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테렌스 데이비스 Terence Davies

주연
질리언 앤더슨....릴리 바트
Gillian Anderson....Lily Bart
에릭 스톨츠....로렌스 셀던
Eric Stoltz....Lawrence Selden
로라 린니....버사 도셋
Laura Linney....Bertha Dorset
안소니 라파글리아....심 로젠데일
Anthony LaPaglia....Sim Rosedale
댄 애크로이드....거스 트레너
Dan Aykroyd....Gus Trenor
엘레노어 브론....페니스턴 부인
Eleanor Bron....Mrs. Peniston
테리 킨니....조지 조셋
Terry Kinney....George Dorset
엘리자베스 맥거번....캐리 피셔
Elizabeth McGovern....Carry Fisher
조디 메이....그레이스 스테프니
Jodhi May....Grace Stepney
페니 다우니....주디 트레너
Penny Downie....Judy Trenor
피어스 퀴글리....퍼시 그라이스
Pearce Quigley....Percy Gryce

1.

릴리

[환희의 집]이 시작되면 우리는 20세기 영문학사상 가장 운없는 여자 주인공인 릴리 바트를 만나게 됩니다. 영화 초기에는 릴리도 상황이 괜찮습니다. 가진 돈은 별로 없지만 얹혀사는 이모 덕택에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고, 주변에는 반해서 쫓아다니는 돈많은 남자들이 부글거리고요. 릴리가 해야 할 일은 적당한 때에 돈많은 남편감을 잡아 안주하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릴리가 살짝 잘못 발을 디딘 뒤로 사정은 형편없이 나빠집니다. 도박빚을 갚으려고 도움을 요청했던 유부남 거스 트레너는 그녀에게 필요 이상의 대가를 요구하고 그를 눈치챈 릴리의 이모는 릴리를 집밖으로 몰아냅니다. 친구와 친척들에게 이용당하고 오인받아 평판이 땅끝까지 떨어진 릴리는 땡전 한 푼 없이 매정한 세계로 쫓겨나고 맙니다...

2.

[환희의 집]은 경제학적 비극입니다. 이 영화(그리고 원작이 된 이디스 워튼의 동명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경제적 상황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맘만 먹는다면 소설 구조를 그대로 두고 월 스트리트의 사업가 이야기로 고칠 수도 있을 겁니다. 영화 속에서 릴리가 거듭하는 실수들은 모두 사업적인 실수입니다. 자산 관리를 잘못하고, 투자 시기를 놓치고...

여기서 [환희의 집]에 대한 비평은 페미니즘과 쉽게 연결됩니다. 릴리가 이처럼 끔찍한 고초를 겪는 이유는 순전히 그녀가 속해있는 20세기 초 뉴욕 상류 사회에서 그녀가 경제적 기생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살아남으려면 남편감 자격이 있는 남자에게 자신을 팔아넘겨야 합니다. 그러는 동안 자신의 상품 가치를 특정 하한선 이상으로 꾸준히 유지시켜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요.

그녀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녀가 여전히 결혼을 로맨스와 연결시켜 생각하고 어떤 경우에도 자신에게 최소한의 존엄성이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녀가 그런 착각을 하는 동안 그녀가 속한 사회는 자기네들의 무시무시한 규칙에 따라 그녀를 매정하게 퇴출시키고 있었지요. 마치 흠집있는 물품을 떨어내듯 말입니다.

그 이후부터 이야기는 더 매정해집니다. 자신을 팔아넘기는 데 실패한 릴리에게 남은 건 몰락뿐이니까요. 경제적 동물로서 릴리는 낙제감입니다. 할 줄 아는 기술도 없고, 배운 것도 없으며, 노동자 계급 사람들이 살아오면서 얻은 두꺼운 낯짝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새로 익히기엔 너무 늦었지요. 익혔다고 해도 당시 땡전 한 푼 없는 독신 여성이 혼자 자신만의 삶을 이어가는 것은 지금보다 몇 천 배는 어려웠습니다. 영화의 비극적 결말은 어떻게 보면 시작부터 자명했던 것이죠.

3.

[환희의 집]과 [순수의 시대]는 같은 작가의 작품을 각색한 영화지만 그 스타일은 극단적으로 다릅니다. [순수의 시대]는 로맨틱하고 사치스러우며 영화적으로 무척 수다스러운 작품이었습니다. 하지만 [환희의 집]은 냉정하고 차갑고 매정합니다.

