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정용기

주연
임은경....미나
김유미....해미
심형탁....태승
옥지영....영하
천호진....최관장
김보영....임작가
임형준....정기
이가영....선영
정유미....미호




(스포일러가 있긴 있어요. 영화 보기 전에도 눈치챌 수 있는 거지만.)

해미

파프리카 구체관절인형 애호가들이 [인형사]의 제작과정을 다소 신경질적으로 바라봤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습니다. 최근 매스컴이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정말 좀 그랬잖아요. 아직도 대부분의 '분석'은 이런 식으로 흘러가요. 다 큰 어른들이 엄청나게 비싼 인형을 가지고 논다. 따라서 걔들은 일종의 정신질환자거나 기분나쁜 사회부적응자들이다.

정말 따분하다면 따분한 게, 이런 '분석들'이란 대부분 이중의 고정관념이 만들어낸 굉장히 게으른 기계적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는 '어른들에겐 어른들에게 어울리는 일들이 있고 거기서 벗어나면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네들이 책에서 주워읽은 몇몇 관념들의 안이한 결합으로 우주 전체가 설명될 수 있다는 낙천주의지요. 하암...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구체관절인형이 무섭다'라는 아이디어 자체도 안이하다면 안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을 흉내내는 모든 것들에겐 섬뜩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인정 안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건 원더우먼 액션피겨나 켈리 인형도 마찬가지예요. 모든 구체관절인형들이 자동적으로 무서운 분위기를 부여받는 건 아닙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체관절인형' 이상의 다른 조건이 필요해요.

[인형사]에서는 커스텀 하우스에서 제공한 AI(아이라고 읽는답니다) 구체관절인형들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 인형들이 사용된 방식을 보면 영화가 소재를 얼마나 쉽게 보고 있는지 알 수 있어요. 한마디로 말해 얘들은 그렇게 무섭지가 않거든요! 귀엽고 깜찍하다면 모를까. 게다가 얘들은 대부분 강한 기성품의 분위기를 부여받고 있기 때문에 영화의 스토리와 분위기와도 잘 어울리는 편은 아니었어요. 인터넷 상점에서 언제나 볼 수 있는 애들이 디폴트 의상을 입고 유리상자 안에 들어있는데, 도대체 뭐가 무섭고 뭐가 그로테스크하다는 거예요? 이건 마치 [바비의 검은 고양이]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 같아요. 처음부터 뭔가 아귀가 맞지 않았어요.

듀나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소재에 대해 꼭 밝아야 할 필요는 없죠.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발레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고 그들이 품고 있던 발레와 발레리나에 대한 이미지도 엉터리였지만 그들이 만든 [분홍신]은 여전히 불멸의 발레 영화입니다. 마찬가지로 구체관절인형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면서 구체관절인형을 소재로 한 흥미로운 호러영화를 만들 수도 있겠죠.

미나

파프리카 하지만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발레를 영화라는 매체에 완벽하게 전이시키는 방법은 알고 있었잖아요. 일급의 무용수들과 안무가들이 도와주었고요. 그리고 [분홍신]의 이야기가 아무리 사실성이 떨어져도 예술과 삶의 갈등이라는 주제는 보편성을 갖추고 있지요. 실제 발레리나들의 삶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이 영화를 그렇게 냉소적으로 볼 수는 없을 거예요.

하지만 [인형사]는 그냥 어색해요. 영화라는 건 소재에 친근한 사람들이 더 강하게 반응해야 하지 않나요? [인형사]는 반대예요. 구체관절인형에 익숙하면 익숙할수록 이야기와 설정에 진지하게 반응하기가 힘들어져요.

영화 중반에 나오는 '데미안의 죽음'이 대표적인 예에요. 인형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목이 잘리고 눈이 뽑힌 인형의 모습에 약간의 충격을 받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구체관절인형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그 광경은 당연한 생활의 일부 이상은 아니에요! 구체관절인형은 원래 조립품이에요. 인형의 '오너'라면 메이크업을 하고 텐션을 바꾸고 목욕을 시켜주고 눈을 바꾸기 위해 툭하면 인형을 해체하지요. 그들에게 그런 모습은 인형이 손상되었다는 느낌도 주지 못해요.

