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 Pedro Almodóvar

주연
하비에르 카마라....베니그노
Javier Cámara....Benigno
다리오 그란디네티....마르코 줄로아가
Darío Grandinetti....Marco Zuloaga
레오노르 와틀링....알리시아
Leonor Watling....Alicia
로사리오 플로레스....리디아
Rosario Flores....Lydia
제랄딘 채플린....카테리나 빌로바
Geraldine Chaplin....Katerina Bilova
마리올라 푸엔테스....로사
Mariola Fuentes....Rosa
로베르토 알바레스....의사
Roberto Álvarez....Doctor
아돌포 페르난데스....니뇨 데 발렌시아
Adolfo Fernández....Niño de Valencia
펠레 마르티네스....알프레도
Fele Martínez....Alfredo
파스 베가....암파로
Paz Vega....Amparo
엘레나 아나냐....앙헬라
Elena Anaya....Angela
롤라 두에냐스....마틸데
Lola Dueñas....Matilde
아나 페르난데스....리디아의 언니
Ana Fernández....Lydia's Sister

베니그노와 알리시아

[그녀에게]의 주인공 베니그노와 마르코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다 어떤 여자들을 깊이 사랑하고 있지만 그들은 지금 모두 뇌사 상태죠. 베니그노가 사랑하는 알리시아는 교통 사고를 당한 발레리나이고 마르코의 애인 리디아는 경기중 사고를 당한 투우사입니다. 리디아를 따라 병원으로 들어왔던 마르코는 몇 년 동안 간호사로 일하며 알리시아를 보살피는 베니그노와 만납니다.

자연스럽게 동병상련이라는 표현이 떠오르고 실제로도 그럴싸하게 잘 들어맞는 말입니다만, 마르코와 베니그노의 입장은 아주 같지 않습니다. 마르코는 리디아의 뇌사 상태에 대해 어떤 특별한 환상 같은 건 없습니다. 사고 이후 그는 어쩔 수 없는 상실감과 결코 그가 그녀를 온전히 소유할 수 없음을 알게 된 뒤에 느끼는 좌절감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하지만 베니그노의 입장은 정반대입니다. 그는 알리시아와 제대로 사귀어 본 적도 없습니다. 아파트 창문으로 한동안 훔쳐보고 지갑을 주워준 뒤 잠시 대화를 나눈 게 전부죠. 그가 알리시아에 대해 알고 있는 건 무성 영화를 좋아하는 아름다운 발레리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겐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는 알리시아를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고 마사지를 해주고 발레나 무성 영화를 본 뒤 알리시아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마르코가 베니그노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도 그 차이점 때문입니다. 그를 고통과 슬픔 속에 던져넣은 상황 속에서 오히려 행복을 찾은 한 남자가 있으니 관심을 안 가질 수 있겠어요?

마르코는 베니그노의 조언을 따르고 그를 모방합니다. 하지만 그는 끝끝내 베니그노의 수준에 도달하지는 못합니다. 그러기엔 그가 너무나도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베니그노가 그처럼 만족해하는 애정 생활은 사실 허공에 세워진 혼자만의 환상입니다. 로맨틱하기 짝이 없지만 어쩔 수 없는 자위 행위지요. 마르코는 그렇게 환상을 끌어갈 수 없습니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은 알리시아와 같은 환상이 아니라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생하게 살아 숨쉬던 한 명의 여성이었으니까요.

그러나 마르코가 베니그노와 알리시아의 관계에서 완전히 풀려나온 건 아닙니다. 그에게 그들의 관계는 여전히 매혹적입니다. 베니그노의 알리시아에 대한 감정이 헛되고 공허하고 심지어 위험하기까지하다는 걸 인식한 뒤에도 말이에요. 베니그노가 정말로 위험한 선을 넘지 않는다면, 그가 그 옆에 서서 그의 행복을 나누어 가지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겠어요?

그 뒤로 영화는 베니그노의 맹목적인 로맨스와 마르코의 보다 현실적이고 서글픈 로맨스를 오가며 관능적이고 나른한 태피스트리를 짭니다. 어떻게 보면 여기서부터는 거의 분위기 게임이에요. 피나 바우쉬의 무용, 알베르토 이글레시아스와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의 음악과 같은 아름다운 예술작품들의 파편들이 축축하고 상당히 변태스러운 알모도바르 멜로드라마에 고급스러운 가을 분위기를 듬뿍 안겨주는 것이죠. 덕택에 그의 개성인 키치한 분위기가 많이 죽기도 합니다. 나중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무성 영화 [줄어든 연인]이 예외라면 예외일까요.

후반부에 들어서면 베니그노는 그 안전한 선을 넘습니다.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비극적으로 전개되는데, 스토리 전개상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알모도바르가 이 이야기를 다루면서 조금 덜 솔직한 것 같다는 거죠. 흐릿한 설명은 베니그노에게 필요 이상의 면죄부를 주려는 것 같아 보이기까지 해요.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이야기 주제가 특별히 덜 선명해지는 것도 아닐텐데 말입니다. 우린 원래부터 그가 그렇게까지 안전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 않았나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보다 현명하고 이성적인 인물인 마르코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고요. 그러나 그런 모호함 때문에 영화의 로맨틱하게 불쾌한 여운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메시지가 깨지는 것도 아니니 더 불평할 필요는 없겠지요.

비평가들은 [그녀에게]를 비교적 주류화된 알모도바르 영화로 보았고 아마도 그게 그렇게까지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그의 멜로드라마가 낡았거나 스타일이 쇠퇴했다고는 할 수 없어요. 그냥 나이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여전히 [그녀에게]는 감정적으로나 예술적으로 풍성한 작품이니 나쁜 일은 아니죠. (03/03/18)

DJUNA

기타등등

좋은 배우들의 앙상블 연기가 인상적인 영화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 개봉 이후 가장 많이 불려다니는 사람이 출연 시간 대부분을 침대에 누워있기만 했던 레오노르 와틀링인 걸 보면 영화라는 매체가 예쁘고 젊은 사람들에게 어쩔 수 없이 유리하구나...하는 생각이 안들 수가 없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