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샐리 포터 Sally Potter

주연
크리스티나 리치....페겔레/수지
Christina Ricci....Fegele/Suzie
케이트 블란쳇....롤라
Cate Blanchett....Lola
존 터투로....단테 도미니오
John Turturro....Dante Dominio
조니 뎁....체자르
Johnny Depp....Cesar
해리 딘 스탠튼....펠릭스 펄만
Harry Dean Stanton....Felix Perlman
올렉 얀코프스키....아버지
Oleg Yankovsky....Father
클로디아 랜더-듀크....어린 페겔레
Claudia Lander-Duke....Young Fegele
하나 마리아 프라브다....할머니
Hana Maria Pravda....Grandmother
미리엄 칼린....마담 골드스타인
Miriam Karlin....Madame Goldstein

수지

[더 맨 후 크라이드]는 은근히 포인트가 맞지 않는 영화입니다. 매력적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게 캐스팅된 배우들로 가득한 이 영화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비교적 직설적이고 이해하기 쉬울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비어 있습니다.

영화는 페겔레라는 유태인 소녀의 10여년에 걸친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작은 유태인 마을에서 태어난 페겔레는 유태인 학살에서 홀몸으로 빠져나와 수지라는 영어 이름을 달고 영국인 가정에 입양됩니다. 10년 뒤 어른이 된 페겔레/수지는 경제적으로 독립해 미국에 있는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파리에 있는 카바레의 댄서가 됩니다. 하지만 때가 그렇게 좋지 못했죠. 수지가 체자르라는 집시 청년과 사랑에 빠져 있는 동안 2차 세계 대전이 터져 독일군이 파리로 몰려들어왔으니까요.

줄거리만 보면 수지는 장편 대하 역사 드라마의 주인공이 될 자격이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직접 보면 수지에게 이상할 정도로 드라마가 조금 배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오히려 수지의 러시아 댄서 룸메이트 롤라나 그녀의 정부인 오페라 가수 단테에게 드라마가 더 많다면 많습니다. 수지는 정말 아무 것도 안해요. 그녀는 영화 전체를 통해 가만히 서서 커다란 눈으로 사람들을 지켜보기만 합니다. 말도 정말 없어요. 중간에 꽤 긴 대사를 토해내자 주변 사람들이 "얘도 말을 할 줄 아네!"라고 외칠 정도죠.

수지만 그런 게 아니에요. 정말 이 영화엔 비정상적일 정도로 드라마가 없습니다. 그냥 없는 게 아니라 꼭 있어야 할 것 같은 데 없어요. 드라마의 씨는 충분합니다. 수지는 자신의 유태인 뿌리를 찾는 여정을 벌이고 있고, 롤라는 남자들을 이용해 가난한 삶에서 탈출하려 하고 있고, 단테는 정치적 상황 속에서 필사적으로 살아남으려는 이기적인 예술가이고, 체자르는... 독일군 점령 당시를 사는 집시였으니, 이 친구도 그렇게 평탄한 삶을 사는 사람은 아니죠. 그런데도 영화는 이런 씨들을 뿌려 드라마를 거둘 생각을 하지도 않습니다. 갈등은 깊어지지 않고, 개별 캐릭터들의 드라마는 툭툭 끊어지고, 예술가와 사회의 연관성에 대한 주제도 특별히 살아있는 것 같지 않아요. 제목과 연결된 마지막 결말도 지금까지 한 이야기들을 정리해주지 않고요. 홈페이지를 보니 감독은 브라사이와 요제프 쿠델카의 사진에 영향을 받았다고 했는데, 영화는 정말 사진집 같습니다. 연결되는 드라마보다 뚝뚝 끊어진 정적인 이미지들이 더 강해요.

캐스팅도 약간 별납니다. 케이트 블란쳇이야 악센트의 여왕이고 못하는 연기가 없는 사람이니까 러시아 댄서를 한다고 해서 그렇게 특별할 건 없습니다. 하지만 해리 딘 스탠튼이 파리의 유태인 오페라 단장을 연기하는 건 뭔가 좀 이상하지 않나요? 존 터투로가 에고에 부푼 오페라 가수로 나오는 건 또 어떻고요? 크리스티나 리치의 외모는 시대 배경과 잘 어울리지만 이 친구가 러시아 유태인의 피를 물려받은 영국인 소녀로 나오는 건 어딘지 모르게 좀 이상합니다. 조니 뎁의 집시 청년 연기도 [초콜렛] 다음에 이 영화를 봐야 간신히 익숙해질 정도입니다.

