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제임스 아이보리 James Ivory

주연
안소니 홉킨즈....제임스 스티븐즈
Anthony Hopkins....James Stevens
엠마 톰슨....샐리 켄튼
Emma Thompson....Miss Sally Kenton
제임스 폭스....달링턴 경
James Fox....Lord Darlington
휴 그랜트....카디날
Hugh Grant....Cardinal
크리스토퍼 리브....잭 루이스
Christopher Reeve....Jack Lewis
벤 채플린....찰리
Ben Chaplin....Charlie
피터 본....스티븐즈의 아버지
Peter Vaughan....Mr. Stevens, Sr
핍 토렌스....칼라일 박사
Pip Torrens....Doctor Carlisle
마이클 론스데일....뒤퐁 디브리
Michael Lonsdale....Dupont D'Ivry

1.

미스 켄튼과 스티븐즈

전 자주 외국인 삼인조로 구성된 머천트-아이보리 팀이 경악스러울 정도로 영국적인 영화들을 만들어대는 걸 놀려댔는데, 그들의 [남아있는 나날]은 그 중에서도 한 술 더 뜨는 작품입니다. 원작은 부커 상을 수상한 영문학 작품이지만 작가인 이시구로 가쯔오는 일본인이니까요. [전망 좋은 방]이나 [하워즈 엔드]는 그래도 영국 작가인 E.M. 포스터의 소설들이 출발점이었지만 이 작품은 처음부터 외국인이 보는 영국 이미지로 시작한 셈이죠.

[남아있는 나날]의 주인공은 스티븐즈라는 이름의 완벽한 구식 집사입니다. 영국 집사만큼이나 옛 영국 계급 사회를 적절하게 상징하는 존재가 있을까요? 하인 계급이면서 주인보다 더 과거의 위엄에 가까이 위치한 존재잖아요. 우리가 생각하는 영국 신사의 이미지에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도 말할 것 없고. 영화는 휴가를 맞아 옛 가정부였던 미스 켄튼을 만나러 가는 스티븐즈의 과거 회상으로 전개됩니다. 그와 친독주의자였던 주인 달링턴 경과의 관계, 미스 켄튼과의 미묘한 관계가 회상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죠.

소재는 징그러울 정도로 영국적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은근히 외국인 시점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남아있는 나날]은 스티븐즈를 집사라는 직업을 가진 한 남자로 묘사하는 대신 영국 집사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묘사합니다. 스티븐즈가 섬기는 주인인 달링턴 경 역시 영국 구식 귀족들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고요. 내부인이 이런 소재를 다룰 때는 이렇게까지 캔버스를 넓고 막연하게 잡지는 않지요.

[남아있는 나날]이 하려고 하는 것은 이런 사람들로 구성된 영국적 시스템이 어떻게 그 자체의 결점으로 붕괴되는가에 대한 고찰입니다. 이런 종류의 작품 주인공들이 대부분 그렇 듯, 스티븐즈와 달링턴 경은 모두 존경할 만한 사람들입니다. 스티븐즈는 자신의 주인을 온 몸을 바쳐 섬기는 이상적인 하인이고, 달링턴 경은 불평등 조약으로 신음하는 옛 적국 사람들을 진심으로 동정하는 인도주의자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들의 그런 미덕이 그들을 비극으로 몰고갑니다. 달링턴 경은 자신의 이상주의와 페어플레이 정신 때문에 자신이 돕고자 하는 나찌의 진면목을 보지 못합니다. 스티븐즈 역시 주인에 대한 헌신적인 애정 때문에 달링턴 경의 단점을 보지 못하죠. 결국 최선을 다했던 두 사람들은 삶의 말년에 이르러 회한에 차 과거를 들여다볼 수밖에 없습니다.

주인공은 달링턴 경이 아니라 스티븐즈이므로 영화는 '맹목적인 의무'의 위험에 더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주제는 꽤 보편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린 열심히 자기 일만 하던 선량한 사람들이 저지른 끔찍한 일들을 너무나도 많이 알고 있으니까요. 스티븐즈는 그래도 운이 좋은 편입니다.

2.

달링턴 경과 스티븐즈의 관계만큼 중요한 것은 가정부인 미스 켄튼과 스티븐즈의 관계입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굉장히 영국적이고 은밀한 러브 스토리입니다. 둘은 서로에 대해 호감을 품고 있지만 한 번도 자신의 감정을 상대방에게 밝히지 않습니다. 이 역시 그래도 단도직입적인 미스 켄튼보다는 스티븐즈의 잘못입니다. 그는 자기의 감정을 존중할 줄 모릅니다. 완벽한 집사는 결코 자기 감정을 개입해서는 안되니까요. 결국 그는 자기 역할에 충실하느라 단 한 번 올 뻔했던 사랑의 기회를 놓쳐버린 거죠.

보고 있으면 한심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그게 영국적 로맨스의 진수가 아닐까요? 이 말없고 수줍은 두 영국 중년 아줌마 아저씨가 더듬더듬 거리면서 서로에게 접근하다 훌쩍 뒤로 물러나는 장면들은 굉장히 다이나믹합니다. 그 중 가장 결정적인 장면은 역시 미스 켄튼이 스티븐즈가 읽던 연애 소설을 빼앗아 제목을 읽는 장면입니다. 연애 이야기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지만 얼마나 감정이 철철 넘쳐 흐르는지요. 엠마 톰슨과 안소니 홉킨즈의 기가 막힌 연기를 볼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해요. 이들은 [하워즈 엔드]에서도 좋았지만 진짜 완벽한 이중주를 선사하는 영화는 [남아있는 나날]입니다.

3.

[남아있는 나날]은 머천트-아이보리 영화의 절정기를 장식하는 마지막 작품입니다. 여러모로 머천트-아이보리 영화의 최고 절정이라고 할 수 있죠. 완벽한 각색, 완벽한 연기, 완벽한 연출이 너무나도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서 오히려 그게 단점으로 느껴질 지경입니다. 당시 관객들은 상당히 지겹게 느꼈을지도 몰라요. 당시엔 거의 1,2년에 한번씩 머천트-아이보리 상표가 붙은 각색물들이 나왔으니까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을 다시 볼 필요가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머천트-아이보리 영화에 대한 선입견도 어느 정도 사라졌고 그들의 작품이 예전처럼 영향력을 행사하지도 못하니 오히려 작품이 더 눈에 잘 들어오는 거죠. 게다가 수퍼 35밀리로 찍은 2.35:1의 와이드 스크린 화면이 주는 장중한 느낌은 풀 비디오에선 충분히 살아나지 못합니다. 보시려면 DVD로 다시 보시라는 말이죠. :-) (02/01/28)

DJUNA

기타등등

벤 채플린이 하인 중 한 명으로 나오더군요. 몰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