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빈센트 미넬리 Vincente Minnelli

주연
프레드 아스테어....토니 헌터
Fred Astaire....Tony Hunter
시드 셰리스....가브리엘 제라드
Cyd Charisse....Gabrielle Gerard
오스카 레반트....레스터 마튼
Oscar Levant....Lester Marton
나네트 파브레이....릴리 마튼
Nanette Fabray....Lily Marton
잭 부캐넌....제프리 코르도바
Jack Buchanan....Jeffrey Cordova
제임스 미첼....폴 버드
James Mitchell....Paul Byrd
로버트 가이스트....할 벤튼
Robert Gist....Hal Benton

1.

왕년엔 날리던 헐리웃 뮤지컬 스타였지만 지금은 다 잊혀져 가는 한물 간 배우 토니 헌터는 친구인 릴리와 레스터 마튼 부부가 각본을 쓴 새 뮤지컬 출연으로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해 뉴욕으로 옵니다. 하지만 소박한 오락거리로 출발했던 계획은 지나치게 야심찬 연출가 제프리 코르도바에 의해 현대판 파우스트의 거창한 이야기로 다시 태어나지요.

그 뒤로 모든 것이 꼬이기 시작합니다. 터무니 없이 짧은 리허설 기간, 작동않는 무대 장치, 엉겁결에 메소드 연기까지 해치워야 하는 고통, 댄스 파트너인 가브리엘 제라드와의 신경전...

그러나 리허설이 얼마나 엉망이건 쇼는 시작되어야 합니다. 드디어 그들의 자랑스러운 뮤지컬 [악대차 The Band Wagon]의 막이 오르고...

2.

[악대차]의 스토리는 이상할 정도로 [사랑은 비를 타고]와 비슷합니다. 당연하죠. 모두 베티 콤든과 아돌프 그린의 각본이니까요.

사실 이 두 영화는 거의 같은 이야기를 무대와 시대만 살짝 옮겨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유사점은 더욱 많이 눈에 들어오지요. [사랑은 비를 타고]가 유행에 뒤진 무성 영화 배우가 토키 영화로 새 길을 모색하는 내용이라면, [악대차]는 한물간 헐리웃 뮤지컬 배우가 브로드웨이에서 새 길을 모색하는 내용입니다. [사랑은 비를 타고]에서 첫 시사회 결과가 개판이 된 것처럼, [악대차]의 첫 공연도 그만큼이나 엉망입니다. [사랑은 비를 타고]에 도널드 오코너가 있다면 [악대차]에는 오스카 레반트와 나네트 파브레이가 있고요. [사랑은 비를 타고]에 [브로드웨이 멜로디] 발레가 있다면 [악대차]는 [걸 헌트] 발레가 있습니다. 모두 시드 셰리스가 주연 무용수고요.

그러나 두 영화의 진짜 연관점은 콤든과 그린 콤비 특유의 터치입니다. 엄청나게 바보스러운 내용과 톡톡 튀는 대사의 결합, 옛날 가요집의 노래를 얼기설기 엮어서 스토리 사이에 삽입하는, 그 반쯤은 교활하고 반쯤은 태평스러운 수법... 정말 귀엽다고밖에 할 수 없죠.

어느 쪽에 더 점수를 주어야 할까요? 많이들 [사랑은 비를 타고]에 더 점수를 줄 겁니다. 훨씬 스토리가 박진감 넘치고 인상적인 음악도 많으며 캐릭터도 더 흥미진진하니까요. 그러나 [악대차]도 결코 만만한 영화는 아닙니다.

3.

[악대차]의 스토리가 지독하게 바보스럽다는 건 이미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콤든과 그린 콤비의 각본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상관하지 않을 거예요. 작가들 자신도 신경 쓰지 않았을 텐데요, 뭐. 그들은 [악대차]의 마튼 부부가 그랬던 것처럼 그냥 흥겨운 오락거리를 만들고 싶었을 뿐입니다. 스토리의 바보스러움은 상관없었어요. 그들은 멋진 음악을 풀고 통통튀는 재치와 활력을 과시할 공간만 마련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바보스러운 스토리에도 진실은 숨어 있습니다. 우선 프레드 아스테어는 정말로 당시 토니 헌터와 같은 슬럼프에 빠져 있었지요. 영화 [악대차]는 연극 [악대차]가 토니 헌터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스테어의 커리어를 구조해주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영화의 백스테이지 느낌도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50년대는 문화적 체질 변화가 이루어지던 시절이었습니다. 클래식 헐리웃 시대는 서서히 종말을 고하고 있었고, 보다 복잡하게 머리를 돌리는 새로운 세대가 세상에 비집어나오고 있었지요. 코르도바의 '현대판 파우스트'는 한 편의 코미디지만, 그보다 노골적이지는 않아도 그만큼이나 어설픈 수많은 시도들이 당시엔 많았을 겁니다. [악대차]는 이런 가짜 예술지상주의에 대한 옛 엔터테이너들의 소박한 항변이었던 거죠.

