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에릭 로메르 Eric Rohmer

주연
루시 러셀....그레이스 엘리엇
Lucy Russell....Grace Elliott
장-클로드 드레퓌스....오를레앙 공작
Jean-Claude Dreyfus....The Duke of Orleans
레오나르 코비앙....샹스네
Léonard Cobiant....Champcenetz
샤를로트 베리....풀셰리
Charlotte Véry....Pulcherie
로제트....팡셰트
Rosette....Fanchette
카롤린느 모랭....나농
Caroline Morin....Nanon

그레이스 엘리엇

에릭 로메르의 세번째 사극 [영국 여인과 공작]의 주인공은 그레이스 엘리엇이라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귀족 부인입니다. 한동안 프린스 오브 웨일즈(장래의 조지 4세, 그러니까 [블랙애더] 시리즈의 섭정 왕세자랍니다)의 정부였다가 오를레앙 공작의 애인이 된 이 사람은 프랑스에서 혁명의 그 험한 시기를 견뎌내고 모국으로 돌아와 [Journal of My Life During the French Revolution]이라는 회고록을 썼는데, 이 영화의 원작이 바로 그 작품입니다.

영화는 대충 바스티유 궁전이 함락된 1790년부터 오를레앙 공작이 처형된 1793년까지의 기간을 다루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하나의 스토리를 다루고 있다기보다는 당시 그레이스 엘리엇이 경험한 에피소드들을 열거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죠. 그 중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소재는 그레이스 엘리엇과 옛 애인인 오를레앙 공작과의 관계입니다.

시대배경이 18세기이고 프랑스 혁명이라는 상당히 큰 사건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영국 여인과 공작]은 여전히 상당히 로메르풍입니다. 좋은 교육을 받은 예절바른 사람들이 도덕적인 주제와 신념에 대해 끝도 없이 수다를 떠는 영화니까요. 로메르의 현대물에 나오는 부르주아 지식인들과는 달리, 이들에겐 대화의 소재가, 생사가 걸린 중대사지만 말입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프랑스 혁명을 바라보는 시점입니다. 이 영화에는 21세기를 사는 현대 프랑스 지식인의 관점은 전혀, 또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회고록의 저자인 그레이스 엘리엇의 시점을 따라갑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루이 16세의 처형에 맹렬하게 반대하고, 난폭하고 야만적인 자코뱅 폭도들에 치를 떠는 보수적인 왕당파입니다. 그렇다고 영화에 노골적으로 아이러니컬한 터치가 삽입된 것도 아니지요. 로메르는 그런 짓을 할 정도로 무례한 남자가 아닙니다.

왜 로메르는 이런 관점을 선택했을까요? 이유야 여럿 들 수 있습니다. 일단 로메르라는 남자의 기본 성향을 생각해보면 프랑스 혁명을 그렇게까지 긍정적으로 볼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레이스 엘리엇의 관점과 현대 관객들의 관점의 차이가 너무나도 분명하기 때문에 오히려 객관적인 텍스트로 기능할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죠. 골수 왕당파 스코틀랜드인의 시점으로 바라본 프랑스 혁명의 이야기는 관객들에게 꽤 신선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영화는 강한 드라마와 캐릭터들을 갖추고 있습니다. 정치적 관점이 어떻건, 그레이스 엘리엇은 위트 넘치고 용감하고 고상한, 한마디로 가치있는 여자 주인공입니다. 기회주의적이고 느끼한 책략가와 이상주의적인 혁명지지자의 요소를 모두 갖춘 오를레앙 공작도 흥미로운 인물이고요. 이들이 나누는 대화들은 적당히 대립되는 정치적 입장과 서로에 대한 애정 때문에 멋진 긴장감을 만들어냅니다. 루시 러셀과 장-클로드 드레퓌스의 단아하고 품위있으며 적절하게 드라마틱한 연기도 더 이상 적절할 수 없고요. 영화의 스타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담담하고 온화하지만,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프랑스 혁명 당시의 위태로운 상황은 상당히 강렬한 서스펜스를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이 영화에서 주목할만한 또다른 요소는 기술적 실험입니다. 네, [영국 여인과 공작]은 82살짜리 노인네의 작품답지 않게 흥미로운 기술적 도전을 품고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로메르의 어떤 영화들보다도 특수 효과 장면이 많은 작품입니다. 특수 효과가 사용된 부분들은 대부분 야외 장면들로, 로메르는 야외 장면들의 배경을 모조리 그림으로 그려넣고 나중에 배우들을 블루스크린을 이용한 디지탈 특수 효과로 삽입했습니다. 결과는 참 기묘합니다. 사실성은 오래 전에 던져 버렸고 가끔은 살아 움직이는 그림을 보는 것 같으니까요. 하지만 18세기 여성의 관점을 충실하게 재현한 작품이 당시 화풍의 그림을 모방하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 같고, 디지탈 베타로 찍은 화면의 약간 탈색된 듯한 섬세한 느낌은 이런 회화적 분위기와 아주 잘 어울리는 편입니다.

[영국 여인과 공작]은 흥미로운 잡탕입니다. 영화에는 최첨단의 디지탈 특수 효과와 멜리에스가 썼을 법한 원시적 특수 효과가 섞여 있고, 드라마틱한 프랑스 혁명의 배경과 로메르식 얌전한 실내극이 공존합니다. 이들은 서로를 갉아먹기도 하고 반대로 장점을 살려주기도 합니다. 관객들이 어느 쪽을 주시하느냐에 따라 이 영화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겠죠. (02/12/23)

DJUNA

기타등등

그레이스 엘리엇의 실제 모습을 알고 싶으시다면 게인즈보로가 그린 다음 그림들을 참고하세요. [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