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제레미아 S. 체칙 Jeremiah S. Chechik

주연
우마 서먼....엠마 필
Uma Thurman....Emma Peel
레이프 파인즈....존 스티드
Ralph Fiennes....John Steed
숀 코너리....어거스트 드 윈터 경
Sean Connery....Sir August de Wynter
짐 브로드벤트....마더
Jim Broadbent....Mother
피오나 쇼....파더
Fiona Shaw....Father
아일린 앳킨스....앨리스
Eileen Atkins....Alice
존 우드....트럽쇼
John Wood....Trubshaw
패트릭 맥니....투명인간 존스
Patrick Macnee....Invisible Jones

1.

[어벤저]는 촬영에 들어가기 전부터 말이 많았습니다. 우선 캐스팅부터 문제였지요. 다이아나 릭과 패트릭 맥니가 창조해낸 고유의 이미지가 망가지는 걸 바라지 않았던 오리지널 [어벤저] 팬들은 우마 서먼과 레이프 파인즈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서먼의 캐스팅이 문제였어요. "우마 서먼이 캐스팅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 영화에 대한 흥미를 모두 잃어버렸어요." 어떤 [어벤저] 팬이 [어벤저] 뉴스 그룹에서 투덜거렸던 말입니다.

촬영이 시작된 뒤에도 나쁜 소문은 멎지 않았습니다. 배우들의 연기가 시원치 않다, 처음 편집본이 너무 불만족스러워서 재촬영에 들어갔다... 이미 인터넷에 뜬 돈 맥퍼슨의 스크립트를 흠잡는 사람들도 늘어갔습니다.

그러다 워너 브라더즈가 첫번째 관객 시사회를 가졌습니다. 언제나처럼 제작사는 시사회 관객들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그렇다고 소문이 새어나가지 않을 리가 없었습니다. [어벤저]가 문제가 있는 작품이라는 건 여기서부터 공식적인 사실이 되었지요. 감독인 제레미아 체칙은 아직 그 영화는 완성되지도 않았다고 매스컴에 떠들고 다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영화는 개봉도 되기 전에 '나쁜 영화'로 낙인 찍혔습니다.

개봉이 가까워지자 소문은 점점 고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어벤저]의 주연인 세 배우들 중 어느 누구도 공식 행사에 나오지 않았고 워너 브라더즈는 개봉 전 시사회를 열지 않았습니다. 후자는 분명 평론가들의 입을 막으려는 시도였으니 제작사 자신이 나쁜 영화라는 걸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었지요. 게다가 영화의 상영시간이 89분이라는군요! 첫번째 편집판에서 도대체 얼마나 잘려나갔길래 영화가 그렇게 짧은 걸까요?

예상대로 [어벤저]는 박스 오피스에서 참패했으며 다양한 악평의 세례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요새 제작사와 체칙은 서로 그게 상대편 잘못이라고 툴툴거리고 있는 모양입니다. 참으로 추한 꼴을 보이고 있어요.

2.

어제 아는 사람들과 함께 [어벤저]를 오붓하게 보았는데, 사실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잘된 영화는 결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이지메를 당할 영화도 아니라는 거죠. 재미없다고들 하지만 전 [어벤저]보다 재미없는 여름 영화도 많이 봤습니다. 예를 들어 [고질라]나 [인디펜던스 데이]같은 영화들 말입니다. 하긴 사전 분위기가 그렇게 나빴으니 웬만한 수준의 영화로는 악평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을 겁니다.

시간이 지나면 이 영화에 대한 평이 나아질까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있어요. 오리지널 [어벤저] 팬의 사랑을 받는 건 포기해야 할 것 같다는 거죠.

3.