샐리 포터가 상업적인 드라마를 만드는 데 서툰 걸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이 사람은 지금까지 정통 드라마를 만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더 맨 후 크라이드]는 포터가 정통 드라마를 만들려다 실패한 작품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질성이 너무 노골적이라서 그게 과연 의도를 못살린 실패인지 의심이 갑니다. 의식적인 드라마의 배제는 분명히 노골적입니다. 영화의 스토리가 가족 상봉의 감동을 위해 짜여진 것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하고요. 하긴 이런 게 예술가들의 술수이긴 하죠. 완벽하게 짜맞추는 대신 살짝 어긋나게 작품을 만들면 전체적인 중의성이 늘어나고 덕택에 실제 이상으로 내용이 있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살짝 어긋나는 캐스팅도 그 때문일 수 있습니다. 물론 많은 비평가들은 그냥 무시해버리는 쪽을 선택했지만 말입니다.

[더 맨 후 크라이드]가 '무의미한' 작품이라고는 말하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의미가 캐릭터들의 동기와 행동에 바탕을 둔 서사 문학의 의미와는 꽤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는 있어요. 아마 동부 유럽 출신의 유태인 소녀를 주인공으로 해서 30년대 유럽에 깔려 있던 짙고 어두운 정서를 관객들에게 전달하려는 것이 진짜 목적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스토리나 드라마와는 별도로 영화의 분위기는 상당히 강하니까요.

영화에서 스토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음악입니다. 영화 음악의 기본 등뼈를 구성하는 것은 19세기 오페라입니다. 특히 비제의 [진주 조개 잡이]에 나오는 [귀에 익은 그대 음성]은 주제곡처럼 사용되고 있지요. 중요 등장 인물 중 한 명인 단테가 오페라 가수이기 때문에 베르디와 푸치니의 오페라들이 상당히 많이 나오고요. 수지 역시 퍼셀의 [디도]에 나오는 [디도의 애가]를 주제곡처럼 사용하고 있고요. 이런 클래식 음악들은 종종 [글루미 선데이]와 같은 유럽의 대중 음악들과 재미있는 충돌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수지의 아버지는 [귀에 익은 그대 음성]을 이디시어로 부르고, 집시 무리들 속에서 수지가 [디도의 애가]를 부르면 그 곡은 어느 순간 집시 음악으로 바뀝니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에 나오는 음악들은 주인공들보다 훨씬 더 대화에 능통해요. 이런 절충주의적인 선곡은 꽤 위태로울 수도 있지만 크로노스 현악 사중주단이 연주한 오스발도 골리요프의 음악은 중간의 갭을 능숙하게 채워줍니다.

비주얼도 상당히 강렬합니다. 이 작품은 촬영 감독 사샤 비에르니의 마지막 작품인데, 그의 그리너웨이 영화에서 종종 느낄 수 있었던 음울한 호사스러움이 이 영화에도 강하게 묻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저예산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훨씬 스케일이 커보이기도 해요.

배우들은 칼로 중간을 그은 책상처럼 둘로 나뉩니다. 케이트 블란쳇과 존 터투로는 화려하고 거창하며 과장이 심한 연기를 합니다. 하지만 크리스티나 리치와 조니 뎁은 대사가 거의 없고 동적인 연기도 거의 하지 않죠. 하지만 크리스티나 리치의 그 희귀한 무덤덤함은 은근히 강렬합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요. 이 친구의 은근히 강한 화면빨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 뿐이죠. 아니면 정말 은근히 차분한 연기를 잘하거나요. 그냥 화면빨 때문이었다고 해도 자기 역할을 한 겁니다. 이 영화에서 배우들의 진짜 일은 비주얼의 벽돌이 되어 주는 일이었으니까요.

일단 전 [더 맨 후 크라이드]에 대해 나쁜 소리를 하지는 않을 겁니다. 때깔이 무지 고운 영화이고, 음악도 좋았으며, 캐스팅 역시 은근히 적절했거든요. 드라마의 부재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도 있지만 만약에 샐리 포터가 적극적인 드라마를 끌어들였다면 정말 평범한 멜로드라마가 나왔을 수도 있습니다. 이 영화의 엉뚱한 매력(그걸 받아들이냐, 거부하느냐는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달라지겠지만)도 그런 엉뚱한 덤덤함에서 나왔을 거고요. (02/01/30)

DJUNA

기타등등

[탱고 레슨]의 파블로 베론이 집시 댄서 중 한 명으로 나옵니다. 어린 페겔레로 나온 클로디아 랜더-듀크는 어쩜 그렇게 크리스티나 리치와 잘 어울리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