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헤럴드 영 Harold Young

주연
레슬리 하워드....퍼시 블레이크니 경
Leslie Howard....Sir Percy Blakeney
멀 오베론....레이디 마르그리트 블레이크니
Merle Oberon....Lady Marguerite Blakeney
레이몬드 메이시....쇼블랑
Raymond Massey....Chauvelin
앤소니 뷰셀.....앤드류 포크스 경
Anthony Bushell....Sir Andrew Ffoulkes
조앤 가드너....수잔느 드 투르네
Joan Gardner....Suzanne de Tournay
월터 릴라....아르망 생 쥐스트
Walter Rilla....Armand St. Just
메이벨 테리-루이스....투르네 백작부인
Mabel Terry-Lewis....Comtesse de Tourney
O.B. 클라렌스....투르네 백작
O.B. Clarence....Comte de Tournay
어네스트 밀튼....로베스피에르
Ernest Milton....Robespierre
에드먼드 브레온....르네 드 그라몽
Edmund Breon....Rene de Grammont

1.

내용은 다들 아시리라 믿습니다. 유명한 이야기고 우리나라에도 여러 차례 번역된 작품이니까요. 주인공 스칼렛 핌퍼넬은 프랑스 혁명 당시 단두대로 끌려가는 귀족들을 구출해 영국으로 넘기는 정체불명의 인물입니다. 로베스피에르는 스칼렛 핌퍼넬을 잡기 위해 그의 심복 쇼블랑을 영국에 파견하지요. 쇼블랑은 지금은 멍청한 영국 귀족 퍼시 블레이크니의 부인이 된 배우 마르그리트를 협박해서 스칼렛 핌퍼넬의 정체를 알아내려 합니다...

...물론 스칼렛 핌퍼넬의 정체는 바로 그 멍청한 귀족 퍼시였죠. 조로 이야기죠? 당연한 일입니다. 바로 조로가 스토리를 표절한 작품이 이 영화의 원작인 오르치 남작 부인의 [스칼렛 핌퍼넬(저는 [빨강 별꽃]이라는 번역제가 더 마음에 듭니다만)]이니까요. 스칼렛 핌퍼넬은 이중 생활을 하는 모든 수퍼 히어로의 모델인 셈입니다. 수퍼맨, 원더우먼, 배트맨... 모두 스칼렛 핌퍼넬과 오르치 남작부인에게 빚지고 있는 셈이지요.

하여간 어렸을 때 손에 땀을 쥐고 읽었던 책이어서 지금도 이 소설에 대한 기억이 참 좋습니다. 얼마 전에 다시 읽었지만 여전히 유쾌했고요. 적당한 비밀과 음모가 뒤엉킨 모험담은 흥미진진하고 로맨스에는 진짜 알맹이가 들어있습니다. [스칼렛 핌퍼넬]은 정말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물론 오르치 남작 부인이 프랑스 혁명을 보는 방식이 맘에 안 드신다면 어쩔 수 없지만요.

책이 재미있으니 영화화가 자주 된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무성 영화시대부터 꾸준히 영화로 옮겨진 작품이지요. 가장 유명한 것이 얼마 전에 방영한 레슬리 하워드와 멀 오베론 주연의 이 영화입니다. 앤소니 앤드류즈와 제인 세이모어 주연의 미니 시리즈도 잘 알려져 있고요. 얼마 전에는 리처드 E. 그랜트 주연의 텔레비전 물도 만들어졌습니다. 올해에는 같은 배우들이 나오는 속편인 [마담 기요틴]이 나왔고요.

2.

해럴드 영의 [스칼렛 핌퍼넬]은 이미 고전이고 저 역시 이 작품의 명성에 큰 의문을 제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 영화는 정말 괜찮은 작품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원작의 스토리를 다루는 방식에는 그렇게까지 동감하고 싶지 않습니다. 꽤 입체적인 원작의 구조를 너무 단순하게 만들었으니까요.

가장 결정적인 문제점은 스칼렛 핌퍼넬의 이중 생활을 처음부터 노출시킨 것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책을 읽다보면 퍼시가 스칼렛 핌퍼넬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스칼렛 핌퍼넬의 정체는 그렇게까지 뜻밖은 아닙니다.

