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힐러리 브라우어
Hilary Brougher

주연
테루미 매튜스....터커 하딩
Terumi Matthews....Tucker Harding
니콜 제이리....드루
Nicole Zaray....Drew
벨린다 베커....오필리아
Belinda Becker....Ofelia
제임스 어버니악....아이작
James Urbaniak....Isaac
토머스 페이즐리....J.L.
Thomas Pasley....J.L.
사만드 벅....고르지
Samantha Buck....Gorge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1953년 어느 날, [끈적이는 시간의 손길]이라는 새 소설을 막 쓰기 시작한 범죄 소설 작가 터커 하딩은 커피를 사러 집 앞으로 나왔다가 그만 1997년의 미래로 떨어집니다. 영문을 모른 채 길거리를 헤매던 그녀는 자신의 재능에 영 자신이 없는 풋내기 작가 드루를 만나지요. 드루는 옛 남자 친구가 경영하는 헌책방에서 막 터커의 책 [끈적이는 시간의 손길]을 사가지고 나온 터였는데, 하필이면 그 책의 책갈피 사이에는 터커가 살해되었다는 내용을 담은 신문 기사가 들어 있었습니다...

2.

[끈적이는 시간의 손길]은 펄프 매거진의 SF를 읽으며 자란 열혈 SF 독자가 푼돈으로 만들어낼 듯한 바로 그런 작품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영화로 데뷰한 감독 힐러리 브라우어가 바로 그런 사람임은 말할 필요도 없지요.

영화 곳곳에 그런 흔적이 보입니다. 이 영화가 소재로 삼고 있는 시간 여행부터가 그렇습니다. 물론 시간 여행은 특수 효과에 돈을 쓸 여유가 없는 독립 영화 감독에게 가장 편한 SF 소재죠. 하지만 브라우어가 시간 여행을 다루는 태도에는 그 이상의 애정이 보입니다. 이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인과의 복잡한 그물은 기둥 아이디어 중심이 아닌 테크닉 위주입니다. 열정적인 장르 애호가가 가장 모범적이고 고전적인 문제에 자기만의 새로운 답을 내놓은 것이지요.

브라우어의 답은 무엇일까요? 특수한 영혼 코드의 조합 때문에 선택받은 몇몇 time freak들은 보통 사람들처럼 연속적인 단선 시간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이들은 시간선 위에서 미래와 과거로 건너뜁니다. 단지 같은 시간대를 두번 겪지는 못하죠. '파이의 어느 쪽부터 먼저 먹건 상관 없지만, 파이 하나를 두 번 먹을 수는 없으니까요.'

영화는 네 명의 time freak들--터커, 드루, 오필리아, 아이작--의 관계를 엮어가며 시간을 재배열합니다. 이들은 시간 여행 도중 서로의 인생에 관여하면서 상대방의 과거와 미래에 영향을 줍니다. 흑백으로 시작되는 영화의 도입부는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글을 쓰고 애인에게 키스하고 맞은편 상점으로 걸어가는 간단한 일이지만, 영화가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힌 후반부에 그 장면을 다시 보면 영화의 전 시간이 다 그 안에 녹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단선적인 시간만으로 그런 재주를 부렸어도 재미있었겠지만, 영화의 인과율은 그보다 더 복잡합니다. 미래를 알게 된 주인공들은 실제로 역사를 바꿀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터커는 실패하지만 드루는 적어도 터커의 미래를 바꾸는데 성공합니다. 여기엔 인과율 게임도 있지만 상징적인 의미가 더 강합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가면 터커와 드루는 지금까지 그들을 가두었던 시간의 감옥을 탈출해서 그들 자신의 삶을 새로 쓰는 데 성공하니까요.

시간 여행 말고도 브라우어의 장르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은 있습니다. 브라우어는 자신에게 영향을 준 작가로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터커 하딩은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와 그 사람처럼 남자 이름 속에 숨어 장르 소설계에서 활동해온 수많은 다른 여성 작가들에 대해 이야기할 목적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제로 영화는 글쓰기라는 행위에 대해 많은 장난을 치고 있습니다. 영화 초반에 드루는 고서점에서 터커 하딩이 쓴 [끈적이는 시간의 손길]을 삽니다. 나중에 터커는 50년대의 과거에서 드루에게서 들은 모험담을 바탕으로 [끈적이는 시간의 손길]을 쓰므로, 만약에 드루가 이 소설을 읽어보았다면 그 책의 내용이 앞으로 그녀가 겪을 모험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겁니다(여기서 논리가 좀 복잡해집니다. 그렇다면 드루가 지금까지 살아온 현재는 드루 자신에 의해 변화된 현재이고 터커는 자신이 살해당하는 연속적인 시간이 아닌 드루가 바꾼 시간대로 날아왔다는 말이니까요. 게다가 책갈피에 숨어 있었던 터커 살해사건의 신문 기사는 어디에서 온 것이지요?) 다시 말해 드루는 책을 사면서 그 책 속의 사건에 말려들고 그 결과 그 책을 쓰게 되는 셈입니다. 이것만 해도 유쾌한 순환이 되지만 여기에서 조금 적극적이 되어서 페미니스트적인 해석을 내리는 것 역시 가능합니다. 그건 각자 하시길.

3.

[끈적이는 시간의 손길]은 극저예산 영화이고 실제로 그런 분위기를 풍깁니다. 경험부족 때문인지 종종 거칠기도 하고요. 하지만 감독이 원래 가졌을 핸디캡을 고려해보면, 결과는 썩 좋습니다. 잠시 나오는 50년대의 브루클린도 잘 구현된 편이고요.

배우로는, 전 터커로 나오는 테루미 매튜스의 냉정한 연기가 좋았습니다. 드루 역의 니콜 제이리도 좋았고요. 하지만 아이작 역의 제임스 어버니악과 오필리아 역의 벨린다 베커는 자신의 스타일을 지나치게 과장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끈적이는 시간의 손길]은 흥미로운 영화지만 그만한 대접은 받지 못했습니다. 미국에서는 뉴욕과 같은 대도시에서 잠시 개봉되었을 뿐, 제대로 배급되지도 못했고요.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00/09/07)

DJUNA

기타등등

1. 직역에 가깝게 [끈적이는 시간의 손가락]으로 번역하는 편이 나았을 겁니다. '손길'은 영화에 나오는 손가락의 상징들을 충분히 살려내지 못하고 있어요.

2. 자막 조절이 잘 안되어서 중반 이후에는 자막이 늘 한 템포 늦게 나왔답니다. 상황 설명이 많은 부분에 그랬으니 문제가 심각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