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마이클 파웰 Michael Powell
에머릭 프레스버거 Emeric Pressburger

주연
로저 리브지....클라이브 윈-캔디
Roger Livesey....Clive Wynn-Candy
데보라 카....이디스 헌터/바바라 윈/앤젤라 '조니' 캐넌
Deborah Kerr....Edith Hunter/Barbara Wynne/Angela 'Johnny' Cannon
안톤 월브룩....테오 크레츠마르-슐도프
Anton Walbrook....Theo Kretschmar-Schuldorff
제임스 맥키니....스퍼드 윌슨
James McKechnie....Spud Wilson
프리스 밴버리....'베이비페이스' 피츠로이
Frith Banbury....'Babyface' Fitzroy
존 로리....존 몽고메리 머독
John Laurie....John Montgomery Murdoch
뮤리엘 액트....마가렛 해밀턴
Muriel Aked....Aunt Margaret Hamilton

1.

블림프 대령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에 대해 먼저 설명해야 할 것 같군요. 원래 블림프 대령은 데이빗 로라는 영국 만화가가 30년대에 창조한 캐릭터입니다. 뚱뚱하고 우스꽝스러운 수염을 기른 이 퇴역 장교는 주로 터키탕 같은 곳에서 벌거벗은 채 우스꽝스러운 연설을 하는 식으로 그려졌습니다. 블림프 대령은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고 낡은 세계관에 매달리는 구세대 영국 상류층 군인들의 캐리커처였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만든 마이클 파웰과 에머릭 프레스버거의 의도는 만화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찍는 보통 사람들의 그것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그들은 블림프 대령을 원작처럼 캐리커처로 묘사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대신 그들은 그 우스꽝스러운 퇴역 군인이 지금까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진지하게 보여준다는 다소 엉뚱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사실 이 계획은 블림프 대령과 아무 상관없이 나왔다고 해요. 그들의 전작 [One of Our Aircraft Is Missing]을 만들 때 늙은 장교와 젊은 장교의 이야기를 찍었다가 잘랐던 모양인데, 그게 이 영화 아이디어의 기원이라고 합니다.

이 엉뚱한 탄생담은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이라는 영화를 구성하는 수많은 모순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은 모순으로만 구성된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코믹 만화를 원작으로 내세운 영화지만 우수어린 잔잔한 드라마이고, 멍청이 캐리커처여야 할 주인공은 로맨틱하고 감동적인 인물이며, 전쟁 선전 영화로 제작되었지만 주인공의 묘사가 군인들의 사기를 떨어뜨린다고 우기던 윈스턴 처칠에 의해 거의 금지될 뻔했지요. 소문에 따르면 처칠은 '블림프 대령'이 자기 자신의 캐리커처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2.

클라이브 윈-캔디 준장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은 클라이브 윈-캔디라는 직업 군인의 일생을 다루고 있습니다(왜 이름이 블림프가 아니냐고요? 원래 블림프 대령이라는 이름 자체가 데이빗 로가 묘사한 것 같은 우스꽝스러운 구식 군인들을 지칭하는 별명이었습니다.) 영화의 프롤로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2년에서 시작하는데, 여기서 윈-캔디는 전형적인 블림프 대령식으로 등장합니다. 벌거벗은 채 터키탕에서 낮잠을 자다가 망신을 당하는 거죠. 이 때부터 영화는 시간 여행을 해, 그가 막 보어 전쟁에서 돌아온 생기넘치는 젊은이었던 40년전으로 돌아갑니다.

영화는 윈-캔디의 인생을 셋으로 나누어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번째 시기는 보어 전쟁이 한창이던 1902년입니다. 생생한 젊은이인 그는 보어 전쟁의 영국군을 모욕하는 기사에 분노해 독일로 건너갔다가 테오 크레츠마르-슐도프라는 장교와 결투를 하게 됩니다. 이 결투는 엉뚱하게도 둘의 평생에 걸친 우정으로 이어지고, 크레츠마르-슐도프는 윈-캔디의 친구인 영국인 가정교사 이디스 헌터와 결혼합니다.

