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오영강 Yonggang Wu

주연
완령옥 Lingyu Ruan








(스포일러가 있지만 신경쓰지 마세요. 다들 예상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완령옥

오영강의 [신녀]가 세계 영화광들 사이에서 꼭 보아야 할 영화가 된 건 관금붕의 아름다운 전기영화 [완령옥] 때문이었습니다. 그 영화를 통해 완령옥은 영화사 관련 책들이 의무적으로 기록하는 짤막한 이름에서 살아 숨쉬는 비극적인 스타로 전환되었죠. 문제는 이 사람의 영화를 보기가 생각 외로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동시대에 활약했던 서구 영화계의 스타들과는 달리 완령옥의 영화들은 대부분 창고에 박혀 잊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90년대 말부터 창고 속에서 잠자던 [신녀]의 필름이 다시 나와 세계 영화광들에게 소개되기 시작한 것이죠. 우리나라엔 2000년에 한 중국영화제에서 상영되었습니다. 그 때 보신 분들도 많을 거예요.

[신녀]에서 완령옥이 연기한 주인공은 어린 아들과 함께 사는 상하이의 매춘부입니다. (제목에 사용된 '神女'는 당시 매춘부를 의미하는 단어였다고 하는군요.) 주인공은 어떻게든 아들에겐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려고 하지만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돈을 뜯어내는 건달과 사회적 편견은 이 딱한 미혼모를 가만히 두지를 않죠. 자신의 직업 때문에 아들이 학교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고 그나마 간신히 모아두었던 돈도 건달이 날려버리자 절망한 우리의 주인공은 그만 그 건달을 죽이고 12년 형을 선고 받습니다. 다행히도 주인공과 아들에게 관대한 거의 유일한 사람인 교장 선생님이 아들을 입양해주죠. 그리고 여기에 마지막 희생이 따릅니다. 아들을 세상의 편견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주인공은 아들과 인연을 끊습니다.

우린 이 모든 이야기에 굉장히 익숙합니다. 그만큼이나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지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하는 비극적인 여자 주인공의 이야기 말입니다. 이 경우에 그 사랑하는 사람은 주인공의 아들이고요. 주인공의 최종 목표가 아들의 교육이라는 건 이 멜로드라마의 동북 아시아적인 속성일 수도 있겠습니다.

[신녀]는 계몽적인 영화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영화의 주제를 대표하는 사람은 교장선생이죠. 아이를 쫓아내려는 학교의 임원들 앞에서 이 아저씨는 일장 연설을 합니다. 주인공을 매춘부로 만든 건 사회이고 아이에게 편견없는 기회를 주어야 하는 건 자신의 의무라고요. 이 노골적이고 분명한 주제가 먼저 만들어지고 그를 살리기 위해 영화가 다룬 전형적인 드라마가 뒤따랐던 게 분명합니다. 그게 오영강이 대표하던 당시 상하이 영화계의 정치적 분위기와 일치하기도 했고요.

오영강의 연출은 진부한 멜로드라마와 섬세한 사실주의 사이를 오갑니다. 주인공을 괴롭히는 기둥서방이나 주제 전달용 도구인 교장 선생과 같은 캐릭터들은 비교적 도식적으로 다루어집니다. 하지만 영화가 상하이의 밤거리나 학교의 재롱 잔치와 같은 구체적인 대상에 닿으면 설득력 있는 사실주의가 조용히 묻어나옵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중심은 오영강이 아니라 주연배우 완령옥입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배우의 스타 파워에 의해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완령옥은 아름답고 섬세하고 강렬하며 비극적인 카리스마가 넘칩니다. 영화가 끝날 무렵엔 이 배우의 다른 영화들을 갈구하게 될 정도죠.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 이 배우의 연기를 따라가는 건 조금 비현실적인 경험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얼굴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완령옥의 실제 모습은 장만옥과 전혀 다르죠. 전 장만옥보다는 가냘프고 창백한 조운 첸을 떠올렸습니다) 동양 배우가 글로리아 스완슨에게나 어울릴 법한 무성영화 스타의 광채를 발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신녀]는 완령옥의 영화 경력 말기를 장식하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찍은 다음 해에 이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요. 만약 살아남았다고 해도 당시에 누렸던 스타로서의 지위를 지킬 수 없었을 겁니다. 북경어에 능통하지 못했던 완령옥이 유성영화시대의 새 환경에 적응하기는 어려웠을테니까요. 어떻게 보면 지나칠 정도로 완벽한 퇴장이었던 셈이죠. :-/ (05/02/08)

DJUNA

기타등등

제가 가지고 있는 DVD는 샌프란시스코 무성영화제에서 낸 버전입니다. 이 DVD는 볼 주립대학의 교수이고 전 샌프란시스코 무성영화제의 회장이었던 리처드 J. 마이어 교수가 거의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해서 만든 건데, 정말 박수를 쳐주고 싶습니다. 복원 상태도 썩 좋고 케빈 퍼론의 절제된 음악도 만족스러워요. PAL과 NTSC 버전 모두 수록되어 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