일부는 어쩔 수 없는 경제적/시간적 제약 때문이기도 합니다. 충분히 자금을 끌어다 쓸 수 있는 거장인 스콜세지와는 달리 데이비스는 훨씬 박한 상황에서 작업을 해야 했습니다. 제작비는 모자랐고 시간도 촉박했지요(이 영화는 질리언 앤더슨이 휴가철인 6월과 7월에 후다닥 찍은 작품입니다.) [환희의 집]이 스콜세지의 작품처럼 풍요로운 디테일로 차 있지 않은 건 당연합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두 작품은 전혀 다른 영화입니다. [순수의 시대]는 극단적인 로맨티시즘의 자기 기만에 사로잡힌 예술 애호가의 러브 스토리였습니다. 하지만 [환희의 집]은 무시무시한 경제적 조건에 사로잡힌 희생자 여성에 대한 작품입니다. 결코 [순수의 시대]와 같은 방식으로 접근해서는 안되지요.

데이비스는 될 수 있는 한 캐릭터의 감정에 직접 관여하지 않으려 합니다. 영화는 정적이며 차분합니다. 움직임이 아주 적어 회화를 연상시킬 정도죠. 특히 사전트의 몇몇 작품을 그대로 옮긴 것 같은 구도의 장면도 몇 개 보입니다.

캐릭터들의 교류도 무척 차갑습니다. 2.35:1의 와이드 스크린으로 쭉 뻗은 화면이지만 정작 이들이 한 화면을 나누는 장면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길쭉한 화면 양쪽에 텅 빈 공간을 남겨두고 각각의 프레임 안에 갇힌 셈이지요. 결국 릴리는 어느 쪽으로 봐도 그녀의 세계에서 혼자입니다.

이런 냉정함은 종종 지루함과 건조함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에 불평을 늘어놓는 관객들과 비평가들이 꽤 되지요. 하지만 저에겐 제대로 된 접근법처럼 보입니다. 결국 이런 이야기의 핵심을 찌르려면 잘 제어된 냉정함이 필수적이니까요.

4.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에 뜨이는 것은 다소 특이하다고 할만한 캐스팅입니다. 마치 배우들의 기존 이미지를 완전히 무시하고 순전히 오디션에 의지해서만 뽑은 듯합니다. 사실 데이비스는 질리언 앤더슨을 캐스팅하면서도 [엑스 파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다고 하더군요. 앤더슨이 뽑힌 건 순전히 그 사람이 [마이티]에서 보여준 이미지가 맘에 들어서였다나요. 앤더슨 말고도 이상한 캐스팅은 많습니다. 댄 애크로이드나 에릭 스톨츠는 결코 우리가 이런 식의 사극에서 기대할만한 배우들은 아니니까요.

앤더슨의 캐스팅은 성공했을까요? 이 역시 의견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엘비스 미첼처럼 실패했다고 주장하는 평론가도 있고 로저 이버트나 리자 슈와츠바움처럼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지요.

제 의견은 어떠냐고요? 전 성공 쪽에 손을 들어주겠습니다. 사실 앤더슨의 연기 테크닉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초반은 거칠고 조금 밀어붙이는 듯 해요. 오버 액션까지는 아니지만 한 5퍼센트 정도 더 연기한다는 느낌도 들고요. 하지만 앤더슨의 이미지는 원작의 릴리와 닮지 않을지 몰라도 영화 속의 릴리에는 완벽하게 맞아 떨어집니다. 릴리의 다소 억센 고집과 단순 솔직한 감정은 앤더슨의 육체를 빌어 근사하게 표현됩니다. 모든 사람의 취향에 맞지 않을지는 몰라도 절실하고 무척 강렬한 연기예요.

다른 배우들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작습니다. 캐릭터 역시 얇고요. 늘 조금 더 연기하는 앤더슨과는 달리 다른 배우들은 될 수 있는 한 자신의 연기를 줄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전 못된 '친구' 버사를 연기한 로라 린니의 음흉한 연기가 맘에 들었고, 로렌스 역의 에릭 스톨츠가 뜻밖에 잘 어울린다고 느꼈으며, 트레너 역을 한 댄 애크로이드의 연기에 은밀함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꼭 언급해야 할 만큼 중요한 차이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릴리의 영화이므로 전체적으로 이런 작은 연기는 당연한 것이겠지요. (01/06/18)

DJUNA

기타등등

[엑스 파일]이 생각날까봐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 영화엔 앤더슨의 스컬리 이미지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