두번째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 말기입니다. 중년이 된 윈-캔디는 그럭저럭 자기 일을 하고 있지만 현대전의 난장판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이디스와 놀랄만큼 닮은 요크셔 출신의 간호사 바바라 윈을 만나게 됩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바바라와 결혼하고, 포로 수용소에 갇혀 있던 크레츠마르-슐도프와 재회합니다.

세번째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 무렵입니다. 홀아비가 된 크레츠마르-슐도프는 나찌 정권을 피해 영국으로 망명하고, 강제로 퇴역당한 윈-캔디는 지방 의용군의 지휘관이 됩니다. 이상할 정도로 이디스와 바바라를 닮은 운전병 조니 캐넌을 달고 다니면서요.

3.

윈-캔디와 미스 헌터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은 한 이상주의자의 좌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클라이브 윈-캔디는 20세기의 돈 키호테입니다. 그는 자신이 고결한 목적을 위해 싸운다고 믿고, 전쟁에서도 스포츠맨다운 정정당당함과 공평함이 존재해야한다고도 믿습니다. 그러나 20세기를 거치는 동안 그의 소박한 비전은 현실의 차가운 압력에 의해 밀려납니다. 용기백배하고 로맨틱한 청년이 서서히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퇴물 어릿광대로 늙어가는 과정이 바로 이 영화의 기둥 줄거리입니다.

물론 그의 세계관은 바보스러울 정도로 순진합니다. 애당초부터 시대에 뒤떨어진 늙은 어릿광대를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였으니까요. 윈-캔디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보어 전쟁이나 소말리아 전쟁이 결코 그가 생각했던 것처럼 기사도 정신이 넘치는 정정당당한 전쟁이 아니었다는 걸 아는 현대 관객들에게 그의 단순함은 더욱 처절하게 느껴질 겁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점 때문에 윈-캔디의 이야기가 더욱 힘을 얻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는 실제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가치를 쫓는 남자입니다.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적절한 양의 로맨티시즘을 동원해 윈-캔디의 좌절을 더 공감가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윈-캔디의 전성기였던 1902년의 베를린을 마치 동화속의 가상 세계처럼 그려놓고 있습니다. 왈츠가 흐르고 결투사들의 칼이 날아다니고 이제 존재하지 않는 '고결한' 가치가 세계를 지배하는 이야기 속의 세계 말입니다. 여기서부터 그들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조금씩 냉정한 현실의 터치를 더하기 시작합니다. 42년의 마지막 장에 도달하면 윈-캔디의 로맨티시즘은 광대질로 떨어지고 주변은 현대전의 차가운 현실 속에 던져집니다.

데보라 카가 연기하는 세 명의 여자 주인공들 역시 윈-캔디의 대책없는 로맨티시즘을 적절하게 설명해줍니다. 그는 현실적인 사랑을 하지 않습니다. 그의 첫사랑 이디스 헌터의 관계부터 그렇습니다. 그는 이디스를 베를린에 남겨놓고 떠나면서부터 그녀를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그 뒤로 그는 끊임없이 과거의 유령에 매달립니다. 그의 전처 바바라 윈이나 운전병 조니 캐넌은 모두 제대로 된 연애도 해보지 못하고 떠나보낸 여인의 그림자를 숭배하는 그의 구닥다리 로맨스의 길 위에 놓여 있습니다. 이 현실적이고 냉철한 영국 여성들은 어울리지 않게도 윈-캔디의 둘시네아인 것입니다.

4.

조니와 테오 크레츠마르-슐도프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은 전쟁 선전 영화로 제작되었지만,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독일과 독일인에 대해 입체적인 접근법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네, 영화는 나찌에 대한 공공연한 비난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공격을 독일인 전체로 돌리지는 않아요. 제2차 세계대전의 불을 당겼다고 할 수 있는 패전국들의 불공정 대우에 대해서도 상당히 진지하게 묘사하고 있고요. 무엇보다 안톤 월브룩이 연기한 테오 크레츠마르-슐도프는 쉽게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있는 인물입니다.