그러나 반전과 정체 노출은 이미 진상을 알고 있더라도 영화에 상당한 입체성을 부여합니다. 아무리 퍼시의 정체를 알고 있더라고 하더라도 우린 모르는 척하면서 퍼시의 바보 행각을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영화가 퍼시의 정체를 공개한다면 김이 빠지고 말지요. 심지어 이 여파는 스칼렛 핌퍼넬의 정체가 만천하에 공개된 뒤에도 남습니다. 쇼브랑과 퍼시가 프랑스에서 재회하는 장면을 보세요. 원작에서는 정말 그럴싸했던 신경전이 영화에서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 영화를 러브 스토리로 읽으려고 해도 이 정체 폭로는 문제가 됩니다. [스칼렛 핌퍼넬]의 진짜 주인공은 사실 마르그리트이며, 이 영화의 진짜 액션은 스칼렛 핌퍼넬이 프랑스 혁명의 희생자들을 구출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해로 멀어졌던 두 연인이 다시 결합하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은 마르그리트의 눈으로 전개되고 읽혀야 하지요. 그러나 퍼시의 정체가 처음부터 관객들에게 알려져 있으니 마르그리트의 모험은 의미가 축소될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소설과는 달리 영화는 마르그리트에게 별다른 육체적 모험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프랑스로 건너갔다가 쇼블랑에게 잡히고 기절 한 번 하는 것으로 모든 게 끝난답니다) 영화의 로맨스는 빛을 잃습니다.

3.

레슬리 하워드는 제가 머리 속에 그리고 있던 스칼렛 핌퍼넬의 모습은 아닙니다. 하지만 앤소니 앤드류즈도 아니었지요. 이상한 일이지만 원작에서는 상당히 건장한 인물로 묘사되는 퍼시의 역은 늘 영화에선 날씬하고 깡마른 배우들에게 넘어갑니다. 하긴 그 편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만.

하워드는 좋습니다. 바보 연기와 영웅 연기 모두를 우아하고 그럴싸하게 해냈지요. 단지 마르그리트를 연기한 멀 오베론과는 화학반응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아내에 대한 불신이 지나치게 신경질적으로 표현되어서 로맨스에 몰입할 수 없는 것도 문제고요.

마르그리트 역의 멀 오베론은 정말 예쁩니다(어렸을 때는 왜 이 사람이 못생겼다고 생각했는지.) 역시 제가 머리 속에 둔 마르그리트 이미지는 아니지만 보기는 즐겁습니다. 문제는 오베론이 연기한 마르그리트에 충분히 몰입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오베론의 외모가 지나치게 이국적이어서 그럴지도 몰라요. 하여간 오베론은 보여지기 위해 존재하는 배우이지, 캐릭터에 몰입할 수 있는 배우는 아닙니다.

레이몬드 메이시는 꽤 쇼블랑처럼 생겼습니다. 쇼블랑치고는 키가 큰 편이지만 그것까지 트집 잡으면 안되겠지요. 하지만 메이시의 연극적이고 장엄한 테크닉은 현대 관객에게 충분한 은밀함을 전달하지 않습니다. 흠... 이것도 제 취향 문제일까요.

4.

불평만 늘어놓았지만, [스칼렛 핌퍼넬]은 여전히 상당히 좋은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는 우리가 오래 전에 잃어버린 옛 시대의 향취가 스며있습니다. 요새 관객들에게는 지나치게 건조하고 장식없어 보일지는 몰라도 그 때문에 더 솔직한 작품일 수도 있고요.

하지만 전 최근에 나온 텔레비전 미니 시리즈 쪽이 더 마음에 든답니다. 원작을 다루는 방식 때문이겠지요. 전 [스칼렛 핌퍼넬]은 충분한 시간을 두고 다양한 음모와 반전을 엮어가며 느릿하게 이어지는 모험담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헤럴드 영의 영화에는 그런 여유가 없어요. (99/12/06)

DJUNA

기타등등

레슬리 하워드는 이 영화 뒤에도 스칼렛 핌퍼넬을 한 번 더 연기한 적 있습니다. [핌퍼넬 스미스]가 그 작품으로, 하워드는 나찌 점령하의 프랑스에서 사람들을 영국으로 빼돌리는 영웅을 연기했답니다. 그의 마지막 영화가 되고 말았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