우레탄으로 복제한 바디들을 해체해서 쌓아놓고 맘에 안들어 도끼로 부순 실패작이라고 우기는 설정도 어이없답니다. 부수어야 한다면 원형을 부수어야 하지 않겠어요? 설마 메이크업이 맘에 안들어서 얼굴을 부수는 건 아니겠지요? 게다가 원래부터 마디마디가 따로 만들어진 애들을 부수는데 웬 도끼?

듀나 아무리 봐도 그 동네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아닌 것 같아요. 일단 그 사람들은 벌써 10여년 된 구체관절인형들을 가지고 있잖아요. 우리 세계보다 구체관절인형이 훨씬 먼저 유행했다는 증거죠. 게다가 구체관절인형을 애들 장난감으로 주는 사람들이 어디 있어요? 애들은 그런 걸 잘 가지고 놀지도 못한다고요.

파프리카 차라리 영화의 스토리에만 등장하는 특별한 디자인의 인형과 그 인형들의 역사를 따로 만드는 건 어땠을까요? 그게 낫지 않았겠어요? 그냥 구체관절인형이라고 내보내니 당황스럽잖아요.

영하

듀나 구체관절인형의 디테일보다 제가 더 어색하게 느꼈던 건 인형의 '심리묘사'였어요. 몇 십년 된 장난감들을 아직도 끼고 다니는 성격이라 전 이런 관계에 대해 상당히 자세히 알죠.

하지만 일단 줄거리부터 이야기해보기로 하죠. 영화는 전형적인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식 살인 이야기예요. 구체관절인형의 모델이 되기 위해 숲 속의 외진 미술관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수수께끼의 살인마에 의해 한 명씩 살해당한다는 거예요.

[인형사]는 두 인형들의 이야기에요. 첫번째 인형은 일제시대 때 어떤 한국인 조각가가 일본인 여자친구를 모델로 만든 실물 크기의 인형입니다. 여자친구가 죽자 조각가는 경찰과 군중들에게 린치를 당하고 그 동안 영혼이 깃든 인형은 복수를 결심하죠. 두번째 인형은 주인공 해미가 어렸을 때 버린 미나라는 인형으로 아직까지 옛 주인을 잊지 못하고 있어요. 이들을 인간 세계에 보내기 위해 영화는 '생령'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의 사랑이나 집착에 의해 생긴 영혼이 인간들의 생령, 그러니까 도플갱어처럼 돌아다니는 거예요.

영화의 기본 개념은 인간들의 사랑에 의해 영혼을 부여받았지만 외면당하거나 무시된 인형들의 처절한 짝사랑이에요. 이 주제 자체는 꽤 효과적인 멜로드라마의 기본이 될 수도 있고 시적일 수도 있어요. 개념 자체만 따진다면 말이죠.

하지만 관객들을 설득시키는 건 결코 쉽지 않아요. 우린 모두 인형들이 물건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어요. 물론 인형들을 끼고 사는 사람들은 가끔 그 유리 눈밑에 뭔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접하긴 해요. 그러나 그렇다고 인형들에게 인간과 같은 완벽한 인격을 줄 수는 없어요. 뭔가 설명이 더 필요하다는 거죠. 꼭 [사탄의 인형]식은 아니라고 해도요.

파프리카 영화에서는 영혼이 들어가는 인형을 만드는 특별한 능력이 있는 조각가를 등장시키지 않았나요?

듀나 그 개념이 무척 흐릿했죠. 지나가는 어투로 한 번 언급되었을 뿐이고요.

진짜 문제였던 건 버려진 인형과 주인간의 관계였어요. 영화를 보면 이 이야기를 쓴 사람이 둘 사이의 관계에 거의 무지하다는 걸 알 수 있어요. 현실 세계에서 인형과 주인의 관계는 철저하게 주인의 마인드 플레이에요. 만약 인형이 버림을 받고 자기를 버린 주인을 애타게 갈구한다면, 그건 인형만의 짝사랑일 수 없어요. 인형들은 혼자 살아날 수 없어요. 처음부터 동화처럼 철저하게 의인화된 인형을 등장시키지 않는 한, 마땅히 주인의 죄책감과 추억이 따라와야 해요. 그래야만 이야기는 설득력을 얻을 수 있어요. 초자연적 이야기라고 해서 현실의 기반이 무시되면 안된다는 거죠.

