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데이빗 크로넨버그 David Cronenberg

주연
제프 골드블룸....세스 브런들
Jeff Goldblum....Seth Brundle
지나 데이비스....베로니카 콰이프
Geena Davis....Veronica Quaife
존 게츠....스태티스 보랜스
John Getz....Stathis Borans

브런들 플라이

원작보다 나은 리메이크는 없다고들 합니다만, 막연한 일반론들이 대부분 그렇듯, 이 역시 사실은 아닙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어요. [벤 허]나 [십계]같은 할리우드 히트작들도 리메이크잖아요. 가장 먼저 만드는 게 장땡이 아닙니다. 그 이야기를 제대로 풀 수 있는 기술이나 예술적 도구가 갖추어졌느냐가 중요하죠.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플라이]가 커트 뉴먼의 [플라이]보다 우월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뉴먼이 가지고 있었던 건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가진 투박한 단편과 요새는 [뽀뽀뽀]에도 못 써먹을 원시적인 파리 가면뿐이었지요. 하지만 크로넨버그에게는 훌륭한 특수효과 팀과 이야기를 통제하고 그 안에 성숙한 철학과 드라마를 집어넣을만한 개인적인 능력이 있었습니다.

물론 크로넨버그의 영화에서도 과학은 미심쩍은 구석이 많았습니다. 어렸을 때 곤충에 미쳐 있었던 크로넨버그는 오리지널 영화가 파리 인간을 다루는 방식을 보고 "말도 안 돼!"라고 고함을 질렀다던데, 저 역시 80년대 후반에 이 영화를 보면서 비슷하게 반응했지요. 전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곤충의 힘이 인간 사이즈에서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 정도 크기의 동물이 파리처럼 천장과 벽을 기어갈 수 없다는 것도 알았고요. 결정적으로 인간은 수억마리의 미생물들을 품고 있는 동물원이나 다름없는 존재인데, 파리 한 마리가 우연히 들어갔다고 그 유전자만 섞인다는 게 말이 됩니까?

영화가 과학을 다루는 철학적인 관점도 좀 수상쩍긴 합니다. 특히 브런들이 왜 컴퓨터가 살아있는 생명체를 제대로 전송하지 못하는지 알아내는 부분은요. 과학이 분석과 계산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고 말하는 건 좋습니다. 하지만 코드 몇 줄로 그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주장한다면 모든 걸 너무 쉽게 보고 있는 거죠.

그러나 정확한 과학만을 받아들인다면, SF는 존재할 수 없는 장르입니다. 그리고 과학이 좀 수상쩍긴 해도 [플라이]는 이전 영화보다 훨씬 발전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원작은 '신의 영역을 건드려서는 안돼!'라는 닳디닳은 메시지에 매달리고 있을 뿐이지만, 크로넨버그의 태도는 보다 폭이 넓었습니다. 그는 주인공 과학자 세스 브런들이 신의 영역을 건드려 파멸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를 비난할 생각도 없습니다. 단지 지독한 운명의 함정에 빠진 재능이 넘치고 영리한 남자의 파멸을 동정섞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죠.

[플라이]는 작은 영화입니다. 볼 때마다 이 영화의 간략함에 놀라요. 이 영화에서 이름이 불리우는 의미있는 등장인물들은 단 세 명입니다. 주인공인 과학자 세스 브런들, 중반 이후 여자친구가 되는 과학잡지 기자인 베로니카, 베로니카의 상사이며 옛 애인인 스태디스 보랜스. 무대 역시 브런들의 집과 베로니카의 아파트, 베로니카가 일하는 잡지사 사무실을 오갈 뿐이고요. 공간을 다루는 방식과 스케일만 따진다면 베리만 영화와 특별히 다를 것도 없어요. [플라이]는 특수효과가 나오는 실내극입니다.