윈-캔디가 옛 영국을 대표하는 인물이라면, 크레츠마르-슐도프는 옛 독일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이 독일군 장교는 처음에 윈-캔디만큼이나 단순한 젊은이로 등장합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는 윈-캔디가 마주치지 못했던 현실과의 충돌 과정을 겪습니다. 패전 이후의 실업난, 대공황, 나찌 당원이 된 아들들과의 대립, 아내의 죽음을 거친 그는 윈-캔디보다 더 현명해졌습니다. 여전히 미래에 대한 비전이 결여되어 있고 죽은 과거와 아내에 대한 향수에 젖어 있지만, 윈-캔디처럼 블림프 대령식 넋두리만 늘어놓고 있지는 않지요. 말미에 나오는 그의 대사들은 이 영화의 선전 영화적 주제를 대표하기도 합니다.

영화는 20세기 동안 유럽의 주변 국가들이 독일에 대해 느꼈던 애증의 감정을 정리하기도 합니다. 이건 영국으로 이민 온 유럽인이었던 에머릭 프레스버거의 관점일 가능성이 큽니다. 수십 년 동안 야만적인 전쟁의 원흉이었으면서도 동시에 아름다운 예술 작품들의 창작자였고 감상자였던 이 이해못할 이웃에 대한 최종 해답은 끝까지 제시되지 않지만요. 결국 그들은 대답을 보류하고 이성적인 개인들이 나누는 이해와 화해로 만족하는 듯 합니다.

5.

1919년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은 원래 로렌스 올리비에, 웬디 힐러, 안톤 월브룩 주연의 영화가 될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참전 중이었던 올리비에를 데려올 수 없었고 웬디 힐러도 임신 때문에 역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처음에 계획했던 세 주연 배우들 중 영화에 참여한 사람은 안톤 월브룩밖에 없었지요.

전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올리비에는 좋은 배우지만 그의 아카데믹한 연기는 윈-캔디의 소박한 인간성과는 잘 어울리지 않았을 겁니다. 로저 리브지는 그런 면을 완벽하게 살려냈지요. 40년에 걸친 긴 세월을 무리없이 연기해낸 그의 연기력도 놀랍습니다. 물론 여기엔 분장담당자들의 공로도 한몫 했겠지만요. 이 영화로 거의 데뷔하다시피한 데보라 카 역시 풋내기답지 않은 노련함으로 1인 3역을 소화해냅니다. 이 사람의 우아한 아름다움도 로맨틱한 애정의 대상에 더 잘 어울리고요. 안톤 월브룩의 연기 역시 잊을 수 없는데, 그가 연기해낸 구시대 교양인다운 우아함과 조용히 잦아드는 서글픔은 이 영화가 가장 노련하게 표출해낸 예술적 성과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영국으로 망명한 그가 무표정한 공무원들 앞에서 아내의 죽음과 그가 지나왔던 험난한 세월에 대해 조용히 읊는 부분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파웰과 프레스버거의 오페라적인 화려한 연출이 진짜로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도 이 영화부터입니다. 이 콤비의 전매특허라고도 할 수 있는 테크닉컬러 영상이 시작된 것도 이 영화부터고요. 몇몇 평론가들은 내용의 유사점을 지적하며, 이 영화에 영국판 [시민 케인]이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는데, 내용도 그렇지만 영화적 도전정신과 테크닉면에서도 이 별명은 타당합니다. 비극을 통해 희극을 이야기하고 희극 속에 비극을 담아내는 그들의 모순어법이 영화의 정서를 얼마나 풍요롭게 만드는지도 주목할만합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데이빗 로의 만화들이 다르게 느껴지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외모와 몇몇 성격상 유사점을 제외하면 윈-캔디와 블림프 대령은 여전히 다른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로가 펜으로 그린 배불뚝이 영감이 로저 리브지가 연기한 늙은 로맨티스트의 원형이라는 걸 생각하면 영화를 보는 기분이 달라집니다. 만약 예술이 무언가에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것이라면,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만큼 그 목적을 성공적으로 달성한 작품은 많지 않을 겁니다. (03/01/08)

DJUNA

기타등등

우리나라에서는 [직업 군인 캔디씨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EBS에서 방영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