영화 [어벤저]는 오리지널 [어벤저]와 얼마나 가까울까요? 흠, 한 번 세어 봅시다. '빰빰빠~빠바'하고 나오는 주제곡도 다시 쓰이고 있고, 엠마 필의 남편이 실종된 것도 같고, 마더와 같은 고정 캐릭터도 같고, 'Mrs. Peel, we're needed!'란 대사도 한 번 나오고(나오는 상황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텅 빈 시골 거리도 비슷하군요. 악당들에게 잘 잡히는 것으로 소문난 오리지널 엠마처럼 이번 엠마도 두 번 정도 잡히고 한 번 묶이고 (스트레이트 재킷까지 포함하면 두 번) 네 번 정도 정신을 잃는군요. 늘 깔끔을 떠는 스티드의 정장도 비슷하며, 악당들과 한판 승부가 끝난 뒤에 샴페인을 마시는 것도 오리지널과 같군요. '사랑의 미로'나 떼거리로 몰려다니는 수녀들처럼 재활용된 장면도 좀 있어요. 당연하지만 엠마는 여전히 착 달라붙는 캣수트를 입고 악당들을 두들겨 패고요.

하지만 이 영화의 베끼기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오리지널 [어벤저]의 핵심을 모조리 놓치고 있는 거죠. 영화는 단지 오리지널의 스타일만 모방할 뿐입니다. 물론 그 스타일이란 게 [어벤저]라는 시리즈의 가장 큰 덩어리 중 하나였으니까 그래도 꽤 건졌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놓친 게 너무 많습니다.

하나하나 열거해보죠. 우선 오리지널 [어벤저]가 시청자들을 끌었던 가장 큰 이유가 뭡니까? 그건 스티드와 엠마 필(또는 타라 킹이나 케시 게일)사이에 깔려 있던 미묘한 성적 긴장감이었습니다. 프랑스 프리미어의 필자는 그걸 '끝없이 이어지는 전희'라고 표현했는데 꽤 그럴 듯한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요새 멀더 + 스컬리의 관계와는 좀 다르지만 그래도 상당히 비슷한 성격의 정서가 이 시리즈의 긴장감을 유지시켜왔던 거죠.

그런데 이 영화에서 엠마와 스티드 사이에는 어떤 화학반응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상당한 농도의 키스 신까지 있는데 말이에요. 배우 탓일 수도 있고 연출 탓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전형적인 미국식 블록버스터로 끌어가려는 제작진에 밀린 결과일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역시 각본에 있습니다. 일단 이런 각색이 쉬운 게 아니라는 것부터 인정하고 넘어가야겠습니다. 오리지널 티비 시리즈에는 엠마 필과 존 스티드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끌어갈 충분한 시간이 있었지요. 그런데 영화는 한 시간 반 동안 몇 시즌 동안 티비 시리즈가 해왔던 것을 뚝딱 해치워야 하는 겁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충 넘어가도 될 일은 더더욱 아니죠. 이런 작업에는 보통 영화의 각본보다 몇 배나 공이 더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맥퍼슨은 안이하기 짝이 없어요. 영화 속에서 스티드와 엠마는 그냥 같이 있기만 하니까요.

게다가 오리지널이 가지고 있던 유머 감각도 충분히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오리지날 [어벤저]의 유머는 단순한 말장난이 아닌 작품 전체의 핵심이었습니다. 사실 매 에피소드가 커다란 '삼가 말하기'의 농담이었던 셈이죠. 하지만 이 영화의 유머는 자잘한 말장난에서 멈출 뿐이에요. 게다가 그 농담마저도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지요!

그렇게 되니 [어벤저] 시리즈를 독창적으로 만들었던 많은 아이디어들도 영화 속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그 아이디어들은 대부분 매우 영국적인 [어벤저]식 유머와 결합되어 있었으니까요. 영화 [어벤저]는 날씨를 조절하려는 황당한 악당 어거스트 드 윈터를 등장시키긴 했지만 그는 단지 황당하기만 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007 영화와 다를 게 뭐가 있나요.

물론 이런 반응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어벤저]팬들이 불만이더라도 그게 꼭 그렇게 대단한 것인가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30년도 더 묵은 구닥다리 시리즈를 기억할까요? 영화는 영화 자체로 좋으면 되지 않을까요?"

말은 쉽죠. 하지만 원작을 따라가면서도 그 핵심을 놓쳤다면 그 새로운 각색물은 아무 것도 손에 잡은 게 없는 셈입니다. 바로 이 [어벤저] 영화처럼요. 영화는 미국식 블록버스터와 옛날 티비 시리즈 사이에 끼어서 아무 것도 아닌 작품이 되어버리고 말았으니까요.

