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김용균

주연
수애....민자영/명성황후
조승우....무명
천호진....흥선대원군
최재웅....뇌전
김영민....고종

무명과 자영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의 일생은 공공재인 것 같습니다. 일단 그들이 사람들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할만큼 재미있다면 더 이상 진실이나 프라이버시는 중요하지 않죠. 이건 당위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사실의 문제입니다.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후세 사람들에게 그냥 장난감입니다.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극영화라는 것들이 다 그렇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죠.

[불꽃처럼 나비처럼]은 그 정도가 조금 심한 영화입니다. 명성황후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는 한데, 여기에 엄청난 픽션을 하나 더 했죠. 명성황후가 고종의 왕비가 되기 전에 무명이라는 검객을 만났는데, 그녀를 사랑하게 된 그 검객이 명성황후가 죽을 때까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목숨도 구하고 구애도 하고 그랬다는 이야기입니다.

신윤복이 여자라는 내용의 소설도 재미있게 읽었으니, 사실 전 이런 식의 과장된 역사 변용 자체에 별 거부감은 없습니다. 이야기꾼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 기회를 잡았다면 그걸 활용해야죠.

물론 독자들이나 관객들이 그 이야기에 동의하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리고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또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죠. 어떤 사람들은 이야기 속의 인물이 자신이 생각하는 실존인물의 이미지와 어긋나서 싫어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야기 자체가 싫을 수도 있고요.

제 경우는 양쪽 다입니다. 캐릭터를 다루는 데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스토리 자체도 저에게는 그렇게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아요. 사실 아주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전 이 이야기의 기본적 얼개 자체에 불만이 있는 건 아닙니다. 고귀한 귀부인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숭배하는 거친 하층계급의 남자 이야기는 분명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구석이 있죠. 잘만 다루면 로맨틱해질 수도 있고 감동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예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설득력 있는 로맨스의 전개가 없습니다. 무명은 너무나도 직선적이고 일방적이기 때문에 그냥 스토커처럼 보입니다. 무명의 입장에서 보면 로맨스지만 상대편의 입장에서 보면 귀찮고 공포스러울 가능성이 높죠. 영화에서는 이들의 관계가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만 그를 정당화할 수 있을만큼 명성황후의 심리묘사가 좋지 못합니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20여년의 세월을 몇 개월처럼 다루고 시퀀스 별로 툭툭 끊어지는 이런 각본으로 연애를 설득력 있게 그리는 건 어렵죠.

더 나쁜 것은 이런 식의 픽션이 명성황후의 캐릭터에 어떤 도움도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린 왜 명성황후를 기억하는 걸까요? 영화가 말하는 것처럼 절세미인이어서? 사랑을 갈구하는 평범한 여자여서? 아니지 않습니까. 이 인물에 대한 여러분의 의견이 어떻건 상관없습니다. 명성황후가 중요한 인물인 건 이 사람이 격동기를 살았던 정치적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명성황후라는 인물을 그리는 영화는 절대로 이 사실을 피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 당연한 사실을 계속 무시합니다. 허구의 로맨스를 강조하다 보니 그 로맨스 안에서 캐릭터가 그냥 박살이 나버리는 겁니다. 무명과 함께 있는 명성황후는 우리가 아는 명성황후와 전혀 다른 인물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차라리 허구의 인물을 만들어 집중하면 차라리 낫겠지만 영화는 또 그러지도 못합니다. 이 영화에서 실존 인물 명성황후와 허구의 인물 명성황후의 경계선은 너무나도 분명해서 집중하기가 어렵습니다. 심지어 한 시퀀스 안에서도 그래요. 명성황후가 유명한 "나는 조선의 국모다"를 외치기 전후를 보세요. 두 개의 드라마가 아주 어색하게 엮여 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나마 남아있는 역사적 사실도 계속 논점을 피해갑니다. 이 영화에서는 명성황후의 정치적 선택과 갈등은 거의 그려지지 않습니다. 심지어 흥선대원군과의 갈등도 피상적으로 그려지죠. 대신 영화는 명성황후가 초콜릿을 처음 먹고 서양 드레스를 처음 입는 것과 같은 지엽적인 사건들을 더 중요하게 다루는데, 종종 보다보면 명성황후를 주인공으로 한 사극이 아니라 연예인 수애가 게스트로 나오는 올리브 채널 프로그램을 보는 것 같습니다. 전 예쁜 연예인들이 돌아다니며 쇼핑하는 걸 보여주는 프로그램에 어떤 유감도 없습니다. 하지만 명성황후가 나오는 영화에서는 이와는 다른 것을 기대하죠.

지금까지 명성황후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무명도 별로 사정이 좋지 않습니다. 가장 나쁜 건 그가 스토커라는 사실이지만 그가 현실세계에 어쩌다 말려든 판타지 캐릭터라는 사실도 그만큼이나 나쁩니다. 그는 영화 내내 붕 떠있고 단 한 번도 현실성을 확보하지 못합니다. 솔직히 전 다른 사람들이 그를 보고 들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합니다.

그와 관련된 액션 장면들도 마찬가지로 걸립니다. 영화는 무명을 위해 와이어와 컴퓨터 그래픽을 잔뜩 쓴 판타지 액션 장면들을 사이사이에 넣고 있는데, 처음 몇 분은 재미있지만 비슷한 액션 장면들이 계속 나오다보면 지치게 됩니다. 게다가 이 장면들은 사실성 여부를 떠나 투박하고 촌스러워요.

영화는 좋은 배우들을 캐스팅했으면서도 그들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지 못합니다. 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와니와 준하]의 연기가 평범한 배우들로부터 최대한의 가능성을 뽑아낸 감독의 능력에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불꽃처럼 나비처럼]을 보고 나서는 원래 김희선과 주진모가 연기를 잘했던 거라고 생각하게 되더군요. 사실 [분홍신]을 보았을 때도 그런 의심을 하긴 했습니다만. 하여간 이 영화에서 수애와 조승우는 감독에게서 거의 도움을 얻지 못합니다. 그냥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방치된 채 통제되지 않는 대사를 읊어야 하죠.

[불꽃처럼 나비처럼]은 92억원을 투자해 4년에 걸쳐 만든 대작입니다. 그 돈이 들어간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만, 제작자 말에 따르면, 원래 사극은 보이지 않는 곳에 돈이 꽤 들어가는 장르라고 하더군요. 전 그냥 그 말을 믿겠습니다. 전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원작과 스토리에서 그만한 돈과 시간을 투자할 만한 가치를 발견했을 거라고도 믿겠습니다. 아마 저와는 달리 영화를 보면서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전달하려 했던 그 가치를 발견한 관객들도 있을 것이며 전 그들의 의견을 존중할 것입니다. 하지만 전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 중 한 명이 되지는 못하겠습니다. (09/09/17)

DJUNA

기타등등

보면서 장윤현의 [황진이]가 생각났습니다. 강렬한 개성을 가진 실존 여성을 주인공으로 다룬다고 주장하면서 판타지 마초 캐릭터를 만들어 그에 종속시켜버린 게 똑같죠. 왜들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