게다가 영화는 짧고 빠릅니다. 1시간 30분을 간신히 넘기는 영화지만 효율적으로 압축된 스토리 전개 때문에 내용은 무척 풍성합니다. 놀라운 건 우리가 이런 장르 영화에서 기대하는 것 이상의 복잡한 인간드라마가 있다는 것이죠. 세스 브런들, 베로니카, 보랜스의 삼각관계는 예상 외로 입체적입니다. 어느 누구도 완벽한 선인이나 악인은 아니고 그들의 갈등은 어른스럽고 깊이 있습니다.

영화는 이 갈등을 주축으로 삼고 그 드라마를 강화시키는 데에 SF 도구를 사용합니다. 그 결과 영화는 신에 도전하다 추락한 미친 과학자를 다룬 신화에서 벗어나 보다 개인적인 영역으로 들어옵니다. 영화는 질투심에 사로잡혀 인생을 그르친 남자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불치병에 걸린 남자와 함께 고통받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일 수도 있으며, 너무나도 짧게 끝나버린 삶의 쾌락과 사랑에 대한 한탄일 수도 있습니다. 전 이 영화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카프카와 장자를 반쯤 섞은 듯한 브런들의 이 대사가 떠오르더군요. "I'm an insect who dreamt he was a man and loved it. But now the dream is over... and the insect is awake."

주제가 무엇이건 상관 없습니다.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어느 쪽으로도 효율적으로 먹히기 때문이죠. 당연히 우리가 가장 먼저 집중해야 할 건 인물간의 역학 관계와 그들이 겪는 사랑과 증오와 고통입니다. [플라이]는 작은 오페라와 같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자잘한 감정들이 그로테스크하고 아름답게 부풀어 올라 비현실적이지만 절절한 시적 표현으로 변형되는 것이죠. 그건 가짜 피와 고무 가면, 케이블로 조종되는 인형으로 구성된 아리아입니다.

크로넨버그는 관객들을 어떻게 움찔하게 만드는지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육체를 뒤집고 파괴하고 망가뜨리며 보는 사람의 신경을 자극하는 데 그를 능가하는 사람은 많지 않죠. 물론 자극의 정도야 능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죠. 진짜로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려면 파괴의 대상과 자극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그는 단순히 육체를 파괴하는 대신 그 파괴와 변형의 의미를 관객들에게 전달합니다. 웬만한 호러 영화의 도끼 난도질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의 손톱이 빠지는 장면이 더 끔찍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이 영화에 사용된 특수효과도 이상적입니다. 때를 참 잘 만났어요. 80년대식 애니매트로닉스 기술이 절정에 도달했을 때의 작품이니까요. 요새 같았다면 브런들 플라이 장면은 다 컴퓨터로 찍었겠죠. 더 세련되고 사실적으로 보일 수는 있어도 결코 이 영화의 고무 인형이 토해내는 강렬한 느낌은 기대할 수 없을 겁니다. [플라이]의 특수 효과는 거의 20세기 초 표현주의 회화와 같은 근사한 예술작품입니다.

물론 이 특수효과는 배우들, 특히 제프 골드블룸의 진지하면서도 괴상한 연기가 따라주지 않았다면 빛을 발하지 못했을 겁니다. 이 영화의 연기질은 은근히 좋습니다. 아마 이런 장르에서 관객들이 진지한 연기를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더 근사해 보이는 건지도 모르죠. 배우들의 태도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이들이 낙태나 삼각관계와 같은 드라마 재료와 거대한 돌연변이 파리 소동을 동격으로 취급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진지하고 심각합니다. 그 때문에 이 영화의 비극 주변을 정전기처럼 흐르는 신경질적인 블랙 유머도 더 잘 살아나요.

50년대에 만들어진 오리지널 영화와 마찬가지로, [플라이]도 비교적 열등한 속편을 낳았습니다. 지나 데이비스는 출연하지 않았지만 보랜스 역의 존 게츠는 잠시 나왔었죠. 전 속편들에 대해선 비교적 관대한 편이지만 이 영화에 대해서만은 예외입니다. 전 그런 식으로 이 세계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고 믿고 싶지 않군요. 그만큼 이 영화의 비극은 완벽한 자기 완결성을 띠고 있습니다. (06/11/14)

DJUNA

기타등등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출산 장면에서 산부인과 의사로 카메오 출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