4.

저희는 우마 서먼과 레이프 파인즈 모두 좋아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둘 다 살짝 어긋나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오리지널 엠마 필과 스티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가장 큰 약점이지요.

일단 우마 서먼은 여기서도 보기 참 좋습니다. 몸매가 따라주니까 그 불평등하기 짝이 없는 옷인 캣수트를 입어도 어울리고요. 하긴 요새 배우들 중 서먼만큼 캣수트가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까요.

하지만 서먼 특유의 멍한 분위기는 다이아나 릭의 엠마와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저희들 기억에 따르면 릭은 언제나 행동과 표정이 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정신을 잃고 의자에 묶이는 동안에도 옆의 악당들보다 더 또릿또릿해 보였지요. 릭의 엠마는 언제나 주변 상황과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가 엠마의 성격과 유머를 쌓아올렸습니다. 이 점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유머는 자기를 제어하는 사람의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서먼의 엠마는 여전히 서먼 특유의 멍함을 유지합니다. 특히 드 윈터 경의 미로 속에서 반쯤 정신을 잃고 방황하는 장면을 보세요. 매우 서먼다운 장면이지만 그만큼 오리지널과 떨어져 있고 그 때문에 캐릭터의 성격까지 무너지고 말지요.

레이프 파인즈는 스티드의 정장이 어울리지만 너무 젊습니다. 그래서 스티드 특유의 진중한 분위기가 없고 우아한 유머감각도 떨어집니다. 특히 드 윈터와 대결하는 부분은 너무 심각해서 맥이 빠질 지경입니다.

숀 코너리는 언제나처럼 폼을 잘 잡지만, 드 윈터는 그렇게 강렬한 인물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의 폼은 캐릭터와 따로 놀고 마는데, 그 때문인지 그의 악역은 좀 피곤해보입니다.

오히려 완벽한 연기를 보여주는 사람들은 조연들입니다. 마더 역의 짐 브로드벤트는 언제나처럼 재미있습니다. 에일린 애트킨즈(제가 좋아하는 배우 중 한 명입니다. :->)는 앨리스로 등장해서 흥미진진한 몇몇 장면들을 선보입니다. 피오나 쇼의 파더 연기도 재미있지만... 흠... 영화판이 여자를 두 명이나 죽인다는 걸 알았다면 클레멘스는 뭐랬을까요?

참, 오리지널 스티드였던 패트릭 맥니가 투명인간 존스로 나와 잠시 목소리를 빌려줍니다. 맥니의 최근 모습을 보고 싶었던 분들은 실망하셨겠군요 (하긴 정 보고 싶다면 오아시스 뮤직 비디오를 틀면 되니까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5.

영화의 가장 훌륭한 부분은 스타일입니다. 60년대가 끝없이 연장된 90년대의 영국은 꽤 재미있고 매우 [어벤저]답습니다. 텔레비전 시리즈 [어벤저]는 단 한번도 이렇게 삐까뻔쩍해 본 적이 없으니 한 번쯤 이런 모습이 나와도 나쁠 건 없었을 겁니다.

어떻게 했으면 나았을까요? 아마 미국식 블록버스터가 되는 걸 포기하고 보다 저예산의 초현실주의적인 코미디를 만들었다면 나았겠지요. 영화 대신 새 티비 시리즈를 만드는 것도 또 다른 방법이었겠고요. 영화를 그대로 만들었어도 캐스팅에도 더 운이 따랐을 수도 있죠. 지금 생각해보면 엠마 역 후보로 오른 사람들 중 기네스 팰트로가 가장 오리지널에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브래드 피트와 조금만 더 일찍 헤어졌다면 정말로 가능했을지도 모를 캐스팅이었지요.

그러나 그대로 내버려두는 게 가장 나은 길이었을 겁니다. [어벤저]는 비틀즈나 트위기처럼 60년대라는 시대에서 떼어낼 수 없는 작품이니까요. 꼭 꺼내서 다시 업데이트시킬 필요없이 그대로 즐기는 편이 가장 나을지도 모르죠. (98/10/09)

D&P

기타등등

오리지널 [어벤저]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타등등란에서 한 번 다루어 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