정말 소박한 항변입니다. 이들이 하는 이야기는 '우린 우리 주제에 맞는 걸 만들겠다'에 불과하니까요. 그러나 이 영화에선 그게 먹힙니다. '주제에 맞는 것'이 이처럼 근사한데 어떻게 대꾸하겠어요.

4.

[악대차]는 MGM 뮤지컬 역사를 장식하는 휘황찬란한 순간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들 중 가장 유명한 건 역시 [The Girl Hunt]겠지요. 프레드 아스테어가 하드보일드 사립탐정으로, 시드 셰리스가 순진한 금발머리와 유혹적인 흑발의 팜므 파탈의 일인 이역을 해내는 이 긴 발레는 분명 볼 가치가 있습니다. 이 발레가 해치우는 화려한 문학적/영화적 패러디 때문에 특히 전문가들의 흥미를 끄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Dancing in the Dark]의 이인무가 더 좋습니다. [The Girl Hunt]가 화려한 외양과 다양한 의미로 꾸며진 복잡한 작품이라면 [Dancing in the Dark]는 뛰어난 두 무용수들의 추상적인 동작들만으로 이루어진 수정처럼 순수한 작품입니다. 그 순수성 때문에 아스테어와 셰리스 콤비의 빛나는 재능이 더 쉽게 눈에 들어오기도 하고요.

무용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면 [That's Entertainment]는 어떻습니까? 이 유쾌한 노래는 헐리웃 뮤지컬과 쇼 비즈니스에 대한 가장 멋진 예찬입니다. 실제로 이 노래는 유명한 MGM 뮤지컬 걸작선 시리즈의 제목으로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배꼽잡으며 웃고 싶다면 [Triplets]이 있습니다. 아스테어와 부캐넌, 파브레이가 갓난아기 세 쌍둥이로 나오는 이 말도 안되는 신은 헐리웃이 만든 가장 어처구니 없이 웃기는 장면 중 하나일 겁니다.

5.

아스테어는 말론 브랜도나 폴 뉴먼이 그랬던 것과 같은 의미로 훌륭한 배우는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의 진가는 영화에서 토니 헌터가 주장했던 것처럼 춤추고 노래하는 연예인이라는 데에 있었지요. 그런 면에서 그는 이 영화에서도 빛이 납니다.

그의 '못하는 연기'가 적절하게 삽입되는 장면도 있습니다. 특히 리허설 도중 코르도바가 그에게 메소드 연기를 시키는 장면을 보세요. 자지러집니다. :-)

시드 셰리스는 아스테어보다도 훨씬 좁은 부분에서 빛을 발휘하는 사람입니다. 셰리스는 배우라기보다는 댄서였지요. 셰리스는 데비 레이놀즈가 그랬던 것처럼 댄스와 노래, 코미디 연기를 패키지로 묶어 몽땅 능숙하게 처리하지는 못합니다. 아마 그래서 나네트 파브레이가 그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동원되었겠지만요.

그러나 셰리스는 훌륭한 댄서입니다. 셰리스가 일단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진짜 전문가의 본때를 보여주는 거죠. 그리고 [The Girl Hunt]에서 셰리스는 '댄서'로서 아주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코르도바 역의 부캐넌은 흥겨운 오버액션 코미디와 단아한 실크햇+연미복 식 뮤지컬 모두를 한꺼번에 해냅니다. 파브레이와 레반트는 좋은 콤비고요. 특히 주연 여자 배우의 빈 자리를 적절히 보충해주는 파브레이는 멋집니다.

참, 영화 초반에 정말 뜻밖의 카메오가 한 명 나온답니다. 누군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만.

6.

[악대차]는 MGM 뮤지컬의 전성기의 종막을 장식하는 영화였습니다. 그 뒤에 좋은 뮤지컬 영화가 안나왔다는 것은 아니지만,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나 [사운드 오브 뮤직]과 같은 브로드웨이 뮤지컬 각색물과 [악대차]나 [비는 사랑을 타고]와 같은 클래식 헐리웃 시대의 오리지널 뮤지컬은 결코 같은 부류의 영화들이 아닙니다. (99/11/29)

DJUNA

기타등등

토니 헌터가 장터로 변한 42번가를 보고 한탄하는 장면이 나오지요. 그가 30년 뒤를 미리 볼 수 있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