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그레이스 리 Grace Lee

그레이스 리와 그레이스 리

[그레이스 리 프로젝트]의 시작은 다음과 같습니다. 백인들만 바글거리는 중서부의 작은 마을에서 튀는 동양 아이로 자란 감독 그레이스 리는 어른이 되어 LA에 온 뒤에야 그레이스 리라는 이름이 아시아계 이민 2세에게 얼마나 흔한 이름인지 알게 됩니다. 어딜 가든 모두 그레이스 리라는 여자를 알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람들에 대한 묘사는 대부분 비슷합니다. 착하고, 똑똑하고, 공부 잘하고, 친절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 자신이 이 그레이스 리의 범주안에 들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그레이스 리는 이들을 찾아나서기로 결심합니다. 처음엔 사립 탐정을 고용했어요. 하지만 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죠. Gracelee.net이라는 홈페이지를 만들어 그레이스 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을 직접 불러모은 거예요. 그 과정 중 얻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그레이스 리는 그레이스 리의 평균을 제시합니다. 가장 평균적인 그레이스 리는 25세의 한국계 미국인으로 주로 캘리포니아에 살고 기독교 신자이고 대학은 당연히 졸업했고 석사 학위도 있을 가능성이 크고 이성애자 독신이며 3.5년의 피아노 교습을 받았습니다.

도대체 이 그레이스 리라는 막연한 존재의 정체는 뭘까요? 아시아 여성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이 만들어낸 스테레오타입일까요? 아니면 이들을 공장처럼 찍어내는 사회적/문화적 압박이 존재하는 것일까요? 그레이스 리는 두 가능성 모두를 탐구합니다. [미스 사이공]이 상연되는 극장 앞에서 아시아 여성에 대한 이미지를 물어보기도 하고, 다양한 그레이스 리들을 만나 그들이 어떻게 그레이스 리가 되었는지 물어 보는 것이죠. 이 과정 중 처음엔 단순한 농담처럼 시작했던 이 계획은 점차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의 정체성 탐구로 옮겨집니다.

처음엔 모든 그레이스 리들은 비슷해 보입니다. 중간에 학교에 불을 지른 고등학생 그레이스 리가 등장해 흥분하긴 했지만, 알고 봤더니 그 학생도 다른 그레이스 리처럼 모범생이었고 순전히 떨어진 자기 성적을 감추기 위해 불을 지른 것으로 드러났죠. 하지만 실망은 금물. 조금 더 뒤지자 그레이스 X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88세의 중국계 흑인 인권운동가 그레이스 리가 등장합니다. 그 뒤부터 그레이스 리들은 다양해집니다. 겉보기엔 모범생이지만 섬뜩할 정도로 피투성이 그림을 그리는 14살 소녀 그레이스 리도 있고 교회와 믿음에 충실한 크리스찬인 목사 딸 그레이스 리와 목사 아내 그레이스 리도 있으며 이민 2세지만 한국으로 돌아와 레즈비언 인권 운동을 하는 그레이스 리도 있고 전쟁 이후 미국에 입양되어 학대 받으며 자라다가 나중에 폭력적인 남편으로부터 구출한 주부와 아이들과 가족을 이룬 그레이스 리도 있습니다.

단순한 이름 농담이라는 가벼운 목적을 가지고 시작했던 다큐멘터리의 내용은 서서히 넓어지기 시작합니다. 나쁘게 말하면 방향이 모호해진 것이고 좋게 말하면 내용이 풍부해진 것이죠. 이제 그레이스 리는 이름 농담이 아닙니다. 그레이스 리라는 이름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죠. 이들은 그레이스 리라는 이름의 운명에 반항하는 도전자들일 수도 있고 전형적인 그레이스 리일 수도 있습니다만, 단순한 이름 농담의 대상은 아닌 거죠. 처음엔 장난스러운 농담꾼으로 시작한 감독 그레이스 리도 나중엔 이들에게 어떤 동지애와 자매애를 느끼게 되고 '그레이스 리'라는 이름으로 상징되는 사회적 억압과 그에 대한 개개인의 순응과 도전도 분명해집니다.

생각해보면 감독 그레이스 리도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그레이스 리일지도 모릅니다. 이 영화는 어느 장면으로 가더라도 늘 선량하고 이해심이 풍부하고 다정해요. 저 같으면 작정하고 놀려댔을 테고 감독 역시 속으로 웃었을만한 장면들에서도 감독은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예의바르거든요. 하긴 아무리 놀려대고 싶어도 그레이스 리들이 가진 특성들이 모두 나쁜 건 아니겠죠. 그레이스 리 답지 않은 에너지와 반골 정신이 살짝 추가된다면 말이죠. (06/07/14)

DJUNA

기타등등

내일 방영됩니다. 전 코엑스 아트홀에서 미리 봤는데, 화면 비율이 엉망이더군요. 뒤에서 항의하는 소리가 들려서 고치는 줄 알았는데 그대로 상영하더라고요. 짜증나더군요. 한두번 겪는 일도 아니고. 하여간 텔레비전으로 보는 게 훨씬 좋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