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아서 펜 Arthur Penn

주연
앤 밴크로프트....애니 설리번
Anne Bancroft....Annie Sullivan
패티 듀크....헬렌 켈러
Patty Duke....Helen Keller
잉가 스웬슨....케이트 켈러
Inga Swenson....Kate Keller
빅터 조리....켈러 대위
Victor Jory....Captain Keller
앤드루 프라인....제임스 켈러
Andrew Prine....James Keller
캐슬린 콤가이스....에브 고모
Kathleen Comegys....Aunt Ev

1.

드물지만 현실 세계에서도 '픽션을 능가하는' 드라마들이 일어납니다. 헬렌 켈러와 애니 설리번의 이야기 역시 그런 드문 예들 중 하나입니다. 타임머신으로 18세기 사람 한 명을 납치해 와서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줘보세요. 아마 그 사람은 이 이야기를 실화가 아닌 인식론에 대한 우화 쯤으로 받아들일 겁니다. 실화라고 보기엔 너무나도 순수하고 극적이니까요.

사람들은 이런 실화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다른 매체로 전환시켜 재생산해내지요. 헬렌 켈러와 애니 설리번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였어요. 아직도 이들의 이야기는 텔레비전, 영화, 연극과 같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끝없이 변형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들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윌리엄 깁슨 ([뉴로맨서]를 쓴 SF 작가 윌리엄 깁슨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입니다)의 희곡 [미라클 워커]입니다. 59년에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이후로, 이 작품은 20세기 미국 극문학의 가장 중요한 작품의 하나로 자리매김했고 그 힘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2.

이런 작품을 할리우드에서 그냥 내버려 두었을 리가 없겠죠? 연극이 성공하자 당연히 영화화 계획이 따랐습니다. 예외적인 일이 있었다면, 감독인 아서 펜의 요구로 초연 때 애니 설리번과 헬렌 켈러를 연기했던 앤 밴크로프트와 패티 듀크가 그대로 영화에도 출연했다는 것이겠죠. 원작자인 윌리엄 깁슨 역시 각색자로 참여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은 굉장히 연극적입니다. 영화로 옮긴 연극이라고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죠. 아서 펜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분명 원작을 영화로 옮기는 작업을 훌륭하게 해냈으니까요. 그러나 아서 펜이 아닌 다른 감독이 이 작품을 만들었어도 영화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며 여전히 감동적이었을 겁니다. 누가 뭐래도 이 작품의 진짜 힘은 배우들의 연기와 대사에 있으니까요.

이 영화에서 가장 박진감 넘치는 장면인 식당 결투 장면을 보세요. 결투 장면을 끌어가는 것은 전적으로 앤 밴크로프트와 패티 듀크라는 두 배우의 몫입니다. 카메라가 연극 무대처럼 고정되어 있었다고 해도 힘은 거의 떨어지지 않았을 거예요. 그만큼이나 그들은 훌륭합니다. 연기력도 뛰어나지만 진짜로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그들의 무시무시한 감정과 그 감정을 유지시키는 에너지입니다. [미라클 워커]는 웬만한 액션 영화 뺨칠만큼 폭력적인 작품입니다. 폭풍우처럼 강렬한 두 명의 캐릭터들이 전쟁하듯 서로를 때려잡는 것이지요. 단지 이 영화의 경우, 주인공의 동기가 상대방을 쏴죽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영혼에 불을 당기는 것이라는 게 다릅니다.

3.

[미라클 워커]는 애니 설리번과 헬렌 켈러의 평생에 걸친 긴 관계의 첫 몇 주를 다루고 있습니다. 애니 설리번이 켈러네 집에 도착해서 헬렌에게 수화를 가르치고 결국 헬렌이 사물과 단어와의 연관 관계를 이해하면서 작품은 절정에 이르죠. 깁슨은 연극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헬렌의 나이를 조금 올렸고 헬렌이 사물과 단어의 관계를 이해하는 과정을 극적으로 압축했습니다.

깁슨이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은 이 이야기의 철학적 요소입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헬렌 켈러의 이야기는 흥미로운 인식론적 '우화'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 감각 중 가장 중요한 시각과 청각을 빼앗긴 아이가 남은 감각만으로 세상을 탐구하기 시작하고 결국 추상적인 의미까지 정복할 수 있었다니 얼마나 근사한 예인가요. 물론 2주만에 해결을 봐야하고 그 해결이 눈에 드러날만큼 분명해야 하기 때문에 약간의 술수가 끼어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 작품이 제시하는 철학적 문제점이 약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사실 이 영화가 주는 감동의 기저에는 늘 이 요소가 통주저음처럼 깔려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이 단순히 장애인의 인간 승리를 다룬 멜로드라마로 떨어지지 않는 것이죠. [미라클 워커]의 스케일은 단순한 역경 극복 이야기를 훌쩍 넘어섭니다. 어떻게 보면 헬렌의 이야기는 2백만년에 걸친 인간 지성의 역사와 맞먹는 것입니다.

4.

철학이나 인식론, 인지과학, 교육학이 어쨌건, 앤 밴크로프트와 패티 듀크의 이름을 다시 한 번 언급하지 않고서는 이 글을 끝마칠 수가 없습니다. 앞에서도 한 번 이들의 이름을 언급했지만 그 정도만으로는 부족하군요. [미라클 워커]는 몸 안사리는 배우들의 연기만으로도 스크린이 얼마나 화끈하게 달아오를 수 있는지 증명하는 가장 훌륭한 예 중 하나입니다. (00/12/04)

DJUNA

기타등등

정말로 헬렌 켈러가 패티 듀크 또래의 나이였다면 설리번 선생이 아무리 발버둥쳤어도 그만큼의 성과는 거둘 수 없었을 겁니다. 언어를 배울 수 있는 나이가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