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미카엘 하네케 Michael Haneke

주연
이자벨 위페르....안느
Isabelle Huppert....Anne
아나이스 데모스티에....에바
Anaïs Demoustier....Eva
루카 비스콤....벤
Lucas Biscombe....Ben
하킴 탈레브....소년
Hakim Taleb....Young runaway
베아트리스 달....리즈
Béatrice Dalle....Lise
파트리스 셰로....토마
Patrice Chéreau....Thomas
올리비에 구르메....코슬로프스키
Olivier Gourmet....Koslowski
브리지트 로안....베아
Brigitte Roüan....Béa

에바와 안느

영화는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주말을 보내기 위해 시골 별장에 도착한 안느가 겪는 수난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별장에 도착한 건 좋았는데, 집은 이미 총을 든 낯선 가족에게 점령당했던 거죠. 아빠를 잃고 차도 빼앗긴 안느와 아이들은 자전거를 끌고 간신히 그곳에서 빠져나옵니다. 하지만 자동차들은 보이지 않고 기차도 다니지 않으며 그들의 하소연을 들어줄 경찰관들도 없군요. 뭔가 엄청난 일이 일어나 식량 수급과 교통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거예요. 지금까지 그들을 돌보아 주었던 문명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들은 어쩔 수 없는 야만적 환경과 싸워야 합니다. 그들을 다시 문명 세계로 데려다 줄 기차를 기다리면서요.

전 이 영화를 보면서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나야 우리의 주인공들이 겪는 끔찍한 사태가 발생할까 생각해봤습니다. 답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서구 문화에 바탕을 둔 현대 기술 문명도 붕괴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처럼 며칠 동안 순식간 토대가 사라질 수는 없어요. 아무리 시골이라고 해도 말이에요. 그러니 [늑대의 시간]을 전형적인 SF의 논리에 맞추지는 마시길. 하네케도 이 영화를 그렇게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영화는 그보다 훨씬 추상적이고 막연해요. 영화는 등장인물들이 프랑스어를 쓰는 사람들이라는 것 이외의 다른 정보는 주지 않습니다. 다들 분명한 고유 명사 없이 '도시'니 '시골'이니 하는 막연한 말로 정보를 흐리고 있지요.

[늑대의 시간]이 그리는 재난엔 조금 얄미운 구석이 있습니다. 이 영화가 그리는 재난은 수많은 종말론적 영화들이 지금까지 그려왔던 장엄한 문명의 죽음이 아닙니다. 우리의 유럽인 주인공들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갑자기 아프가니스탄이나 라이베리아 사람들이 겪을 법한 빈곤 속에 빠져 듭니다. 먹을 것도 없고 잘 곳도 없으며 돈은 쓸모가 없어서 물물 교환을 해야 하고 물론 전기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잘 돌아가는 기계 문명 속에서는 지금까지 시야 밖에서 조용히 행해졌던 동물 도살과 같은 것들도 눈 앞에서 벌어지고 말이에요. 물론 이런 일들은 이 행성을 공유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겐 당연한 현실입니다. 그러니 영화를 보다보면 하네케가 이렇게 이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단 말이죠. "너네들도 당해봐라, 이것들아."

그리고 영화는 그 재난을 짜증날 정도로 생생하게 그려냅니다. 영화를 보다보면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며 편안하게 살고 있는 온대 기후의 나라들이 얼마나 메마르고 생기없는 곳인지, 우리가 태평스럽게 누리고 있는 문명의 안락함이 어떤 야만의 대가를 치르고 얻어진 것인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불쾌하고 지저분한 질감은 반복적이고 조금은 따분한 줄거리를 보완하는 영화의 장점 중 하나입니다.

그렇다고 하네케가 살벌한 사디즘으로 일관하는 건 아닙니다. 영화는 이 야만적인 환경 속에서 일어나는 조용한 소통의 흔적을 묘사하려 시도하기도 합니다. 그 끝이 좋은 적은 별로 없지만 시도만이라도 어딘가요.

영화의 결말은 뜻밖에도 거의 종교적입니다. 지금까지 냉정하게 전개되었던 이 매정한 이야기의 결말처럼 느껴지지 않을 정도죠. 하네케는 정의단이라는 신비스러운 단체와 그들의 희생에 대한 이야기를 뜬소문처럼 들려주다 거의 장엄하기까지한 자기 희생의 의식으로 영화를 몰고갑니다. 이 선택이 옳은 건지는 몰라도 이 냉랭한 영화에 상당한 정서적 힘을 부여해주는 건 사실입니다.

[늑대의 시간]은 개봉 당시 그렇게 좋은 평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러기엔 하네케의 야유와 몰아붙이는 느낌이 너무 강했기 때문일 거예요. 하지만 이 영화가 제공하는 불쾌한 느낌을 쉽게 잊을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고 그 중엔 하네케의 야유 속에서 그들이 살고 있는 문명의 허울에 대해 생각해보는 사람들도 많을 겁니다. 그것만 계산해도 영화는 상당한 일을 해낸 거죠. 전작 [피아니스트]처럼 배우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영화는 아니지만 전체적인 앙상블 연기 역시 좋고요. 위페르는 언제나처럼 훌륭했지만, 이 영화에서는 위페르의 아이들을 연기했던 아나이스 데모스티에와 루카 비스콤의 야무진 연기가 더 눈에 들어오더군요. (03/10/30)

DJUNA

기타등등

[인 디스 월드]와 같은 날에 이 영화를 봤습니다. 가축 도살 장면들을 이렇게 연달아 많이 보기도 처음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