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루치오 풀치 Lucio Fulci

주연
제니퍼 오닐....버지니아 두치
Jennifer O'Neill....Virginia Ducci
가브리엘레 페르제티....에밀리오 로스피니
Gabriele Ferzetti....Emilio Rospini
마르크 포렐....루카 파토리
Marc Porel....Luca Fattori
자니 가르코....프란체스코 두치
Gianni Garko....Francesco Ducci
이다 갈리....글로리아 두치
Ida Galli....Gloria Ducci
제니 탐부리....브루나
Jenny Tamburi....Bruna

버지니아

1970년대까지만 해도 루치오 풀치는 종종 꽤 멀쩡한 영화들을 만들었습니다. 그가 막 나가는 풀치표 영화로 경력을 도배하기 시작한 건 80년 이후의 일이죠. 오늘 다룰 [싸이킥]이나 [Non si sevizia un paperino] 같은 영화들을 보면 덜컹거리는 부분도 적고 각본도 그럴싸합니다.

제목이 [싸이킥]이니, 당연히 이 영화의 핵심은 주인공이 보는 비전입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주인공 버지니아는 피렌체의 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 때 영국에서 엄마가 투신자살하는 광경을 비전을 통해 봤죠. 이탈리아인 남편 프란체스코의 집을 손보러 가는 동안, 버지니아는 또 비전을 봅니다. 그 비전에서는 나이든 여자 한 명이 절름발이 남자에게 처참하게 살해된 뒤였죠. 버지니아는 그밖에도 노란 담배나 집주소가 쓰여진 그림, 구멍이 뚫린 벽과 같은 걸 보는데, 남편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비전에서 보았던 것과 아주 똑같은 방 하나를 발견합니다. 버지니아는 벽을 허물고 그 안에서 이미 백골이 되어버린 여자 시체를 발견하죠. 그 통에 남편은 살인 혐의로 체포되고 버지니아는 친구인 초심리학자 루카의 도움을 받아 그 비전을 분석하는데, 당연한 일이지만 그 비전은 원래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풀치 영화하면 사람들은 형편없는 특수분장과 막 나가는 설정으로 도배된 고어 장면들을 생각하는데, [싸이킥]엔 그런 게 거의 없습니다. 도입부에 딱 하나 나올 뿐이에요. 여기서 풀치는 투신자살하는 엄마 역할의 마네킹을 떨어뜨리면서 얼굴을 마구 절벽에 박습니다. 그게 다예요. 이 영화에서 처음 사용한 아이디어도 아니고. 그 뒤로는 살인장면도 안 나옵니다. 이미 살해된 시체가 하나 등장하고 결말의 클라이막스에 폭력장면이 하나 등장할뿐이죠. 이 영화의 나머지는 꽤 지능적인 설정을 이용한 서스펜스물입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정말로 관객들의 머리를 넘어서지는 않습니다. 영화는 러닝타임 한 시간을 넘길 때까지 어떻게든 버지니아가 본 비전의 진짜 의미를 감추려고 하는데,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죠. 척 봐도 자명한 설정이거든요. 그 때문에 뻔한 의미를 억지로 오독하는 주인공들의 추리가 좀 갑갑해보입니다. 영화가 실제 속도보다 느리게 느껴지는 것도 그 갑갑함 때문이죠.

다행히도 언제까지나 그러지는 않아요. 결국 진상을 밝힐 수밖에 없죠. 그 뒤부터는 진행 속도도 빨라집니다. 버지니아가 본 비전이 하나씩 현실화되어가면서 (네, 사실 그 비전은 미래 사건에 대한 예언이었던 거죠) 서스펜스도 증가하고요. 지알로 영화의 발목을 잡는 지루한 대사가 상대적으로 적은 후반 30분은 상당히 좋습니다. 여전히 진상은 비교적 알아차리기 쉽지만 미스터리의 재미는 남아 있고, 이탈리아 호러영화 특유의 통제되지 않은 막가파 시적 느낌은 엔드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지속됩니다.

물론 이 영화가 풀치의 대표작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을 겁니다. 풀치 팬들에게 풀치는 일단 풀치스러워야 하죠. [싸이킥]은 상대적으로 잘 만든 영화지만 팬들을 매료시키기엔 충분히 풀치스럽지 않아요. [싸이킥]은 그냥 더 잘 만들어진 풀치 영화일뿐이죠. (08/01/14)

DJUNA

기타등등

프롤로그의 자살 장면에서 도버 해협과 피렌체의 시각이 모두 11시 45분이라고 나와 있는데, 두 도시는 사실 한 시간 차이가 난다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