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장 엡스탱 Jean Epstein

주연
장 드뷔쿠르....로더릭 어셔
Jean Debucourt....Roderick Usher
마르그리트 강스....마들린 어셔
Marguerite Gance....Madeleine Usher
샤를르 라미....앨런
Charles Lamy....Allan
푸르네-고파르....의사
Fournez-Goffard....The doctor

마들린과 로더릭

에드가 앨런 포우의 작품들을 각색한 영화들의 문제점 중 하나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에드가 앨런 포우를 공포소설가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공포소설가'라는 딱지 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그가 훌륭한 공포 소설들을 썼고, 그 작품들이 후대 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으니까요. 포우가 이 장르에 끼친 영향을 생각해보면 '공포소설가'라는 딱지는 이런 작품들을 설명할 때 매우 유용합니다.

문제는 '공포소설가'가 아니라 '불과하다'에 있습니다. [검은 고양이]나 [어셔가의 몰락]이 공포 소설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들을 순전히 '공포 소설'의 장르적 특성에만 맞추어 생각한다면, 포우의 작품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특히 포우의 명성을 빌려 돈되는 영화를 만들려는 제작자들에게 '공포소설가에 불과한'이라는 딱지는 치명적입니다. 그 사람들은 툭하면 그들이 생각하는 '공포물'의 장르적 특성에 포우의 작품들을 밀어넣느라 원작의 시적 아름다움을 놓치기 십상이니까요.

그러고보면 포우의 영화 중 '포우'다운 작품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전 로저 코먼의 포우 영화들이 흥미진진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작품들은 포우의 음침한 시적 분위기와는 전혀 상관없죠. 조지 로메로, 다리오 아르젠토, 에드가 G. 울머에 이르는 수많은 감독들이 포우의 작품들을 원작으로 영화를 만들었고, 그들 중 몇몇은 아주 좋은 영화들이지만 정작 포우 작품의 생생한 느낌을 전달하는 영화들은 몇 없습니다.

오늘 소개할 장 엡스탱의 영화는 그 드문 예에 속하는 작품입니다. 28년도에 만들어진 이 프랑스 영화의 전체적 분위기는 그 어떤 영화들보다도 포우의 원작에 가깝습니다. 아마 프랑스 영화이기 때문에 더 충실했을지도 모르죠. 보들레르와 말라르메라는 훌륭한 소개자 덕택에 포우는 프랑스에서 더 대접을 받는 편이니까요.

줄거리만 본다면 이 영화는 그렇게까지 원작에 충실한 편이 아닙니다. 원작에서는 쌍둥이 남매였던 로더릭과 마들린은 이 영화에선 부부 사이입니다. 로더릭이 마들린의 초상화를 그리는 과정에서 마들린이 서서히 생명력을 잃어갔다는 [도리언 그레이] 식 설명이 추가되었고요. 나레이터가 싸구려 기사 소설을 읽는 동안 산 채로 묻힌 마들린이 관에서 빠져나온다는 기본 구성은 그대로지만, 결말은 원작의 비극보다는 [리지아]의 비틀린 환희 쪽에 더 가깝습니다.

중요한 건 줄거리가 아닙니다. 물론 엡스탱이 추가한 예술가와 대상 사이의 흡혈귀적 관계에 대한 이야기도 꽤 쓸만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진짜로 중요한 것은 이 간단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입니다.

우선 우리는 이 영화가 엄청나게 많은 영화적 기법을 동원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됩니다. 고속 촬영, 트래킹, 이중 노출... 당시에 존재했던 모든 테크닉을 다 동원한 듯한 이 영화의 이미지는 요새 MTV 세대들의 눈도 만족시킬만큼 다채롭고 현대적이며 세련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 왕년의 아방가르드 영화 감독이 전통적인 극영화 장르에 얼마나 많은 것을 가져올 수 있었는지 알게 되지요.

엡스탱의 테크닉은 단순히 눈만 만족시키는 수준이 아닙니다. 슬픈 눈을 껌뻑이는 마들린의 초상화에서부터 관속에 삐져나온 웨딩드레스의 베일이 바람에 펄럭이는 이미지까지, 영화는 포우의 불길한 시적 느낌을 완벽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당시 아방가르드 감독들이 그랬던 것처럼, 엡스탱은 스토리를 들려주는 대신 필름 조각으로 이어진 66분짜리 시를 썼고, 이 영화에서 그런 식의 전달법은 완벽하게 먹혔던 겁니다.

이런 분위기는 절정에 도달한 무성 영화 특유의 느낌에 의해 더욱 강조됩니다. 어두컴컴한 화면 속에서 소리도 나지 않는 종이 흔들리고, 발자국 소리도 없는 흐릿한 배우들이 유령처럼 저택을 돌아다닐 때, 영화의 음침한 아름다움은 더욱 도드라지니까요.

배우들의 연기 역시 인상적입니다. 어딘지 모르게 나이든 시절의 보들레르를 연상시키는 창백한 드뷔쿠르와 아벨 강스의 아내였던 마르그리트 강스의 침울한 연기는 포우의 분위기에 근사하게 맞고 또 전혀 낡아보이지도 않습니다.

과연 장 엡스탱의 이 작품이 공포 영화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만약 공포 영화라면 가장 아름다운 공포 영화 중 하나일 겁니다. (01/07/04)

DJUNA

기타등등

1. 이 영화의 조감독은 루이스 브뉘엘이었습니다. 하지만 엡스탱은 의견 불일치를 내세워 브뉘엘을 영화 중간에 해고해버렸죠. 그 이후에 브뉘엘이 살바도르 달리와 만든 영화가 [안달루시아의 개]라는군요.

2. 제가 가지고 있는 DVD 버전은 롤랑 드 캉데가 중세 음악을 편곡한 음악을 사용하고 있는데, 아주 잘 어울립니다. 프랑스어로 나오는 자막은 장 피에르 오몽이 영어로 번역해 읽어주고 있고요. 유감스럽게도 그의 불어 악센트가 조금 강해서 종종 알아듣는 게 힘이 들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