영하, 해미, 선영, 정기, 태승

파프리카 그렇다면 인형의 짝사랑이라는 설정이 망가지겠지요.

듀나 '생령' 아이디어를 살리려면 인형의 짝사랑만 가지고는 곤란하겠지요. 처음부터 태어나기도 어려울테니. 그 정도 관심으로 인형에게 생령이 깃들 정도라면 우리집은 장난감 생령 전문 호텔을 꾸려도 되겠네요. 게다가 미나보다 더 사랑을 받았던 데미안은 왜 생령이 없대요?

그런 면에서 해미는 결코 좋은 주인공이 못돼요. 물건에 집착하는 성격도 아니고 신비스러운 대상에 대해 매력도 느끼지 못하며 동정심도 없으니까요. 시골 처녀를 임신시키고 달아나는 부자집 아들같다고나 할까요? 이런 캐릭터들은 어떤 이야기에서도 주인공이 될 자격이 없어요. 주인공은 당연히 인형인 미나여야 하지요. 하지만 영화는 괜히 쓸데없는 미스터리를 만들고 상관도 없는 복수극에 시간을 낭비하느라 미나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지 못했어요. 결국 멜로드라마가 얇아질 수밖에요.

파프리카 정말 저도 해미를 보면서 화가 나더군요. 오래 전에 버린 유령이 아직까지 절 기억하고 있다면 감동해서라도 받아주겠네요. 미나에 대한 해미의 반응은 지나칠 정도로 차가워요.

듀나 호모포비아예요. 다 큰 여자 아이가 사랑한다면서 덤벼드니 겁부터 나는 거죠.

파프리카 진짜로 제가 궁금했던 건 기모노 인형과 미나가 언제 만나서 작당을 하기 시작했냐는 거예요. 다른 세계에 영혼있는 인형들만 따로 모이는 동창회라도 있는 걸까요?

듀나 도대체 왜 미나는 기모노 인형과 공범자가 되었대요? 전 정말 그걸 모르겠어요. 둘이 원하는 건 전혀 다르거든요. 기모노 인형이 미나에게 해미를 만나게 해주겠다고 했기 때문에? ("저 사람들을 모두 죽이면 옛 주인과 행복하게 함께 살게 해줄게...") 아뇨, 전 받아들일 수 없어요. [인형사]엔 전혀 상관없는 두 개의 다른 이야기들이 어색하게 결합되어 있어요.

파프리카 동기도 어색하지 않나요? 당사자들이 다 죽은 뒤에 아무 것도 모르는 후손들을 죽인다고 달라지는 게 뭐가 있나요? 차라리 윤회를 개입시켜 전생의 살인범들이라고 우기면 모를까.

듀나 어차피 다시 환생할 거라면 다시 죽여서 또 뭐하게요? 생각하면 할수록 복수는 까다로워요. 죽음을 최악의 형벌로 여기는 사람들이 종종 핵심을 놓치는 것도 그 때문이죠.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식으로 살육을 벌이는 것보다 더 좋은 해결책이 있었을 거예요. [인형사]는 장르나 소재를 너무 쉽게 보고 있어요.

미술관

파프리카 '아름답고 슬픈 호러 영화'를 만든다는 목표도 너무 안이하게 잡은 듯 해요. 이 말은 [장화, 홍련]을 벤치 마킹하겠다는 공공연한 선언이나 다름없었으니. 이 영화의 미술관은 [장화, 홍련]의 집을 탈색시키고 인형들을 집어넣은 곳 같더라고요.

듀나 그래도 일종의 성의는 느껴지더군요. [링] 대신 [장화, 홍련]을 벤치 마킹한 것만 해도 어디에요. 임은경이 긴 가발을 휘날리며 등장하긴 해도 이 영화엔 사다코가 '거의' 나오지 않더군요. 대단한 독창성은 느껴지지 않지만 꽝꽝거리는 쇼크 장면도 비교적 다양하게 주려고 노력하고 있고요. 전체적으로 그렇게 무서운 영화는 아니지만 몇몇 장면은 그럴싸해요. 후반부에 나오는 '고속 접근' 장면같은 건 예측가능하긴 해도 썩 잘 만들어졌지요.

