

비교적 손쉽게 흘러가는 이야기보다 금자씨의 캐릭터가 더 재미있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비교하자면 금자씨는 [아는 여자]의 한이연과 같은 존재입니다. 한 남성감독이 좋아하는 여성배우의 기존 이미지를 영화에 맞게 고쳐 재활용한 것이죠. 단지 장진이 이나영의 기존 이미지와 캐릭터들을 본 모습 그대로 사용했다면, 박찬욱은 이영애의 이미지를 아이러니컬한 방식으로 뒤집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이영애의 목소리나 제스처는 우리가 텔레비전 광고에서 익숙한 바로 그 모습입니다. 조용하고 차분하며 친절하고 예쁩니다. 하지만 이영애가 연기한 금자씨는 결코 보기처럼 안전한 인물이 아니죠. 금자씨는 친절하지만 오히려 백선생보다 훨씬 의지가 강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한줌의 의심도 없으며 잔인한 인물입니다. 금자씨의 예쁘고 사랑스러운 행동과 외모는 위장일뿐만 아니라 그런 잔인한 행동을 성사시키기 위한 도구이기도 합니다. 둘은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일부인 것입니다.

여기서 이영애의 연기는 아주 큰 역할을 합니다. 원래 고두심을 염두에 두고 있다가 투자자들의 반대 때문에 이영애를 선택했다고 어디선가 들었는데, 고두심이 이 역할을 했다면 (물론 잘 했겠지만) 지금의 독특한 분위기는 나지 않았을 겁니다. 이영애는 결코 연기의 디테일이나 어휘가 풍부한 배우는 아닙니다. 이 영화에서도 어제 먹은 라면가락까지 다 보여주는 최민식식 연기는 보여주지 않죠. 하지만 내면을 비교적 적게 보여주고 그 위를 깔끔하고 인공적인 가식과 위장으로 덮는 이영애의 연기 스타일은 아주 독특한 감촉의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를 만들어냅니다. 이런 식의 연기는 금자씨의 그 가차없는 심판관의 이미지나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일단 저지르고 보는 독특한 행동과도 일치합니다. 게다가 이런 식의 깔끔한 연기 때문에 후반부에 딱 한 번 등장하는 금자씨의 (흉악하게) 일그러진 얼굴이 더 강렬하게 느껴지기도 하죠. 이영애의 이런 모습은 여러분도 처음 봤을 걸요.

물론 우린 금자씨에게 백 퍼센트 감정이입하지는 못합니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금자씨를 흥미롭게 관찰하거나 사랑하거나 심지어 존경할 수도 있겠지만 그 캐릭터에 자신을 묻지는 못할 거예요. 금자씨 캐릭터의 비중이 커질수록 금자씨와 '일반인' 사이의 간격은 더 넓어집니다. 그 의도가 무엇이건 영화는 금자씨의 내면을 꿰뚫지는 못합니다. 그럴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토론해볼 수도 있겠지만요. 단지 전 이런 묘사가 완벽하게 여자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못하는 이성애자 남성감독의 한계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점만 덧붙이기로 하겠습니다.

금자씨의 묘사는 필연적인 블랙 코미디로 연결됩니다. 금자씨는 결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별다른 고민없이 할 수 있는 사람인데, 그런 행동은 당연히 비정상성으로 연결되고 비정상성은 코미디와 연결되기 때문이지요. 이 영화의 코미디는 앞의 두 영화들보다 훨씬 강합니다. 김세원의 구닥다리 라디오 드라마식 나레이션이나 노골적으로 키치적인 면을 강조한 효과들만 봐도 그렇죠. 영화의 농담은 종종 삼부작 자신과 그에 대한 기대를 노리기도 합니다. '이금자 영화를 만들겠다고 선언한 몰지각한 감독'을 놀려대는 나레이션은 그중 가장 노골적이죠. 금자씨의 새끼 손가락을 싹뚝 잘랐다가 다시 얌전하게 붙여놓는 것도 신체절단을 남발했던 전작들에 대한 농담처럼 보입니다.

이번에도 금자씨

그러나 이 모든 농담들에도 불구하고 후반부의 밋밋함은 상쇄되기 어렵습니다. 영화는 이 장면의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잔인무도한 농담들을 굉장히 많이 투여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반부의 클라이맥스는 여전히 지나치게 '공식적'으로 보입니다. 결국 개념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이런 이야기에서 사람이 많아지면 통제하기가 어렵죠. 아무리 예절을 가장한 잔인함으로 양념을 한다고 해도요. 뒤렌마트의 방식, 특히 [노부인의 방문]의 길을 따랐다면 결과가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친절한 금자씨]는 독립된 작품일까요? 글쎄요. 이 작품은 독립적으로 볼 때와 삼부작의 일부로 볼 때 의미가 조금씩 다릅니다. 삼부작의 일부로 볼 때, 이 작품의 결말엔 위로와 안정의 기능이 추가됩니다. "괜히 인간성 나쁜 감독을 만나 쓸데없이 죽고 죽이며 고통받았던 중생들아, 이젠 모든 과거를 묻고 편하게 쉬렴" 정도의 작별인사 말이죠. 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감상이 방해되는 일도 일어납니다. 특히 이전 영화들에 출연했던 배우들을 거의 모두 끌어온 카메오 활용이 그래요. 강혜정과 윤진서 정도의 비중은 괜찮지만, 송강호나 신하균, 유지태의 비중있는 카메오는 이질감이 지나칩니다. 영화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보기 전에 저번 영화들과 연관성부터 따지게 되니까요. 느린 악장으로 끝나는 교향곡처럼 균형이 어색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이건 그냥 편견일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독립적인 영화로 보는 게 쓸데없는 기대나 연관성에 대한 불필요한 탐구를 줄일 수 있으니 더 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마 그건 감독이 바라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전 그런 자의식과 사전 계획 때문에 오히려 소재가 가진 가능성을 어느 정도 날려버린 건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고 있습니다만. 하긴 3부작의 마지막 영화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말입니다. (05/07/19)

DJUNA

기타등등

지금 당장 [Cessate, Omai Cessate]를 들어야겠습니다. 방을 뒤지면 안드레아스 숄이 부른 CD가 나올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