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카엔체 노부 Khyentse Norbu

주연
잠양 로드로....오기엔
Jamyang Lodro....Orgyen
오기엔 톱기엘....게코 스님
Orgyen Tobgyal....Geko
네탄 초클링....로도
Neten Chokling....Lodo
라마 촌저....큰스님
Lama Chonjor....Abbot
쿤장 니마....팔덴
Kunsang Nyima....Palden
페마 선덥....니마
Pema Tshundup....Nyima
고두 라마....라마
Godu Lama....Old Lama

(결말까지 다 보이는 이야기지만 그래도 자잘한 스포일러가 조금씩 있습니다.)

카엔체 노부의 [컵]은 정말 이상한 부모들을 두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국적은 부탄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작은 불교 국가지요. 텔레비전과 같은 문명의 이기도 극히 최근까지는 들어오지 않았던 곳입니다. 그런 나라에서 만든 최초의 영화인 거죠. 이 영화는 티벳어로 만들어진 최초의 장편 영화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의 감독과 각본을 담당한 카엔체 노부는 더욱 희귀한 종입니다. 그는 환생 라마이고 티벳 불교 4대 혈통의 주요 지도자입니다.

농담 같은 이야기지만 진짜입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이 괴상한 커플이 만들어낸 영화가 심오하고 지루한 종교적인 교훈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컵]은 바람에 날릴 듯 가볍고 따뜻하며 정말 재미있는 코미디입니다.

[컵]은 부모들만큼이나 괴상한 소재 결합을 다루고 있습니다. 무대는 인도에 있는 티벳 망명자들의 정착촌에 위치한 절입니다.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참 심각한 도입부죠? 중국의 티벳 탄압은 점점 거세져 가고,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탈출해 이곳까지 흘러들어옵니다. 반대로 오랜 망명생활로 찌든 큰스님은 그 괴로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고요.

하지만 우리의 12살짜리 주인공 오기엔에겐 그런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월드컵이지요! 이 영화는 월드컵의 열기가 한창 절정에 오른 1998년 7월의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액션 역시 축구 경기 관람입니다. 오기엔과 친구들은 큰스님 몰래 빠져나가 마을에서 축구 경기를 구경하고, 결승전이 임박하자 친구 시계까지 전당잡히면서 빌려온 텔레비전을 절로 끌고 옵니다.

이 영화의 코미디는, 마땅히 엄숙하기만 해야 할 것 같은 불교 승려들이 축구에 미쳐서 온갖 유치한 짓을 다한다는 설정에서 나옵니다. 우습지만 무척 진실에 가까운 것이기도 하죠. 승복을 입었다고 해서 피가 끓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아니잖아요? 절은 사람 사는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인간의 약점과 집착이 부글거리는 곳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그걸 이 영화보다 훨씬 덜 즐거운 이유로 잘 알고 있지만 말입니다.

카엔체 노부는 이 결점투성이 인간들의 집단을 애정을 가득 담은 따뜻한 시선으로 유쾌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절의 사방에는 파라과이나 미국, 독일팀을 응원하는 낙서들이 가득하고, 따분한 종교 행사 때 아이들은 꾸벅꾸벅 졸거나 종이를 찢어 학을 만듭니다. 프랑스와 브라질의 결승전을 보기 위해 절의 스님들의 벌이는 필사적인 발버둥에는 엄숙함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습니다. 협박, 사기, 도박, 갈취까지 정말 모든 게 다 나온답니다.

그러나 카엔체 노부는 이 영화를 가벼운 원 조크 코미디로 끌고 가지는 않습니다. 사실 원조크처럼 보이는 부분도 그렇지는 않아요. 이 영화의 다른 묘사와 마찬가지로, 축구팬 스님이라는 설정은 코미디를 위해 지어낸 것이 아니라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카엔체 노부에 따르면 이 영화에서 일어난 사건의 95퍼센트는 실화랍니다. 그 양반 말에 따르면 그가 자라면서 만난 승려들은 모두 축구에 매료되어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 때문에 이 영화의 보다 심각한 요소들도 축구팬 스님이라는 농담 속에 참 자연스럽게 섞입니다. 주제 역시 그와 함께 자연스럽게 성장하고요. 오기엔이 월드컵 결승전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축구는 문화 충격과 세대차, 나라 잃은 민족의 서글픈 운명에 대해서 허울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습니다.

영화가 내미는 결론 역시 온화하며 선량하며 우리가 '지혜'라고 부르는 어떤 것을 품고 있습니다. 온갖 노력 끝에 절로 텔레비전을 끌고 온 오기엔이 니마의 시계를 찾기 위해 축구 경기를 '포기하는' 희생을 할 때, 우리는 오기엔이 정신없는 해프닝 속에서도 작은 정신적 도약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문화 충격 역시 큰스님과 게코 스님의 현명한 선택으로 조심스럽게 해결됩니다. 이 유쾌한 해프닝으로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문화적 정체성을 잃을까봐 걱정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놓는 옛 문화의 불안하면서도 희망찬 제스처니까요.

심지어 중국의 티벳 탄압에 대한 정치적 선언도 아이러니칼할 정도로 예의바릅니다. 이 영화의 결론에서 카엔체 노부는 '중국은 아직도 티벳을 탄압하고 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대신 선택한 문장은 '중국은 아직도 티벳에 쌀을 보내주고 있다'입니다. 저같은 사람은 꿈도 못꾸는 관대한 유머지요. 카엔체 노부는 정말 트인 사람인 모양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종교인의 작품이라고 해서 특별히 심각한 작품을 기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컵]은 어렵지도 않고 특별히 심각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그게 이 영화의 장점이지요. [컵]의 다정한 유머에는 이 꿀꿀한 세상에서 온갖 앙집과 증오를 품고 사는 사람들은 상상도 못하는 간촐한 현명함이 있습니다. 이 영화는 땅에 가죽을 덮으려고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현명한 다른 길을 제시해 줍니다. 아무런 강요 없이, 즐겁고 부담없는 농담까지 섞어 가면서요. (00/03/09)

DJUNA

기타등등

그래도 영화 감독이 된 환생 라마가 참 이상해보이는 건 사실이죠. 자기 자신도 '부적절한 환생'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지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