파프리카 100명의 인형들이 진열장에서 튀어 나와 사람들을 공격하는 장면들은 결국 포기한 모양이네요? 기대하고 있었는데 아쉽군요.

듀나 김유미는 [폰]에서보다 자연스러워보이는데, 아마 역할이 조금 더 연기하기 편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하지만 캐릭터는 너무 밥맛이었어요.

파프리카 임은경은 딱이었어요. 이 사람은 정말 인형처럼 생겼잖아요. 알아요? 임은경은 자길 모델로 삼아 만든 세인트 미나보다 눈이 더 커요!

듀나 미나가 낑낑거리며 열심히 사람을 죽일 때는 정말 귀엽더라고요. 정말 옆에서 도와주고 싶었다니까.

인형에 푹 빠진 소설가 지망생 영하로 나오는 옥지영도 이미지와 잘 맞는 편이었어요. 임작가 역을 맡은 김보영은 훌륭한 악역이었고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모르겠어요. 태승 역의 심형탁은 충분한 개성을 보여줄 여유가 부족했고 사진작가 정기와 고등학생 선영을 연기한 임형준과 이가영의 지나치게 흥분된 연기는 분위기 창출에 별 도움을 주지 못한 것 같아요. 그리고 전 아직도 천호진과 장르 영화의 양식화된 캐릭터를 쉽게 연결시키지 못해요. 선입견 때문이겠지만.

파프리카 두 배우만 그런 게 아니라 후반 이후 영화 전체의 분위기가 필요이상으로 격앙되어 있지 않았나요?

부천 영화제 세트 전시회

듀나 [분신사바]에서도 그랬지만, 배우보다는 각본이나 연출 문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이 영화의 캐릭터들은 모두 '고립된 곳에 갇혀 한 명씩 살해당하기' 장르에 나오는 기성품들 같거든요. 등장인물들이 한 명씩 모여 자기 소개를 하는 장면만큼이나 인위적이에요. 이들을 꼭 입체적으로 묘사할 필요는 없지만 의무라도 되는 것처럼 이런 식의 공식화된 개성을 나누어줄 필요도 없었을 거예요.

전체적으로 [인형사]는 우직한 영화예요. 소재나 장르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고 독창성이나 개성도 모자라지만 다들 그냥 열심히 했죠. 정말 '하면 된다'라는 기합 소리가 사방에서 들리는 것 같군요. 열심히 한다고 해서 되는 장르가 아니라 문제지만요.

파프리카 인형들을 데리고 앞자리에 앉아 영화를 보던 오너들은 우레탄 바디 피스들이 불에 탈 때 비명을 질러대더군요. 저도 '오너'지만 그래도 인터넷 인형 애호가들이 조금 유난스러운 구석이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어요. :-)

듀나 아무리 현실을 무시하는 내용이라고 해도 인형 버리는 장면은 좀 황당하더군요. 정말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엄마가 비명을 질렀겠죠.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이게 몇 십만원 짜리인 줄 아니?"

파프리카 다른 집에 입양시키는 방법도 생각할 수 있을텐데... 하지만 처음부터 말도 안되는 설정이니까요.

듀나 아트 하우스 영화인 [거미숲]을 빼면 지금까지 벌써 네 편이나 되는 국산 장르 호러 영화들이 나왔는데, 지금까지의 결과는 참으로 참담하군요. 어떻게 2000년보다 더 실속이 없는 것 같아요. 전 순전히 사다코가 '상대적으로 적게' 나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형사]를 조금 관대한 태도로 보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가 앞에 나온 다른 세 편보다 정말로 나은 것도 아니거든요. 작년 최악의 호러 영화였던 [여고괴담 세 번째 이야기: 여우계단]을 넘어서는 영화가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다는 게 말이 되나요? 도대체 올해 호러 영화의 거품은 얼마나 큰 겁니까? (04/07/27)

D&P

기타등등

1. 커스텀 하우스의 공식 페이지로 가보세요.

2. '데미안의 죽음'에 대해 분명히 언급했으면서도 데미안의 생령이 없다고 투덜거렸군요. 몇몇 분들이 지적해주셨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