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트란 안 홍 Tran Anh Hung

주연
트란 누 옌-케....무이 (20살)
Tran Nu Yên-Khê....Mui Age 20
루 만 산....무이 (10살)
Lu Man San....Mui Age 10
트롱 티 록....어머니
Truong Thi Loc....The Mother
엔구엔 안 호아....티 할머니
Nguyen Anh Hoa....Old Thi
부옹 호아 호이....쿠엔
Vuong Hoa Hoi....Khuyen
트란 엔곡 트룽....아버지
Tran Ngoc Trung....The Father

1. 냠냠!

무이

간편하게 코아 아트홀에서 조조 영화를 보고 이대 입구나 뭐 그런 곳에서 점심을 먹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낭패가 있나...! 영화가 흘러가면서 점점 배는 고파오고 입 안엔 군침으로 축축히 젖지 않겠어요? 도대체 영화에 나오는 그 음식들, 왜 그렇게 맛있어 보이는 겁니까? 영화가 끝나자 저희는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코아 아트홀에서 가장 가까운 분식점으로 뛰어가야만 했어요.

정말 그 베트남 음식들은 맛있어 보입니다. 중국 요리들처럼 기름져 보이지도 않고 깔끔하고 이쁘고 정갈해요. 특히 2부에서 무이가 쿠엔에게 차려주는 음식들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습니다. 아침을 먹지 않은 저희같은 애들에겐 고문이었지만 말입니다.

음식들... [그린 파파야 향기]에 대한 첫 이야기는 마땅히 음식들에 대한 것이어야 합니다. 저희가 그 음식들의 이름들이라도 안다면 하나 하나씩 열거하며 긴 묘사를 첨가하겠지만 그럴 능력이 없어 슬프기 그지 없군요. 저희가 이름을 말해가며 언급할 수 있는 것은 무이가 깔끔하게 채를 썰어낸 그린 파파야 뿐입니다. 1부에서 그 음식은 쿠엔을 향한 무이의 순진하고 귀여운 사랑 표현이었지요. 음식을 내려놓고 뒤로 돌아섰을 때 그녀는 영화 속에서 첫번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만! 하지만 뭔가 이상합니다! 이미 영화 보신 분들, 눈치채셨어요? 그 음식들은 너무나 맛있어 보이고 너무나 깔끔하고 너무나 예뻐요. 그 음식들에게는 지상의 냄새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맛있어 보이고 그 만드는 과정 또한 경건하고 아름다운 행사이지만 단지 그것 뿐입니다. 그 모든 것들은 부엌에서 땀을 흘려본 적이 없는 사람의, 지저분하게 밥 몇 숟갈 입 안에 쑤셔넣고 달아나는 남편을 보고 이를 갈아본 적이 없는 사람의, 제삿날 쌓인 산더미같은 설거지감들을 보고 질려보지 않은 사람의 머리 속에서 나온 상상의 음식들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부엌에서 나오는 음식들을 밖에서 먹기만 하는 '남자(!)'의 정교한 창조물이란 말입니다.

음식들은 이 영화를 설명해줍니다. 아름답고 황홀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영화.

2. 베트남 영화?

아니, 어떻게 [그린 파파야 향기]가 베트남 영화지요? 프랑스에서 제작했고, 스탭들도 모조리 프랑스인들이고, 감독도 프랑스에서 교육받은 사람이고, 배우들도 프랑스에서 살고 있지요. 영화가 시작되면서 나오는 자막도 프랑스어잖아요? [마지막 황제]가 중국 영화가 아닌 것처럼 [그린 파파야 향기]도 베트남 영화가 아닙니다.

[그린 파파야 향기]를 베트남 영화로 보면 큰 코 다칩니다. 이건 프랑스적 상상력이 낳은 베트남에 대한 일종의 환상입니다. 로스앤젤레스의 코리안 타운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한국 소년을 상상하십시오. 그가 뉴욕 대학에서 스콜세지 밑에서 영화를 배우고 이제 자기도 영화를, 그것도 한국을 무대로 한, 한국인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하나 하나 꼼꼼하게 자료를 수집하고 일일히 전문가를 찾아가 고증을 받습니다. 동작 하나하나를 검토하기 위해 코리안 타운에서 가장 나이가 든 할머니를 찾아가기까지 하지요.

그가 예술가라면, 일급의 성실한 장인이라면, 그가 만든 영화는 아름다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화는 한국 영화가 아닙니다!

네, [그린 파파야 향기]의 경우가 바로 그렇습니다. 이것은 프랑스 영화입니다. 감독은 이름만 베트남식일 뿐입니다. 영화 속의 베트남은 이국인들의 향수 속에만 존재하는 상상의 나라입니다. 아무리 영화의 섬세한 디테일들이 자신의 사실성을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이 영화는 허공에 떠 있습니다. 뿌리가 없기 때문이지요. 하긴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었겠지요.

