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다린 아로노프스키 Darren Aronofsky

주연
미키 루크....랜디 '더 램' 로빈슨
Mickey Rourke....Randy 'The Ram' Robinson
마리사 토메이....캐시디
Marisa Tomei....Cassidy
에반 레이첼 우드....스테파니 로빈슨
Evan Rachel Wood....Stephanie Robinson
마크 마골리스....레니
Mark Margolis....Lenny
토드 배리....웨인
Todd Barry....Wayne
와스 스티븐스....닉 볼프
Wass Stevens....Nick Volpe
주다 프리들랜더....스코트 브럼버그
Judah Friedlander....Scott Brumberg
어네스트 밀러....아야툴라
Ernest Miller....The Ayatollah

랜디

다린 아로노프스키가 [더 레슬러]같은 단순하고 소박한 장르 영화를 만들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겁니다. 우린 지금까지 그를 지적인 주제를 세련되고 복잡한 스타일로 다루는 지성적인 남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더 레슬러]는 정반대 방향으로 갑니다. 척 봐도 [챔프] 스타일의 구닥다리 권투영화 스토리를 그대로 가져오고 있죠. 영화의 줄거리를 알기 위해 영화를 볼 필요도 없습니다. 포스터와 배우들 이름만 봐도 시작에서부터 결말까지 줄거리가 다 나와요. 그리고 그 예측은 다 맞습니다. 맞을 수밖에 없어요. 한물간 운동선수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가 달라봐야 얼마나 다르겠습니까?

그렇다고 너무 당황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더 레슬러]가 단순한 영화인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가 [챔프]나 [록키]와 같은 영화들의 복사판인 건 절대로 아니고 그렇게까지 장르에 충실한 스포츠 소재 멜로드라마도 아닙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소재입니다. 권투 영화들의 예를 들었지만 이 영화가 다루는 소재는 프로레슬링이지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프로레슬링은 관객들도 인정하고 보는 쇼입니다. 진짜 폭력이 아니라 연출과 연기가 가미된 오락이지요. 이 영화의 주인공 랜디 램은 운동선수이기도 하지만 연예인이기도 합니다. 프로레슬링의 이 두 성격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쉽게 떼어낼 수 없습니다.

랜디의 비극도 여기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랜디는 허구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가 벌이는 싸움은 모두 어느 정도 연출되고 조작된 것이라, 그 세계 속에서 자신을 통제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에게 현실 세계는 낯설고 위험한 공간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에게 각본을 주지 않고 합을 맞추지도 않으니까요. 현실 세계는 그가 챔피언이라고 봐주지 않습니다. 자산관리, 연애, 아빠 노릇... 이들 중 랜디가 성공한 건 하나도 없습니다.

특히 그의 연애 이야기는 재미있습니다. 그는 동네 스트리퍼인 캐시디를 좋아하는데, 척 봐도 둘은 동류입니다. 양식화된 폭력을 파는 랜디처럼 캐시디 역시 양식화된 섹스를 파니까요. 사실 캐시디는 열심히 세상을 살아가는 사랑스러운 사람이지만, 이런 직업을 가진 사람을 연애 대상으로 선택한다는 것 자체가 그의 한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랜디에게 캐시디는 현실세계의 잠재적 여자친구가 아니라 그가 어느 정도 견뎌낼 수 있는 허구입니다. 단지 그걸 현실로 착각하고 있을 뿐이죠.

그렇다고 영화가 랜디의 직업을 가볍게 보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영화는 처음부터 프로레슬링이 어느 정도 쇼라는 걸 명백히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스포츠가 손쉽다고 말하는 건 절대로 아니에요. 이 영화의 프로레슬링은 여전히 힘겹고 아프고 종종 무서운 직업입니다. 전 지금까지 프로레슬링이 가학적인 스포츠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완전 반대더군요. 프로레슬링 선수들이 자신의 육체에 일부러 가하는 고통은 소름끼칠 지경입니다. 적당히 피해도 될 텐데 랜디는 이 모든 것에 열성입니다. 그는 정말로 프로레슬링을 사랑하고 이 쇼에 정직하고 거기에 온 몸을 바쳐요. 어쩔 수 없죠. 세상에서 그가 잘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고 그것을 잃으면 존재의미 자체가 사라지니까요.

스토리는 전통적인 멜로드라마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영화는 과도하게 주인공에게 몰입하지 않으면서 차분하게 그의 세계를 묘사합니다. 말없이 주인공의 뒤를 따라다니는 카메라는 종종 다큐멘터리와 같죠. 이러한 거리두기는 프로레슬링 세계의 세부묘사에도 사용되지만 보다 전통적인 멜로드라마의 사건 전개에도 사용됩니다. 랜디와 딸 스테파니의 관계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도식적이지만 이들 이야기의 결말은 공식에서 상당히 어긋나 있지요. 시작은 공식을 택했지만 사실성을 버리면서 결말까지 따를 생각은 없었던 겁니다. 영화는 딱 랜디라는 남자가 할 수 있는 것만 보여줍니다.

미키 루크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이야기를 끝낼 수 없지요. [더 레슬러]는 다린 아로노프스키의 영화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미키 루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스튜디오에서는 니콜라스 케이지나 실베스터 스탤론을 원했다던데, 그들이 나왔다면 미키 루크만큼의 현실성은 얻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엉망으로 일그러진 루크의 얼굴 자체가 드라마니까 말이죠. 게다가 루크와 랜디 램은 거의 같은 부류입니다. 둘 다 80년대에 반짝했다가 이후의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퇴물로 물러난 ‘연예인’들이죠. 영화를 보다보면 종종 배우와 캐릭터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이게 늘 좋으라는 법은 없지만 적어도 이 영화에서만은 연기에 처절한 진실성을 부여하더군요. (09/02/18)

DJUNA

기타등등

역시 말년에 고생하지 않으려면 젊었을 때 돈을 모아야합니다. 랜디는 나름 스타였던 모양인데 번 돈을 다 어떻게 날렸나 몰라요.