3. 무이

두 아름다운 베트남인 여자 배우들이 이 영화의 주인공 무이를 풋풋하고 깨끗하게 연기하고 있습니다. 이름들을 외워 둡시다. 트란 누 옌-케와 루 만 산입니다. 두 배우의 유사성은 거의 초현실적이어서 소름이 쫙 끼치기까지 합니다. 예고편만 보신 분들은 "얘들이 뻥을 튀기고 있군."하시겠지만, 직접 영화관에 가서보십시오. 특히 1부에서 2부로 넘어가는 부분을요. 보셔야 실감이 나시겠지요. 이 유사성의 원인은 감독인 트란 안 홍의 섬세하면서도 간결한 연기 지도의 결과입니다.

무이. 어떤 평론가는 그녀의 굽실거리는 동작이 진저리 나게 싫다고 했지요. 그 정도는 아닙니다만, 저희도 그녀가 참 힘들고 불편하고 화나는 삶을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당시에 베트남에서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두 배우들은 영화 찍느라 등이 무지 아팠을 거예요. 무이와는 달리 그들은 모두 프랑스에서 똑바로 허리를 펴고 자랐잖아요? 여러분, 등펴고 사는 것도 이 별의 어느 곳에서는 은총입니다!

그런데 그러는 그녀가 꼿꼿하게 몸을 펼 때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앞에서도 언급한 장면입니다. 무이가 쿠엔이 오자 그린 파파야를 직접 요리해 가져오는 장면이지요. 음식들을 식탁에 내려놓고 뒤로 돌아설 때 그녀의 허리는 똑바로 펴져 있고, 얼굴은 승리감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다음 장면은 마지막 장면입니다. 임신한 무이가 쿠엔에게 시를 읽어주는 장면 말 입니다. 그녀는 낭송을 마치고 저희를--그러니까 쿠엔을--똑바로 바라보며 웃습니다. 앉아있는 그녀의 자세는 누구 못지 않게 꼿꼿합니다. 감독은 결국 쿠엔이 무이를 평등하게, 한 인간으로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요? 그럴까요? 그녀가 사랑으로 인해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찾았다는 것이 과연 사실일까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생각했었나 보죠. 하지만 저희들의 눈엔 그게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무이에게는 안 된일이지만 저희는 그녀의 허리가 펴지듯 그녀의 노예같은 삶이 쉽게 변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외부의 상황이 바뀌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예 정신은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쿠엔이 아무리 그녀를 가르치고 교육하려고 하더라도 그는 결국 하녀 하나를 아내로 얻었 을 뿐입니다. 그리고 저희는 당시의 베트남 남자가 한 여성을 평등하게 사랑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가 아무리 프랑스에서 교육받고 피아노로 드뷔시의 '월광'과 쇼팽의 전주곡을 아름답게 연주하는 세련된 인텔리라고 하더라도.

4. 주인님과 마나님

이 주인 나으리만 생각하면 저절로 이가 갈립니다. 이 쓸모없는 종자 들은 동아시아 전체에 너무나 골고루 퍼져 있는 모양이지요? 생활 능력은 전혀 없으면서 혼자 고고한 티를 내는 잘난 남자분 말입니다. 만약 그런 양반님을 남편으로 가지고 있는 분들은 이 영화를 보지 마십시오. 화가 너무 나 졸도할 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나 무이의 마나님은 마음이 좋기도 하지요. 그렇게 교육 받았으니 어쩔 수도 없었겠지만, 그녀는 남편이 돌아올 때마다 두 팔을 벌리고 받아들이니 말이에요. 우리 할머니 세대도 그랬겠지요. 그리고 지금 촌구석 어딘가에선 그런 아주머니들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슬픈 일이지 뭡니까!

5. 무성영화?

[그린 파파야 향기]는 참으로 담담한 영화입니다. 영화 전체를 통해서 정말로 극적인 장면은 단 한군데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격렬하고 갑자기 튀어나와 저희 모두 깜짝 놀랐지요. 생각나세요? 2부에서 무이가 떠나려고 하자 마님이 갑자기 무이의 앞에 쓰러져 외치지요. "내 딸아! 내 사랑하는..." 모든 정열과 감정을 가슴 속 깊이 묻어두고 살던 노친네가 갑자기 말 그대로 폭발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의 나머지는 너무나 조용합니다. 사랑과 증오는 모두 잦아들어 배경과 사람들 사이에 스며들고, 모든 등장인물들은 마치 자는 관객을 깨우면 어쩌나 하는 것처럼 조용하게 움직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말도 하지 않습니다. 배우들의 베트남어 악센트가 엉망일테니 다행이지만요. 모든 인간적 감정은 카메라를 통해 드러나지요. 다소 남발되는 듯이 여겨지는 클로우즈 업이 여기서 큰 역할을 합니다.

[그린 파파야 향기]는 발레 영화와 같습니다. 이 영화는 섬세한 은유들로만 구성된 시와 같습니다. 이 영화는 사치스럽고 고상한 눈을 위한 조용한 축제입니다. [그린 파파야 향기]를 즐겁게 보시고 싶으십니까? 스토리를, 베트남의 현실을 잊으십시오. 머리를 잠그고 눈을 여십시오. 그리고 무이와 함께 트란 안 홍이 매혹적으로 꾸민 정교한 인공 세트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94/08/23)

D&P

기타등등

94년 글입니다. 요새 썼다면 이렇게 쓰지는 않았겠죠. 특히 이 글에서처럼 일반론을 마구 남발하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